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전

1 설명

조선시대에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딸려서 행정실무를 담당하던 하급관리들의 총칭이다.

2 분류

중앙관청에 딸린 이들은 경아전이라 했으며, 지방관아에서 일하는 이들은 외아전이라 칭했다. 경아전에는 녹사(錄事)와 서리 (書吏)가 있었고, 외아전에는 서원 (書員), 일수 (日守), 차비군 (差備軍) 등이 있었다.

녹사는 중앙관청에서도 6조와 중추원 등 중요 기관에서 근무하는 이들을 칭했으며, 기타 관청에 근무하는 이들이 서리였다. 조선 초기에는 녹사가 514일을 근무하면 종 6품의 관직을 받고 수령에 특채될 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서리는 녹사보다는 더 지위가 낮아서 2,600일을 근무해야 승진이 가능했는데 품계가 더 낮은 종 7품이나 8품이 한계였다. [1]

서원은 수령과 6방 아래서 세금징수, 손실답험 등의 실무를 보는 이들이었고, 일수는 지방관청의 군관 밑에서 죄인을 체포하고 그들에게 칼을 씌우고 곤장을 치는 일을 담당했으며, 관아의 문지기도 맡았다. 그 외에는 수령의 둔전을 관리하기도 했다. 차비군은 조선시대 지방군의 주둔지인 영과 진에서 잡무에 종사하던 진군이 차비군이란 명칭으로 바뀐 것이다. 경국대전에서는 이들은 보인 1명을 배속받게 규정되어 있었다.

3 지위의 하락과 부정부패의 온상

본래 신라 말~고려 초에 등장했던 호족들이 고려가 건국되면서 지배체계로 흡수되어 지방세력을 형성했다가, 고려 말부터 중앙의 강력한 통제를 받으며 지위가 격하되기 시작했는데, 조선 시대가 되자 아전으로 변한 것이다. 이들은 과거 시험 중에서 문과를 볼 수 없었고 직역의 대가로 어떠한 토지나 녹봉조차도 지급되지 않았다.[2] 향리와 똑같은 점은 대대로 역이 세습되었다는 점 뿐이다.

조선 전기에는 따로 이과 (吏科)라는 시험을 치르고(요즘으로 치면 7~9급 공무원 시험) 그 결과를 통해 임명되었으며, 그에 따른 품계도 받았으나 16세기가 지나가면서는 품계도 나오지 않았고 양반 계층에게서 멸시를 받기 시작한다.

사실상 조선시대 지방행정 부정부패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들 아전이었다. 생활을 하려면 수입이 있어야 하는데, 그 지역의 모든 행정 실무를 담당하고, 지방 관아 유지비나 행사비, 부역시 드는 경비를 모두 자기가 채워 넣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전 일은 수입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할 줄 아는 일은 대대로 세습되어온 아전 일뿐이고 문과도 막혀버렸으니[3] 다른 직업을 찾을 수도 없다. 이렇다보니 좋든 싫든, 살기 위해서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고[4], 실제로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향리들은 갖은 방법으로 향직(= 향리로서의 일)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부터는 세금의 부가세인 읍징분(邑徵分)[5]을 떼먹거나, 백성들이 군역/잡역을 줄이거나 면제받기 위해 뇌물을 내는 행위인 계방(契房)이 완전히 정착하면서부터는 반대로 엄청난 경쟁률을 불러오게 된다.[6]

또한 관리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그 지방의 사람을 수령으로 파견하지 않는 상피제도에 따라 다른 지방 출신의 사람이 수령으로 오게 되는데 이들은 임기도 5년으로 짧고 새로 부임한 지방의 상황을 잘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7]. 이렇다보니 아전들에게 행정실무를 맡겼고 부정부패가 횡행했다. 이런 경향은 조선 후기에 들어 지방에서 관권이 강화되면서 그 아래에 있는 아전들의 지위와 권한도 더 막강해지며 삼정의 문란이라는 시너지 효과까지 낳게 된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근무할 당시 수시로 아전들을 처벌했던 것도 극한의 전시상황에서 당연히 이들의 비리와 과실을 넘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전래동화에서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악역 중간보스이방이 바로 이 아전의 하나. 지방 관아에는 조정의 6조처럼 이·호·형·병·예·공방이 존재하여 이를 6방 아전이라고 불렀다. 6방 아전은 일반적으로 여말선초 시기 지방의 업무가 분화된 과정에서 성립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각 지방에서 정착된 시기는 일정하지 않다. 조선 초기에는 호장(戶長)[8]이 6방의 중심이 되어 수령을 보좌했다. 이를 호장 중심의 공형체제(公兄體制)라고 한다. 특히 이중 삼공형(三公兄)이라 하여 이방, 호방, 형방을 가장 중요하다 여겼는데, 이 중 호방이 삼공형을 대표하며 호장이 없을 경우 이를 대리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 변화하는데 이방의 권력이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경향을 보였다. 조선 후기에 가면 이방 중심의 공형체제(公兄體制), 즉 이방중심체제가 보이게 되는데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이방의 모습이 발견된다.

