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여성기금

1 개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라야마 도미이치[1] 내각 당시의 일본이 세운 재단.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돈이나 현직 총리의 편지를 주거나, 복지시설의 지원사업을 펼쳤다.

일본은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일본 정부의 이름으로 돈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위의 재단을 설립해서 정부자금을 재단에 기부하는 식으로 위안부에게 도움을 주는 방법을 택했는데, 사업 운영자금이 일본 정부 재정에서 나왔다. 다만 보상을 위한 기금은 일본 정부가 직접 출연하지 않았고, 국민 모금을 통하여 구성하였다.

2 설립

1994년, 사회당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를 수반으로 한 자민당, 사회당, 사키가케당 3당의 연립정권이 탄생하였고, 그 해 8월 31일, 무라야마 총리는 전후 50년을 향한 담화[2]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진심으로 깊은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표명하며, "그 마음을 국민과 나누기 위해 '폭넓은 국민 참여의 길'을 탐구하겠다"라고 밝혔다.

이 담화에 따라 연립여당 3당은 '전후 50년 문제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다케베 쓰토무(武部勤)를 위원장으로 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소위원회'가 출범하여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및 기타 관련 양국간 조약[3] 등에 따라 새로이 국가가 개인에게 보상을 할 수는 없었고, 이에 대해 개인보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당 내에서 강력하게 제기된다. 이 보고에 따라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고 정부와 국민이 협력하여 '기금'을 설립,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전국민적인 보상의 마음을 나타내는 사업과, 여성을 둘러싼 오늘날의 문제해결을 위한 사업을 추진할 것을 결정하였다.

1995년 6월14일, 이가라시 코조(五十嵐広三) 관방장관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우호기금'의 사업내용과 일본 정부의 방침을 설명하고, 더불어 '기금' 설립을 호소하는 '발기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아시아 여성기금의 설립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 7월 18일에는 무라야마 총리가 '아시아여성기금 설립에 즈음한 내각총리대신의 인사말'을 발표하고, 7월 19일에 하라 분베이(原 文兵衛) 전 참의원 의장이 기금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약칭 아시아 여성기금)이 정식으로 출범하게 된다.

3 보상 과정

아시아 여성기금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추가바람.

3.1 필리핀

태평양전쟁 이후 필리핀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조인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 관련된 배상, 그리고 재산 및 청구권의 문제에 관해서 일본과 필리핀 간의 법적 해결이 끝난 것으로 되었다.

3.2 대한민국

3.3 대만

3.4 네덜란드

3.5 인도네시아

4 보상 결과 요약

국가보상금 수령자 수비고
필리핀3명보상 사업의 일환으로 의료복지 지원 사업이 시행되었다.
대한민국61명당시 추산 생존 피해자 수는 207명
대만13명당시 추산 생존 피해자 수는 36명
네덜란드78명
인도네시아추산 불가[4]3억 8천만엔 규모의 고령자 사회복지 추진 사업이 시행되었다.

5 평가

한국에선 주체가 일본정부가아닌 민간차원의 지원이라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다. 실제로 위안부단체에서도 이 보상안을 받아들인 위안부피해자들을 배신자 취급하기도 했다.
  1. 무라야마 담화의 그 무라야마 총리 맞다.
  2. 무라야마 담화와는 다른 것이다. 무라야마 담화의 정식명칭은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이다.
  3. 대표적으로 한일기본조약 같은 것들. 다른 피해국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4. 인도네시아가 일본의 점령지였기 때문에 일본군에 의한 강간 등 피해자까지 포함되어 그 추산이 힘들어졌다. 결국 인도네시아 정부가 "인도네시아에서 실시하는 위안부 문제에 관련된 사업 및 원조는 인도네시아 정부(특히 사회성)을 통해 실시되어야 하며, 다른 조직과 개인을 통해 실시되는 일은 없다."라고 못박고, 직접 테이블에 나오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