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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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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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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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부터 김규식, 서재필, 여운형)

독립운동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성명을 해야 했다. 그래서 자기 본명을 자기도 잊곤 했다.

김규식 (金奎植, 1881년 1월 29일 ~ 1950년 12월 10일). 대한민국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으로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다. 종교는 개신교(장로교)이고 교명은 요한(Johann)이며, 아호는 우사(尤史), 죽적(竹笛)이다. 독립운동가 중 그 누구보다 현실을 냉정히 통찰했던 당대의 엘리트 석학으로 손꼽힌다. 무려 8개 국어를 유창하게 회화할 수 있었던 어학의 천재로도 알려져 있다 [1]

선전관, 시종무관으로 지내던 동래부사 종사관인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김용원)과 어머니 경주이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미국 유학을 떠나 프린스턴 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시절 러일전쟁과 일본의 승리를 미리 예견했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 경신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언더우드의 비서로 신앙, 종교 활동을 했다. 105인 사건에서 간신히 투옥만을 피한 뒤 망명하여 몽골, 만주에서는 독립군단 창설을 위해 노력 했으나 실패했다.

1918년 어학구사능력을 인정받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됐고 현지에서 임정 외무총장에 임명됐다. 이후 구미위원부 위원장, 학무총장을 지냈으나 임정을 탈퇴, 창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고 1930년대에는 대학교수로도 활동했다. 1940년에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입각하여 부주석(부통령격)과 선전부장을 지냈다. 친일파들에게는 공공의 적이었다고 전해진다.

1945년 귀국 후 신탁통치를 반대했으나, 미소에 의한 탁치가 불가피함을 인식하고 찬탁으로 돌아섰다가 극우단체의 테러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좌우합작운동에 이어 남북협상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한반도 문제 개입을 비판적으로 보고 조선 민족이 자력으로 국가를 건설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납북됐다는 이유로 남한에서 흑역사 내지는 좌빨이라 낙인찍힌 비운의 인물.

1967년,1968년경에 와서야 연구가 진행되고 1972년 무렵에 와서 복권되었으나 건국훈장을 수여받기까지는 15년이 걸렸다.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로 불렸음에도 이 때문에 이승만이나 김구에 비해 인지도가 많이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고 대부분 의도적으로 그를 외면하는 수준이며 그를 아는 소수의 인식마저 너무나 왜곡되어있어 아직까지는 현시창이다.[2]

2 그의 생애

2.1 출생과 어린 시절

김규식은 경상남도 동래군[3]에서 동래 군수 종사관으로 관료 출신 김지성과 경주 이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경주 이씨 부인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4]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을 따라 그는 본가가 있는 강원도 홍천으로 갔다. 아버지가 대일교역을 비판하다가 유배를 가고, 어머니도 그는 7살에 숨을 거두자 구걸을 다녀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5]

집안은 화려했는데 사도세자 저격수인 김상로가 6대조의 사촌 형이었고, 부자가 영의정인 김재로, 김치인은 6대조의 사촌, 5대조의 6촌이었으며, 정조 때의 노론 지도자 김종수는 김규식의 고조할아버지의 8촌 형님이었다. 와우...

그러나 순조 때 세도가문이 집권하면서 노론 벽파를 숙청할 때, 김종수 집안 역시 노론 벽파로 몰려서 숙청. 그리고 몰락.[6]

그뒤 할아버지가 다시 관직에 올라 집안을 일으켰다. 아버지 김지성은 외무 관리로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였으나 민씨 정권의 대일본 의존 정책을 비난하다가 귀양을 갔고, 1888년 어머니마저도 사망하여 고아가 됐다.[7]

2.1.1 불확실한 출생년도

김규식의 출생년도는 1881년으로 되어 있다. 이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이정식 교수가 청풍 김씨의 족보를 확인한 것이다.[8] 그러나 김규식의 출생년도는 1877년생 설, 1880년생 설이 있다. 1993년 이전의 자료들은 대부분 1877년생 설을 채택하고 있다. 참고로 김규식도 남북협상 당시 자신이 70고개라고 언급한 바 있다.