부정부패의 이미지 및 실제 그런 일이 있던 역사 탓에 동화의 주인공이 높으신 분들에 속하는 현감 어르신이든, 아니면 나무꾼이나 농부 같은 평범한 백성이든 어쨌거나 이방은 압도적인 비율로 악역이다. 이방은 현감 입장에서는 지방 현지 공무원 텃세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다. 때문에 선역 수령 입장에서는 골치아픈 존재가 된다. 반면에 수령도 악역이면 아전이 수령과 결탁해서 입안의 혀처럼 움직이는데, 이 때 이방의 이미지가 가장 흔한 간사한 간신 캐릭터로 일반적 평민의 적이 된다.

아이러니한게 봉산탈춤과 같이 당시 양반 사대부들의 횡포를 풍자한 내용을 담은 탈춤 놀이들을 보존, 계승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 아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탈놀이의 내용에 대해 일종의 '아전들의 한풀이'란 성격도 일부 있다는 해석이 있다. 아전 자신들 또한 양반들에게 억압받는 존재이며, 자신들이 각종 부정부패 등의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결국 양반들과 그들 위주로 돌아가는 체제의 모순때문임을 주장하기 위함이 탈놀이라는 형태.

4 기타

전근대시절 아전과 같은 말단 지방 공무원들의 월급까지 중앙에서 챙길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를테면 영국은 지방관직이 대체로 무보수 명예직이었다고 한다. 물론 자격조건이 젠트리 계급 이상이어야 했으니 별 상관은 없지만. 그리고 프랑스의 경우 영국에 비해 방대한 관료 조직을 자랑하긴 했는데, 프랑스 혁명 직전 전체 세입 5억프랑에 세출 6억 2천만 프랑으로 막대한 적자도 자랑했었고 그 가운데 절반은 관료들에게 지불되는 연금이었다. 이 시기 프랑스 역시 기본적으로 관직은 매관매직이 당연한 거였는데, 하필 이게 연금제 형식이라(즉 관직을 사는 사람은 그만한 규모의 '국채'를 사는 것과 비슷한 거였다.) 점점 이자 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버렸다고. 세금 걷는 것도 징세청부업자가 있어서 이들이 걷은 뒤 일정부분을 가진 뒤 나머지를 국가에 내는 방식이었는데 이들의 부패는 프랑스혁명의 원인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들 청부업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도 라부아지에일 것이다. 이 이상의 정보는 세리를 참고할 것.

사실 중앙 관료에게 지급되는 녹봉이란 것도 다른 생계기반 없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규모는 절대 아니었다. 청나라는 지방 말단 공무원들에게까지 월급을 챙겨주긴 했으나, 이들의 월급은 보통 농부 수입의 1/3 도 안되었기에 월급만으로 살면 극빈층이였고, '모선'이라 하여 생계를 위해 세금을 거둘때 규정액보다 더 거둬서 떼먹곤 했다. 부정부패를 열심히 때려잡던 옹정제도 이 문제를 인식했기에, 아예 제도화시켜 추가로 걷는걸 허락하되 수치를 정해두었다.
  1. 문제는 서리들 중에서 임기를 다 채워서 다른 직책으로 옮기는 거관자가 굉장히 많아서 거관후에도 승진이 힘들었다.
  2. 조선시대 기준으로 경아전은 형식적으로는 녹봉이 있었지만 나라에서 제대로 주지 않았다. 외아전은 그나마 생계수단으로 나라에서 지급하는 외역전(外役田)이 있었지만 세종 때 혁파된다.
  3. 무과, 잡과가 남아있지만 출세를 위해서는 문과를 봐야 하는데 그게 막혀버렸다...
  4. 그래서 조선 전기 아전의 부정부패는 생계형 부패인 경우가 많다. 일단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5. 읍징이란 지방에서 각 지방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추가로 거두던 세금이다
  6. 이 시기 이들을 통제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방 수령은 이들과 결탁해 자기 배불리는 게 먼저였고, 향리들을 감시하던 유향소는 힘을 잃어버렸다.
  7. 이 때, 자신이 부릴 아전 한 명 정도를 미리 뽑아서 데려가기도 하는데, 이 아전을 부르는 명칭이 배비장타령으로 유명한 비장(裨將)이다. 원래부터 존재하던 현지 출신 아전은 이에 대비해서 외아전이라고 부른다.
  8. 지방 향리 층의 장으로 고려시대 존재했던 향리직의 수장이다.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는데 과거를 자유롭게 볼 수 있었던 고려와는 달리 경국대전에서 이들은 중인층으로 고정되어 신분상승의 기회를 박탈당했다. 호장은 6방의 수장으로 지방관을 보좌하는 일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