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 축구 관련 인물, 축구 해외파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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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심재원 (沈載源 / Sim Jae-won) |
생년월일 | 1977년 3월 11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생 | 대전광역시 |
신장 | 184cm |
포지션 | 풀백 |
유스팀 | 연세대학교(1996~2000) |
소속팀 | 부산 아이콘스(2000~2001)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2001~2002) 부산 아이파크 (2002~2008) 광주 상무 불사조(임대) (2003~2004) 창사 진더 (2009~2010) 강릉시청 축구단 (2010) |
국가대표 | 20경기 2골 |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탁월한 대인마크 능력과 스피드를 갖춘 중앙 수비수이며, 의외의 테크닉과 드리블 실력으로 오른쪽 풀백도 볼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이다. 다만 종종 결정적인 실수를 범해 안정적이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미 잊혀져서 잘 모르지만 나름 한 때 무려 히딩크의 황태자였던 분(...)
2 선수시절
1997년 FIFA U-20 월드컵에 출전한 바 있으며, 이 당시 대표팀은 브라질, 프랑스와 같은 조에 속했던 탓에 별다른 활약 없이 예선 탈락을 맛보았다. 이후 2000년 부산 아이콘스에서 데뷔했으며, 그 해 AFC 아시안컵과 올림픽에 참가하는 등 당대의 유망주로 각광받았다.
이후 2001년 부산의 K리그 컵대회 준우승에 기여하는 등 나름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2001년 1월 부임한 히딩크 감독의 눈에 띄어 고종수와 더불어 초창기 히딩크호의 황태자로 불렸다. 당연히 주전수비수로 계속 출장했고 심지어 오른쪽 풀백으로도 시험해보는 등 높은 기대 속에 기회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오히려 당시 오대영과 더불어 히딩크가 까이는 이유 중 하나일 정도로 그렇게 믿음직한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경기를 출장할 수록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건 사실인데 실수가 너무 잦았고 애초에 국대는 선수를 성장시키는 곳이 아니다. 다만 당시 히딩크는 홍명보를 중심으로 한 한국축구의 스리백을 포백으로 변화, 정착하려는 시도를 하는 중이었다. 즉, 한국은 포백 경험이 없었고 처음으로 시도하는 포백의 센터백으로서 심재원을 꾸준히 사용해본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실수와 시행착오를 심재원이 많이 짊어진 측면도 있고 당시 닥주전이던 홍명보와 히딩크가 힘싸움을 하는 와중에 홍명보만큼 안정감을 못 준 이유도 있다. 여하간 축협과 히딩크의 믿음 속에 국대로 꾸준히 출장했다. 그래서 2002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협회가 대표팀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추진한 "유망주 유럽진출 프로젝트"에 선발되어서[1] 당시 2부 리그로 강등되었던 분데스리가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그 뒤 입단 테스트에 합격해 1년 임대 후 이적이라는 조건으로 최종 계약만을 남겨두고 있었는데, 당시 원 소속팀인 부산은 적은 이적료와 연봉[2]으로 심재원이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을 것이라며 이적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안정환에 이어 또다시 주전 선수를 내주는 것에 김호곤 감독이 불만을 표하기도 했으나, 당시 여론이 "유망주들은 무조건 해외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어서 어쩔 수 없이 양보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당시 국대에서의 활약 덕분인지 심재원 관련 기사가 독일 빌트지 1면을 장식했다고...
파일:Attachment/Sim Eintracht Frankfurt.jpg
이런 사정 끝에 결국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하게 되어 한국 선수 중 최초로 유럽 무대에서 활동한 중앙 수비수가 되었다. 당시는 해외진출이라고 하면 J리그에나 가던 시절이고 유럽무대에서 뛰는 선수는 거의 없던 시절이라 큰 주목을 받았다. 이적 초반에는 계속 선발로 나와 풀타임을 소화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고, 대표팀에서도 거스 히딩크의 신임을 받으면서 계속 선발되었다.[3] 하지만 부상 및 컨디션 난조로 인해 소속팀에서 주전 자리를 잃었으며, 자연스럽게 월드컵을 앞둔 대표팀에서도 점차 멀어졌다. 이후 대회 직전에 이민성이 부상을 입어 대체자로 시험해보기도 했었는데, 결국 예비엔트리에는 들었지만 최종적으로 선택을 받지는 못했다.[4] 초창기 황태자 소리까지 들었던 걸 생각하면 나름 충격적인 결말...그리고 월드컵 이후로도 국대에 다시 선발되지 못하면서 조용히 잊혀진 선수가 되었다.근데 똑같이 황태자 소리 듣던 고종수도 결국 월드컵 못갔다.
월드컵 이후 프랑크푸르트로의 완전 이적에 실패해 원소속팀인 부산으로 돌아왔으며, 2004년부터 2005년까지 광주 상무에서 군복무를 했다. 전역 이후 다시 부산으로 복귀해 활약하다가 2009년 김은중과 함께 중국 슈퍼 리그의 창사 진더로 이적했으며, 2010년에 국내로 복귀해 강릉시청 축구단 소속으로 활약하다가 은퇴했다.
3 은퇴 이후
은퇴 이후 KNN의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이 프로젝트에 선발된 대표적인 선수로 당시 베르더 브레멘에 입단했던 이동국이 있다.
- ↑ 임대료가 20만 달러(당시 약 2억 5000만 원), 연봉 15만 달러(당시 약 2억원)을 제시받았다.
- ↑ 여담으로 대표팀 차출 문제로 소속팀인 프랑크푸르트와 축구현회 간에 대립이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는 그 당시 유럽에서 뛰고 있던 다른 선수들도 모두 갖고 있었다.
- ↑ 문제는 그렇게 선발되었던 이민성이 독일전과 터키전에서 전혀 좋은 플레이를 해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당시 심재원의 부상과 컨디션 난조는 축협, 그리고 당시 감독인 히딩크의 책임도 무시하지 못한다. 우루과이와 평가전을 한다고 유럽에 있는 선수를... 그것도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닌 선수를 10시간 넘게 비행기 나게 만든 후에 바로 출전시켰으니... 거기다 심재원은 그 경기에서 치명적인 미스로 결승골을 내줬고, 연패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히딩크는 '멍청한 선수 때문에 졌다'는 충격적인 발언까지 내뱉었다. 이 경기에서 심재원은 육체적인 것은 물론 정신적인 면에서 큰 타격을 입었지만, 2002년 월드컵 4강에 도취된 축구팬들 중 그의 아픔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