태어난 생일 역시 불확실하여 2월 28일(음력 1월 27일)생 설과 1월 29일생 설, 12월 10일생 설[9]이 있다.

이는 김규식에 대한 관심이나 연구가 다소 소홀하여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탓도 있다고 볼 수 있다.

2.2 유년시절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떠돌았는데 냉담한 어른들과 짓궂은 청소년들의 시달림 때문에 개인적으로 냉정한 성격이 됐다고.

삼촌들은 형편이 안 되어 언더우드 목사의 고아원에다가 그를 데려다 주었지만, 언더우드 목사의 고아원은 8세 미만의 어린아이는 양육하기 어렵다 하여 다시 되돌려보낸다. 그는 삼촌들에게 양육되었지만, 가난한 형편의 삼촌들은 그를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고 그가 굶주림으로 인한 영양실조와 열병으로 죽기 직전까지 가자 그를 뒷방에 눕히고 병풍을 쳐놓았다 한다.

그 뒤 언더우드 목사는 아이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강원도까지 찾아갔다. 그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돌보아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딱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언더우드는 자기도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너무 굶주렸던 그 아이는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삼키고 있었다. 너무 딱하고 불쌍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언더우드는 그 아이를 돌본다는 것이 무척 힘들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아이를 고아원으로 데려 가고자 했다.#

그러자 언더우드 목사의 주변 사람들은 그 아이가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하며 말렸고, 그 아이가 죽게 되면 언더우드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덤터기를 쓸 수 있다고 경고했다.[10]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는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를 데려가 치료하고 극진히 간호하였고, 어린 김규식은 그렇게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2.3 고아가 되다

언더우드 목사는 기력을 회복한 어린 김규식에게 영어를 가르치다가 자신이 세운 민노아 학당에 보내 영어, 수학, 지리, 과학 등을 배우게 한다. 김규식은 성적도 우수하였다.

김규식은 조선의 첫 고아원 겸 예수학당(경신학당)의 학생이 됐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고 해서 언더우드는 그를 '번개비'라고 불렀다. 이후 언더우드 학당에서 영어와 수학, 라틴어, 신학, 과학 등을 배웠다.

그러나 그가 고아인 데다가 친척도 아닌 목사의 집에 산다는 것이 학교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었고 참을 수 없었던 김규식은 가출(?)을 단행하여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한성 시내를 떠돌다가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 다시 강원도 홍천으로 되돌아갔으나, 1882년 아버지도 곧 병으로 사망한다. 1884년에는 할아버지 김동선과 큰형이 연이어 사망한다. 김규식은 의지할 곳 없는 천애고아가 되었다.

2.4 미국 유학

1894년 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서재필독립신문 기자로 잠시 있었고, 1896년부터 1903년까지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버지니아 주에 있는 루터교 계열 인문대학 로노크 대학교에서 영문 학사를 취득했다. 재학 중 그는 고종황제의 서자 의친왕(義親王)과 만나 교우관계를 형성하였다. 웅변부 활동을 하면서 연설 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으며, 문학 동호회 데모스테니언 문학회의 회장이자 전체 3등으로 조선 출신 2번째 학사를 취득했다.

1903년 가을 미국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 1904년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로노크 대학에서 영문 학사를,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는 영문학 석사를 받았다. 그러나 보통 김규식 박사라 부르는데 이는 그가 후에 모교인 로노크 대학에서 받은 명예철학박사 학위 때문이다.

프린스턴 대학원에서는 그가 박사학위 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조국의 앞날이 염려된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박사학위를 거절하고 귀국했다.

아무튼 이 도미 유학 시절에 김규식과 마찬가지로 로노크 대학에 유학 와 있던 의친왕과 교류하기도 했고, LA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안창호 및 남가주 한인 유학생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김가진을 일제의 감시에서 빼돌려 망명시킨 상해 임정에서 그해 11월 대동단[11]을 통해 국내의 유력 황족 의친왕상하이로 망명시키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는데, 김규식이 당시 임시정부의 주요인사였다는 점과 이 시절 모종의 교류가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꽤나 흥미로워질 일이다.

