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오 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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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입성이라는 명예와 2만명 미군의 목숨을 맞바꾼 전투

1 먹어랏 구스타프

1943년 9월 3일 연합군이 처음 이탈리아에 상륙한 이래, 10월에 미 제5군이 나폴리를 점령하고 몽고메리의 영국 제8군이 동부해안의 포지아를 점령함에 따라 연합군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견고한 발판을 굳혔다. 이제 연합군은 독일군의 군화아래 있는 '영원의 도시' 로마를 점령하기 위해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로마는 알다시피 그리스와 더불어 서양문명의 뿌리인 로마제국의 발상지이다. 이러한 상징성때문에 연합군 장군들은 고트족의 알리릭, 훈족의 아틸라에 이어 자신의 이름이 로마 입성이라는 역사에 남기를 바랐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장군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 시작되었고 서로 로마에 먼저 입성하기위해 혈안이 되있었다.

일단, 나폴리에서 로마로 가는 길은 딱 두가닥 밖에 없다. 둘다 고대로마 때 건설된 도로인데 하나는 해안가의 평지를 따라 로마로 뻗어있는 '아피아'가도 이고, 또 하나는 '카실리나'가도로 카시노산을 따라 로마로 이어져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진격하는 동안 숱한 산악전을 치룬 연합군은 더 이상 산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라고 할 정도로 이탈리아의 험준한 산세에 질려있었기 때문에 아피아가도로 진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독일군도 바보가 아니므로 연합군이 이 길로 진격하는 동안 산정상에서 집중포화를 퍼부울 것이 뻔할뻔자고 설사 포화를 무사히 탈출한다하더라도 북쪽에 위치한 '폰티네'늪지대가 연합군의 발목을 잡을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서 발목을 잡힌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독일군과 함께 머드축제를!!!결국 연합군은 울며 겨자먹기로 카시노산의 '카실리나'가도로 갈 수 밖에 없었다.연합군 장병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이탈리아전선 총사령관이자 독일군의 명장 중 하나인 알베르트 케셀링원수 또한 연합군의 이러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카시노산에 '먹어랏구스타프'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참고로 이 '구스타프' 라인에 대해 설명하자면 가히 제2차세계대전을 통틀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어선이라고 평할 수 있다. 포진지와 지휘소는 산중의 단단한 자연 암반층을 뚫고 그 속에 건설되었고, 무수한 박격포히틀러의 전기톱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촘촘히 배치되었다. 크레인을 통해 필요한 곳에 간단히 옮겨 설치할 수 있는 토치카가 수없이 제작되었고, 그 중 큰것은 75mm(!!) 대전차포를 발사하도록 설계된 것도 있었다. 또한 산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연합군 진격로의 요충지마다 파묻힌 전차가 포탑만 내놓은체 매복하고 있었다. 이곳에 배치된 독일군도 코흘리개 신병들이 아닌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 제 15장갑사단, 제 1공수사단 등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이미 만렙을 찍은 역전의 베테랑들 이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방어선 전방에 매설한 지뢰 탐지기에도 포착되지 않는 목함지뢰인 '슈'와 밣으면 공중에 튀어올라 파편을 뿌리는 'S'지뢰 7만5000개로 가히 연합군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영원히 고통받는 연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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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색이 구스타프 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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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이라 잘 보이지 않지만 구스타프 방어선의 모습이다.[1] 흰선은 라피도 강

이 방어선을 공략하기 위해 분투하던 미 제5군은 엄청난 사상자에 결국 GG치고 11월 5일 공세를 중단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연합군 지휘부는 바다로 눈을 돌려 안치오에서 상륙작전을 전개하는 것을 계획하게 된다. 연합군의 작전구상은 이러했다.

1. 2개사단을 배에 실어 '구스타프' 방어선 너머의 안치오에 상륙시킨다.
2. 그에 따라 독일군의 전력이 안지오로 분산된다.
3. 이로 인해 약화된 방어선을 미 제5군이 뚫어낸다.
4. 안치오에서 상륙부대와 미 제5군이 합류한다.
5. ???
6. PROFIT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병사들을 실어나르기 위한 상륙정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미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해 대부분의 함선이 서부전선으로 총 투입되고 난 상황이라 도저히 이탈리아 전선에 지원을 해줄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작전은 쓰레기통으로 던져지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서 한분의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바로 영국 수상인 윈저 패밀리의 보스 윈스턴 처칠이었다. 처칠은 에전에 자신이 말아먹은 전투를 만회하고 싶었는지 이상하리만큼 이 작전에 집착하며 루스벨트에게 간청해 LST상륙함을 얻어냈고 이에 힘입어 안치오 상륙은 1944년 1월 14일로 결정되었다.

여기서 상기해야 할 점은 안치오에 상륙하는 부대는 어디까지나 독일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조공(助攻)으로 주력은 미 제5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 제5군은 독일군이 분산된 사이 반드시 신속하게 방어선을 돌파해야만 했으며 조금이라도 늦으면 마땅한 중화기가 없는 상륙부대는 바다로 되쓸려갈 운명이었다. 결국 시간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연합군은 '라피도 강변의 학살'이라는 참극이 발생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2 라피도 강변의 학살

1944년 1월 22일 안치오 상륙작전이 시작됬다. 전의 실레노르 상륙때처럼 반격을 예상했으나 루프트바페의 기총소사 이외에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기습상륙은 성공했고 정찰대는 로마 외곽까지 진출했다. 진격로에 독일군이 없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루카스 소장은 진격하지 않고 상륙지점의 교두보를 안정시키고 군대가 충분히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날 늦은 저녁까지 미 1군 보병사단, 3 보병사단, 504 공수연대와 6615 레인저부대 그리고 영국 1보병사단의 36,000명의 병사와 3,200대의 차량이 상륙했다. 미군 13명이 전사 97명 부상등 피해가 없었던건 아니지만 200명의 독일군을 포로로 잡고 1보병사단은 내륙으로 3km를 진군, 3보병사단은 내륙으로 5km를 진군, 레인저는 안치오 항구를 점령했다.여기까진 순조롭게 풀리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이날 이탈리아 저항군이 고지대까지 연합군을 안내하겠다고 했지만 연합군은 거부했다. 꼬이는 소리가 들린다

독일군이 배수펌프 작동을 중지시켜 습지대가 바닷물에 침수되버렸고 미군은 분지에 고립됬다. 이후 고지대의 독일군은 4주동안이나 고립된 미군에게 포탄을 쏟아부었다. 예 그렇습니다 망했어요

이때 사용된 포는 뫼르저 18 210mm 중야포,600mm 자주박격포 칼등이 있다. 참고로 칼 자주박격포는 독일군에선 토르라고 부르는 대포이다.
분명 구스타프 라인 후방으로 상륙해서 당황한 독일군이 로마 북서쪽으로 후퇴하는게 루카스 장군의 임무였지만 장군은 전진은 커녕 모든 병력과 장비를 비좁은 교두보를 강화시키는데 투입했다. 이에 실망한 윈스턴 처칠은 "우리는 살쾡이를 해변에 풀어놓기를 원했는데, 낚시줄에 걸린 고래 한마리를 해변에 놓아둔 꼴이다" 라고 말했다.

약 한달간 치열했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는 전투를 치른 루카스 소장은 해임되었고 후임자로 루시안 트루스콧 장군이 임명되었다.
  1. 사실 방어선이 암반 속에 지어져서 컬러여도 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