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圭植
1879년 1월 13일 ~ 1922년 9월 25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호는 예관(睨觀), 일민(一民)이다. 1879년 충청도 청주목에서 태어났다.
1895년 서울로 유학하였다. 1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뒤 임관되어 참위,부위까지 진급하였다.
1905년 고향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소식을 듣고 지방 진위대와 연락해 거사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다. 이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등 애국계몽단체에 참가하였고 중동학교 등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1909년에는 대종교에 귀의하였다.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이 시기 쑨원과 쑹자오런, 친치메이등 중국의 혁명가들과 교류하면서 중국동맹회에 가입, 한국인으로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여하였으며, 중국에서 줄 곧 독립운동을 하였다. 군사교육도 장려하여 한국 청년들을 중국 각지의 군사학교에 입학시키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가 이범석을 손문에게 소개, 운남육군강무학교에 입학시킨 것이 신규식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앞서 미국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이 14개조의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이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11월에 법무총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의 내분으로 이승만에 대한 대통령 불신임안이 그의 불참 속에서 통과되었다. 이후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가끔씩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헷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