귀국 직후 그는 교육자로 활동한다. YMCA학교 학생부 담당 겸 간사(학관의 학감)으로 지내면서 스포츠를 강조했다. 새문안교회 장로를 지내기도 했다.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장학금과 도쿄 외국어대학교 영어교수직, 도쿄제국대학 동양학과 장학생 특별 입학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고,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람을 보내 도쿄제국대학 동양학과의 장학금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2.5 항일 독립운동

지난 세월 나는 미국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지만, 지금부터는 조선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겠다.

2.5.1 파리 강화 회의와 임정 참여

1918년 신한청년당으로 활동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현지에서 외무총장에 임명되었다.[12] 그러나 파리 강화 회의에 기대를 했으나 일본의 압력, 그보다 한국 문제는 관심조차 없었던 열강의 무관심으로 참가가 무산된다.[13]

회의 주최국인 프랑스 외무성 측은 정부 자격이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을 하자 그는 상하이에 정부수립의 필요성을 알리며, 임시정부 수립의 기폭제가 될 만한 사건을 기획해야 된다는 것도 알려왔다. 그에 따라 독립운동가 들은 1919년 3월 3.1 만세운동을 준비하여 실행에 옮겼고, 3.1 운동을 기회로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다.[14]

임정에 참여하여 파리위원장, 구미외교위원장, 외무총장, 학무총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2.5.2 임정 사퇴

1920년 임시정부 내부에서 독립운동 방식을 놓고 심한 대립갈등과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는 김규식은 신채호와 함께 창조파의 입장에 서기도 하였다. 이 때 창조 개조론을 탐탁지 않게 보았던 임정 고수파에 의해 수시로 임정에서 퇴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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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임시정부에 실망감을 느껴 이승만을 성토하고 결별. 만주에서 대한독립군단의 지휘관으로도 활약하였고, 임정을 떠나 1920년대초 고려공산당 후보당원,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동방 노력 자 대회(극동피압박자민족대회)에 조선대표 의장 자격으로 참석하여 영국프랑스, 미국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15]

이후 1924년~1926년 초까지는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잠시 떠나있었다가[16], 1927년 2월 난징에서 유자명·이광제(李光濟)·안재환(安載煥), 중국인 무광루(睦光錄), 인도인 간다싱·비신싱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 유자명은 중국 국민당 중앙본부에게 적극 후원을 약속받은 뒤 그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을 창간하고, 1927년 텐진(天津)으로 옮겨가 북양대학(北洋大學)의 영문학 교수로 초빙되어, 1929년까지 교수생활로 자녀와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교수 생활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한계가 있었고, 이조차 일본영사관 경찰의 눈을 피해 다니느라 일정하지도 못하여 생계는 어려웠다. 1927년에는 둘째 딸 민애를, 1930년에는 큰딸 한애를 병으로 잃었다.

2.5.3 민족 유일 당 운동

1930년 8월 다시 임시정부에 입각하여 임정 국무위원 겸 학무 장에 선임되고, 그해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재선됐다.

1932년 4월 상해 윤봉길 의거 직후, 김원봉이 남경중앙정치학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자 김규식은 남경중앙정치학원 한인특별반의 군사교관이 되었다. 1932년 11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의 송병조·양기탁 등의 요청으로 국무위원에 취임하였다. 1932년 겨울 '중·한 민중 대 동맹', 대일전선 통일연맹, 한국광복동지회 등의 단체를 결성, 조직하였으며 이후 항일독립을 위해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다. 그해 10월 12일 상해 민국으로 동방여사에서 한독당의 이유필, 송병조, 김두봉, 조선혁명당의 최동오, 한국혁명당의 윤기섭, 신익희, 의열단의 한일래, 박건웅 등과 함께 민족 유일 당 창당회담을 가졌다.

1933년 남경중앙정치학원 영어강사가 되었다. 1933년 4월 5일 미국을 방문 로스앤젤레스에서 500여명이 모인 구류노류 대학교에서 열린 한국독립에 관한 연설에 강사로 참석, 7월 중한민중대동맹 대표 자격으로 다시 출국, 미국을 방문했다.

