장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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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

張德秀. 대한민국독립운동가였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으며 정치인이며 언론인. 황해도 재령군 출생으로 호는 설산(雪山).

부인 박은혜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사 및 기숙사 사감,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장, 은석초등학교 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다.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다녔다. 이 때 송진우, 김성수를 만났다고 한다.

학교 졸업 후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과 신한청년단을 결성하고, 일본에 가서 2.8 독립선언에 관여하여 3.1 운동이 일어나는 데에 기여했다. 이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유배되기도 했으나 여운형일본 당국의 도쿄행 요구에 수락하는 조건으로 장덕수를 통역으로 데리고 가겠다 하여 감금에서 해제, 일본을 다녀가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여운형이 "설산 형"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여운형과 가깝게 지냈다.

1920년 4월에 동아일보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해 4월 창립과 함께 초대 주간을 맡았다. 동아일보 주간을 맡는 동시에 1920년대 초중반에 사회주의자로 서울청년회, 고려공산당 등 사회주의 단체에 관여해 활동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내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내분으로 갈려 제명당한다. 이후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는 등 실력양성론으로 기울어 김성수와 가까이 지내게 된다. 1923년 4월 동아일보 부사장 겸 주필로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이후 13년 간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지내면서 체류한다. 이 시기에 이승만 등이 조직한 단체가 동지회.[1]

어쨌든 미주 지역에서 나름 독립운동 활동은 꽤나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미주에 체류하는 동안 장덕수는 삼일신보사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주필로 지내는 등 활동했다. 1934년 4월부터 9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주미제5행서(뉴욕) 재무위원을 잠깐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6년에 귀국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귀국하자마자 8월 25일 터진 일장기 말소사건의 여파로 동아일보의 부사장직에서 사퇴하게 된다.(...) 이후 1936년 12월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강사로 활동하게 된다.

1938년 동아일보 취체역(대표자리)으로 복귀했으나, 그 해 9월 장덕수가 한때 활동했던 '동지회' 활동으로 '흥업구락부 사건'[2]에 연루돼 체포되었다가 곧바로 전향서를 쓰고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와 동시에 "조선민족혁명을 목적으로 한 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 교육자로서 무지했으므로 이에 대해 책임지고 사직한다."는 내용의 사직서를 보성전문학교에 제출하고 사직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장덕수는 미주 지역에서 '합법적인 공간'하에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 그러나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로 적극적인 친일파로 변절해버렸다. 이후 1938년~1945년까지의 장덕수는 각종 어용단체라든가 그 단체에서 주관하는 시국 강연에 적극 나서는가 하면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수 없이 많은 글을 기고하거나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흑역사로 인해 장덕수는 뒷날 80년대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이 쓴 한국의 친일파 99인에서도 수록되었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대한민국 정부 직속기관 친일진상규명위에서도 수록되었다.

광복 이후 1945년 9월에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 결성하는데 커다란 활동을 했다. 이후 장덕수는 여운형안재홍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총독부와 연탁하고 돈받아 처먹은 친일파 단체'라는 등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을 비롯한 소수 무리배들이 한반도 정세를 어지럽게 만들었다는 등' 내용의 발기인 성명서 작성을 기초하기도 했으며 한국민주당 결성 이후 1945년 9월부터 1947년 12월 사망할 때까지 한국민주당 외무부장과 정치부장을 지냈고, 1945년 11월에는 미군정청 조선교육심사위원회 사범교육분과 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동아일보의 복간과 취체역(이사)를 맡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2일 서울 제기동 자택에서 저녁식사 도중 자택에 찾아온 경찰관 박광옥, 초등학교 교사 배희범 등의 권총 저격을 받고 피살당했다.

여담으로 1920년대~1930년대 미국 유학 시절에 김활란한테 청혼했다가 차였다고 한다(...)그리고 둘 다 친일파로 전락했다 그리고 장덕수를 습격한 박광옥은 인촌의 집에서 일한 가사도우미의 아들이었다.
  1. 그런데, 동지회는 재미한국인 사이에 분열을 조장한 원흉 단체다. 동지회는 재미한국인 사이에서 가장 많이 활동하는 국민회를 때려부수고 자금 터는등 소위 '정치깡패' 노릇을 했던 단체…. 동지회는 '이승만 친위대'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의 단체였다.
  2. 수양동우회 사건과 거의 같은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