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道水軍統制使
1 개요
임진왜란 중에 설치된 종2품 외관직[1]의 조선 무관. 조선 수군의 실질적 최고 지휘관. 임진왜란 이후 상설직이 되었다. 일명 통제사또라 불렸다.
2 내용
삼도통제사·수군통제사·삼도수군통제사라고도 한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 '하삼도(下三道)'의 수군을 지휘, 통솔한 삼남지방의 수군 총사령관으로서, 오늘날 직책으로만 따지면 3성 제독급인 해군작전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수군통제사는 작전 지휘권인 군령권과 인사권을 포함한 일반 지휘권인 군정권을 모두 가지기 때문에 군정권에 한해서는 해군 참모총장에 상응한다 할 수도 있다.[2] 정확히 말해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미 해군의 어니스트 킹 제독과 같이 해군 참모총장이 군령/군정 모두를 총괄하는 구조라 볼 수 있다.
사실 현대의 해군참모총장이나 해군작전사령관과 완전히 매치된다고 하기는 애매하다. 조선 수군은 하삼도 외의 다른 도에도 존재했으며 총 17명의 수군절도사 중 각 도의 관찰사가 겸임하지 않고 정직의 무관이 임명되는 건 총 6명. 전라 좌,우도에 각 1명씩, 경상 좌,우도에 각 1명, 충청과 경기에 각각 1명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라는 관직과 조선 수군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굳이 현대의 대한민국 해군에 비유하면, 잠재 적국을 일본으로 상정하고 기존의 해군참모총장-해군작전사령관이란 직제 대신 서해의 제2함대를 제외한 각 해역 함대와 제7기동전단을 하나의 연합함대로 통합한 뒤 그 연합함대 사령관이 해군 전체의 군령권과 군정권을 더한 형태이거나, 해군의 주전력인 제7기동전단의 전단장의 계급과 위상 및 위력을 기존의 함대사령관보다 더 위로 격상시킨 뒤 이 권력을 부여하는 형태가 가장 비슷하다.
물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수군을 제외한 타지방의 조선 수군은 지금으로 치면 거의 해안경비대나 수상경찰 수준이고, 실질적인 해군으로 작용하는 조선의 해상전력 대부분이 서남해안의 3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삼도수군통제사가 실질적인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므로 해군참모총장과 매치시켜도 크게 이상하진 않다. 이렇게 조선 수군의 전력이 하삼도에 집중된 이유는 조선 수군의 가장 큰 임무가 일본의 해적 활동이나 정규군의 침입을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이것과 유사한 직책으로 해도원수(海道元帥)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강화도를 포함한 경기도 수군을 직할하여 각 지역 수군의 연합작전을 지휘하는 직위였다.
조선 육군의 경우 도원수란 직책이 있었으나 상설직인 삼도수군통제사와는 달리 임시 관직이고 지휘 범위도 유동적이었다.
3 직제의 역사
1593년(선조 26년) 8월 평양과 한성(서울) 수복 이후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해상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수군에 수군통제사라는 새로운 직제를 만들고, 초대 수군통제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李舜臣)을 임명하였다.
이는 전(全)수군을 통솔할 지휘관이 없어 왜적의 침입에 즉각 진압할 체제를 갖추지 못하였고, 조정의 명령에 따라 연합함대를 구성한 후에도 각도 수사(水使)가 도별로 선단(船團)을 지휘, 각 선단 간의 의견이 상충하여 효과적으로 전국(戰局)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에게 수사 이하 각 지휘관들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군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지휘권을 부여하였다.
2대 통제사는 원균이었고, 3대 통제사는 다시 이순신이 맡았다. 4대 통제사 이시언(李時言)부터는 거의 대부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경상우도 수군절도사)가 겸직하였다. 그럴만도 한게 경상우수영은 당시 조선의 전 수군부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으며, 일본에 가장 근접한 최전선에 위치한 부대라는 점에서 때문에 지휘관인 경상우수사의 발언권도 전 수사들 중 가장 강했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수군이 좌ㆍ우도수영 모두 합쳐 약 50~60여척 밖에 되지 않았던 반면, 경상우수영은 단독으로 75~100여척의 전선을 보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이를 따져보면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경상우수사인 원균을 재치고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이 임명된것 자체가 원균이 임진왜란 초기에 한게 아무것도 없다는 증거인 셈이다. 임진왜란 당시 원균이 이를 제대로 운용하기만 했다면 임진왜란은 임진년 모월 모일에 왜구가 대규모로 쳐들어 왔으나 경상우수사 원균이 함대를 끌고 나가 물리쳤다 이 한 줄의 기록만을 남기고 사람들에게 아웃 오브 안중 취급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는 평이 있을 정도이다.
임진왜란 당시 수군통제사 벼슬 자체는 정3품 수군절도사와 동급이었으며, 단지 3도 수사들의 지휘권만을 가진 자리였다.[3] 그러나 임진왜란이 종식된 후, 통제사는 정3품 수군절도사보다 상위직으로, 각 도의 지방행정의 최고직인 관찰사나 육군최고지휘관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같은 품계인 종2품으로 격상된다. 또한 대개의 경우 그보다 상위 품계에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상설직이 된 이후에 법으로 정한 임기는 2년이었고, 그 아래 수사나 수령과는 엄격한 상피제[4]가 적용되었다. 수군통제사가 지휘하는 곳을 통제영(統制營]), 또는 통영이라 하는데, 처음에는 한산도(경남 통영시)에 두었다. 칠천량 해전 때 한산도 통제영은 파괴되었고 명량 해전 이후 이순신이 수군을 재건하면서 고금도(전남 완도군)에 통제영을 설치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잠시 여수의 전라좌수영이 통제영을 겸하다가 1601년 경상우수사 이시언이 통제사를 겸직하면서 두룡포(頭龍浦; 통영시)로 옮겼다. 이후 1895년 7월에 폐지될 때까지 300년간 이어졌고, 그 동안 208명이 수군통제사 자리에 올랐다.
3.1 휘하수영(수군절도사)
3.2 나무위키에 등재된 삼도수군통제사 역임자
- ↑ 外官職 : 지방 관청의 관직. 중앙의 경관직(京官職)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 ↑ 더 간단하고 쉽게 말하자면 작전사령관은 모병이나 배 건조같은 생산적인 부분에선 거의 관여 하지 않는다.
컨트롤 담당그러나 삼도수군통제사는 이런 업무도 전부 담당한다. - ↑ 물론 수군통제사에 임명될 때 이순신의 품계는 다른 수사들에 비해 높은 "정2품 정헌대부"였기 때문에 지휘권을 행사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 ↑ 相避制 : 친인척간에 같은 관청 또는 업무상 관련 있는 관청에서 일할 수 없게 하고 연고가 있는 지역의 관직을 맡지 못하도록 한 제도
- ↑ 삼도수군통제사 로 임명된후 바로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