귀국후 그는 7월 21일 하와이 한인 교포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김규식이 중국으로 떠난 뒤 본 동맹의 비밀요원인 이용직과 한길수를 개인적으로 미주 대표로 임명하여 본 동맹과 정보교신을 담당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17]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당 주석 직에 올랐다.

2.5.4 임시정부 재 입각

1940년 민족 유일당 운동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구 등을 만나 회담을 하였으나 의견 차이로 유일당은 실패하고 대신 항일 공동연합전선 설립을 결정하여 민족혁명당의 임시정부 입각을 결정한다.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나갔다.

1944년 6월 1일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 측의 오철성 등, 한국 측의 엄항섭·안원생 등을 설득, 재중동포 중 기독교인의 우호단체인 기독교 한교복리회(基督敎韓僑福利會)를 조직하였다. 1945년 3월 임시정부는 김규식과 외무부장 조소앙·정환범(鄭桓範)·임의택(林義澤) 등을 미국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파견하려고 국민당 정권의 승인과 군자금까지 결재를 받았으나,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2.6 정치 활동

2.6.1 미군정기 정치 활동

해방 후에는 45년 12월 임시정부 귀국 제1진의 한사람으로 김포비행장으로 입국했다. 이후 거처는 서울 삼청동의 삼청장으로 정했다.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한반도 신탁통치 안이 결정되자 김규식은 처음에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하다가 모스크바 3상회의 전문을 입수하면서 부분적 찬탁을 동의했다.[18] 이때부터 그는 반탁세력에 의한 테러위협에 시달려 수시로 거처를 옮겨야했다.

46년엔 김규식을 암살하려던 자객들이 김규식의 자택인 삼청장의 담을 넘다가 걸려서 도주했다. 국회 격인 10월 과도입법의원 중 관선의원에 선임되고 12월 과도입법의원을 구성, 의장에 취임했다.

김규식은 공식석상에서 친일파 청산 문제에 적극적인 주장들을 여러차례 했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것이 1947년 새해 아침에 발표한 신년사로,# 이 신년사에서 김규식은 "특히 남북에 있어서 친일파, 민족반역분자, 악질모리배 등의 발호는 심하여 민생은 극도의 도탄에 빠지고 한편으로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는 비애국자의 진영으로서 계획적으로 남한에 있어서 공전의 소요사건을 양출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1947년 5월 12일에 열린 입법의원에서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단이 '민족적 명제'라고 밝히고, 이와 관련된 특별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 줄 것을 주장하기도 했었다. 즉, 김규식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말로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반대하는 요소로 인식하고 있었다.

2.6.2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 협상

좌우합작은 독립을 위한 제1단계요. 이 단계를 밟지 않으면 둘째단계인 독립을 얻을 수 없다면 내가 희생하겠소. 당신이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댈 것도 알고 있소. 또 떨어뜨린 후에는 나를 짓밟을 것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소. 내가 희생된 다음에 당신이 올라서시오.

1946년에는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여운형의 암살로 실패.[19] 이후 민족자주연맹을 만들고 정치활동을 했다.

1948년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정계를 떠났다.

그뒤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위원장으로도 선출됐고, 한민당과 민국당으로부터 영입 제의가 들어왔으나 모두 거절했다.[20]

이후 그의 삼청장에는 출입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싸늘해졌다. 남북협상 이후 그는 좌파로 몰렸는데, 그는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빨갱이로 몰리는 것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21]

2.7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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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의 묘소. 평양 신미리의 애국열사릉. 뒤에 조소앙의 묘도 보인다.

1950년 6.25 전쟁때 북한군에게 납북되어 12월, 평안북도 만포진이란 곳에서 뇌출혈, 천식, 동상 등 이런저런 병으로 병사했다.[22]

수백만이 슬퍼한 김구의 죽음이나 여운형의 죽음에 비교하면 그의 죽음은 한참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2.8 기타

임시정부 소속이었는데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둘 다 참여한 몇 안 되는 정치인이라는 점에서[23] 독특한 입지를 지녔다고 볼 수 있으며, 러일전쟁을 예견하거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성격을 이해하는 등 외교적 식견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정치를 할 만큼 통이 크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몸이 약해서 항상 아팠다고 한다. 간질 증세가 수시로 일어났고 뇌종양 수술도 받고 신경통,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미군정 쪽에서 그에게 붙인 별명은 sickly(약골)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Kim Kiusic이라고 썼는데 미묘하게 비슷하다(...) 해방 후 어느 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하는데 어디가 편찮으신 것이냐고 물었더니 김규식은 "차라리 안 아픈 곳이 어디냐고 묻는 게 더 빠를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장죽담배 피우기를 즐겼다. 남북 연석회의 차 북한에 가서 장죽담배를 물고 문서에 서명한 일도 있었다.

처음에 좌우합작운동에 대해서 좀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북분단과 좌-우 정치적 지형이 극단화되어갈수록 이대로 있어서 안된다는 생각에 총대를 메고 나서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일화 하나로 1946년 어느날,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찾아와 좌우합작을 권하면서 당시로는 큰돈인 50만원인가를 내놓자, 애연가인 김규식은 2자나 되는 긴 담뱃대를 집으면서 "형님은 대통령이나 하시오. 나는 대통(장죽담배)이나 즐기겠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승만에게 "형님은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 댈 것임을 알고있소.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소"라고 발언했다고 한다.[24]

어학의 천재로 다국어에 능했고 영어를 매우 잘하여서 미군이 놀랄 정도였으며, 임시정부 활동 시절에 임정 요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신채호도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웠는데 김규식이 발음이 틀렸다고 자꾸 지적하자 신채호는 단어 뜻만 알면 되지 발음은 뭣 하러 공부해야 하느냐고 서로 싸웠고, 신채호는 이광수한테 영어를 배웠다. (...) [25]

임정 시절부터 여운형과 형님 아우님 하는 매우 친한 사이였다고 하며,(여운형이 5살 아래로 동생이다.) 여운형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그의 부인이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할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한국민주당공산당에서는 그가 일본인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루머를 내서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한국민주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 했으나 김규식은 거절했다.[26]

민족자주연맹의 총재였고, 남북 총선거에 불참가 선언을 했지만 비밀리에 사람들을 보내 당원들에게 출마를 권유하기도 했는데, 특히 1950년 5.30총선거 때 주변사람들에게 출마를 적극권유했다고 한다.

KBS에서는 한때 '여명의 그날'같은 근현대사 드라마를 찍을 때는 동명이인인 성우을 김규식 역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엔하위키도 없던 시절부터 대놓고 성우드립.역시 덕력 쩌는 캐백수! 대한민국 건국세력에 난부 박사라니!! 건국세력에 난부 박사라니!!

야인시대에서 배우 문회원이 연기했다. 좌우합작을 방해한 김두한의 이런 과격한 행보에 매우 실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허나 그럼에도 과거 김좌진과의 인연 탓인지 미군의 조사에서는 김두한을 애써 감싸는 모습도 보여준다.

서울 1945에서 배우 이대로가 연기했다. 그러나 좌우합작 설명 내레이션 때 대사 한 마디없이 말 그대로 지나가는 역할이다.(...)

의외지만 1946년 4월 25일에 칼로 자살을 기도했다. 실패 이유는 이웃 사람이 방으로 뛰어들어 칼을 빼앗았기 때문. 사실 4월에는 김구나 이승만도 그런 무서운 생각을 했었다. 그러니 신경쓰지 말자.

(나) 보도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 도당은 장차 수립될 정부에서 권력의 완전한 장악을 기대하고 있다. 이승만은 자신은 대통령이 되고, 김규식은 부통령이, 김구는 국무총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적대행위를 추구할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괴뢰정부와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항의 표시로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 이후 그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이들의 죽음에 격분한 인민들은 조선 전역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일으킨다. 이 운동의 선두에는 친일분자들, 민족반역자들, 토지개혁에 화가 난 지주들 및 반공주의자들이 나설 것이다.

3 성격

성격이 매우 차갑고 냉소적인 편이라 인간적으로는 친해지기 어려웠다고 한다. 전형적인 학자풍의 성격으로 정치인의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 당대 인물들의 주된 평. 후일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겸 총리를 지낸 우양 허정은 그를 두고 '매우 냉정한 분' 이라는 짧은 평을 남겼다. 또 매우 현실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일평생 정치 생명을 담보로 모험하지 않았다.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주도한 탓에 원조 통일 정부 론을 주장한 대표 격 인사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실제론 제의를 받고도 매우 망설였다고 한다. 실제로 남북협상 당시에도 맹동 적이었던 김구와 달리 일찌감치 북한정권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매우 현실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좋게 말하면 현실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인 성격이었던 셈이다.

3.1 일화

기본적으로는 깐깐한 원칙주의자였으나 의외의 면도 존재한다. 그 일화로 허정의 증언을 들 수 있다. 다른 임정요인들과 함께 경교장을 방문한 허정은 김규식이 아들 김진동과 맞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공깽에 빠졌었다고.부자가 간접흡연을 통한 유효데미지를 나누고 있다니 이에 대해선 아마 그의 투철한 자유주의 사상 관에 입각한 평등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추측만 이어질 뿐이다.

한편 민족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매우 부정적이었다. 민족 스스로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수도 있겠지만 사실 민족 그 자체에 예찬적인 태도를 견지할 의무를 강요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사실 21세기의 한민족 현실을 정확히 예언했는데 하나 첨언하자면 최남선은 조선민족의 품성을 착하다고 규정하면서 친일 행각을 일삼았다. 또한, 그가 공산주의를 반대한 반공주의자라고 알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속으로 드러난 입장이지, 적어도 공식적인 담화나 발표 글에서는 좀처럼 '반공주의'적인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27] 이는 해방정국기에 좌익으로부터 각종 비난과 비판이 쏟아질때도 김규식이 정면으로 좌익을 비난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가 가장 중요시했던 원칙은 '민족통일전선과 좌우합작'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매우 싫어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을 지지하던 청년 하나가 찾아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자 "왜놈들이나 하던 짓 쓸데없이 무엇 하러 하시는가?" 라며 일축했다고.

  1.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인도어 구사까지 했었다고 한다.
  2. 이러한 이유는 김규식의 성품 때문이다. 김규식은 호방하기보다는 내성적이어서 남들 앞에 나서기보다 사색을 즐기는 문인기질의 학자 형 인물이었다. 그 때문인지 해방정국 대표적인 정치인치고는 인지도가 많이 낮다. 오늘날 나이 드신 원로인 분들 가운데 정치에 관심 없으신 일반 원로인 분들이라도 이승만, 여운형, 김구, 박헌영 등 당대 정치인들은 잘 알고 있지만, 김규식에 대해서는 잘 아는 이들이 적은 편.
  3. 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로 편입
  4. 이정식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김규식은 경주 이씨의 아들이 아니라 첩에게서 얻은 서자라 한다.
  5. 맏형 김규찬은 큰아버지 김우성의 양자로 갔다.
  6. 김종수 등은 노론 청명당 계열로 노론의 강경파였지만 벽파는 아니다. 시파는 더더욱 아니었다.
  7. 경주 이씨의 친자가 아니라는 설에 의하면 법적 어머니라는 것.
  8. 《우사 김규식의 생애(신구문화사, 1974)》에서 처음으로 알려졌다.
  9. 북측에서는 12월 10일생 설을 채택했다. 북한 애국렬사릉 비문에는 1880년 12월 10일생으로 되어 있다.
  10. 조선에 도착한 서양인 선교사들은, 조선인에 대해 "미개하고 불결하며 심보가 잔인하다"는 평가들을 내렸다. 또한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고 평가했다. / 다만 이 시각은 21세기의 한국인들이 21세기의 아프리카 빈국에 가서 살 때 그곳에 관해 가지게 될 감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인습 항목 참고.
  11. 부평군수를 지낸 바 있는 전협을 필두로 조직된 소규모 독립운동조직. 관심 있는 위키러라면 신복룡 교수 저, <대동단실기>라는 책을 참고하길 추천. 이래봤자 대동단에 대해 다룬 책은 딸랑 그거 하나다
  12. 임명장은 팩스로 도착됐다.
  13. 1918년 12월 당시 그는 신한청년당 대표로 참석하였으나, 회의 주최국인 프랑스 외무성 측은 정부 자격이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는 통고를 보냈고,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극이 되어 각지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원인이 된다.
  14. 1919년 9월에 가서야 각지의 임시정부가 통합된다.
  15. 이 연설에서 김규식은 프랑스, 미국, 영국, 일본을 흡혈귀 국가라고 성토했다. 이러한 행보는 그가 공산당원으로서의 깊은 자각으로 인한 행보라기 보단 '민족자결주의'같은 국제조류가 조선의 상황과는 맞지 않자 또 다른 축이 될 소련에 외교적 행보를 한 것이라 추측된다. 실제로 이 시기는 민족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사회주의에 기대를 가졌던 인물들도 많았고..
  16. 1924년 9월 재중국 소련무역대표부 석유과장의 이름으로 된 한 보고서 기록에 따르면, "김규식은 과거에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였고 국제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의 2차 회의에도 참가했었음. 현재에 그는 그의 신념을 바꾼 변절자이며 사업쪽으로 방향을 돌리려는 그의 시도도 실패하고 있는 인물임. 미국 석유의 판매를 비롯한 몇 차례의 회사 설립을 위한 그의 시도는 알려져 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곧 러시아를 떠난 뒤 이미 김규식은 공산당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었으며 이런 그에 대해 소련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 그가 선임한 두 대표자 중 한길수는 미국 내의 이승만 세력과 수시로 마찰을 일으켰고, 이것도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한 가지 원인을 제공했다. 한길수의 반항에 기분이 상한 이승만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그를 과격파나 공산주의자로 지목하기도 했다.
  18. 모스크바 3상 원문이 '신탁통치가 주요문제가 아닌 어떻게 해서 한국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느냐?, 어찌 어찌해서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거기서 미국과 소련이 어떻게 해서 지원을 해주느냐?'이런 식으로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에 '모스크바 3상회의'보도를 처음한 동아일보가 이를 왜곡시켜 '신탁통치'안을 부풀려버렸던 것이다.
  19. 여운형 암살시점이 제2차 미소공위가 한창이었는데, 제2차 미소공위 때 당시 좌우세력이 '선 임정 후 반탁'이라는 내용아래에 합의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이 상황에서 좌우합작위원회가 결속되었던 것이고 그 중재자이자 구심점 역할인 여운형이 암살당했으니…
  20. 1949년 4월 북한에서 송전을 끊어버려 김규식을 정치적으로 궁지로 몰고 갔다.
  21. 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manhistory/vod/1340863_968.html
  22. 1950년에 사망한 게 아니라 1952년까지 생존해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다. 1980년대까지 백과사전들은 1952년 사망 설을 실었으며, 1980년대 말부터 북한 측의 자료나 애국렬사릉의 묘비명을 보고 1950년 사망 설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6.25 전쟁 직후 작성된 납북, 피랍자 신상 관련 자료에는 1952년으로 된 것으로 보아, 1952년에 사망했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23. 여운형은 남북연석회의 이전에 암살당했다. 단, 좌우합작 추진 과정에서 남북합작까지 해야겠다고 홀로 5번 북행길에 오른 적이 있었다.
  24. -출처 : 조규하 등, '남북의 대화', 1972-
  25. 이 때만 해도 이광수는 친일파 로 변절한 단계가 아니었으므로 문제될 건 없었다.
  26. 그 이유는 한민당은 극우세력에 단독정부 수립을 지향했었는데, 김규식은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지향했으며 단독정부 수립운동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했었다.
  27. 좌익에 대한 김규식의 직접적인 언급이 별로 없는 가운데서도 몇몇 연구는 김규식을 '반공주의자'로 규정한 바 있다. 이때 근거로 많이 인용되는 것이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동한 바 있던 강원룡에게 했다는 "우리 민족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잔인한 성정이다. 공산혁명을 통한 여러 나라의 유혈혁명 사례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터지면 피바다가 된다."' "라고 하는 발언이다. 김규식이 속으로는 공산주의는 안된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견지했으나, 중요한것은 적어도 공식적인 담화나 글을 통해서는 좀처럼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