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영화에 대해서는 서부전선(영화)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개요
한자: 西部戰線
영어: The Western Front
서부에서 형성된 전선. 말 그대로 서쪽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된 전선 전체를 지칭하기도 하며, 한 개의 전선을 위치에 따라 나누어서 서부전선, 중부전선, 동부전선 하는 식으로 구분할 때 상대적으로 서쪽에 위치한 전선의 일부를 말하기도 한다.
세계사에서 서부전선은 일반적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 당시 서유럽 지대에 형성된 전선을 일컫는다. 한국사에서는 일반적으로 6.25 전쟁 당시의 서부전선을 뜻한다.
2 제1차 세계대전
흔히 제1차 세계대전 하면 떠올리는 참호전의 참상이 벌어진 곳이 바로 이 서부전선이다.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가 상대적으로 후진국이었고, 전선의 길이가 엄청나게 긴 데다가 서로 대치하는 상황보다는 전선 돌파 및 회전이 더 자주 벌어졌기 때문에 참호전을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서부전선의 경우 영국과 프랑스는 둘 다 산업화가 잘 되어 있는 나라였고 슐리펜 계획마저 마른 전투에서 저지당한 후 양 측이 참호를 파고 기나긴 대치 상태에 돌입하면서 생지옥으로 변하게 된다.
이때 당시 지휘관들은 무기의 발달을 따라잡지 못하고 구시대적인 전략과 사고 방식에 얽메여 있어서 수많은 청년들을 기관총과 포탄의 세례 앞에 죽음으로 내몰았다. 또한 독일군에 비해 연합군의 참호가 상대적으로 저지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비만 오면 연합군의 참호는 물바다가 되었고 심지어 익사할 정도로 물이 차 오르기도 했다. 위생 상태야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독일군이라고 나을 것도 없어서, 독일군은 본토에서 멀리 진격 나와 있는 상태인 데다 경제 상황이 막장으로 치달아서 보급이 후달린 나머지 병사들이 그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연합군 참호를 털어와야 했을 정도.
결국 양 진영이 국력을 참호에 다 퍼붓는 이 막장스런 상황은 전차와 비행기 등의 새로운 무기와 전술의 등장, 그리고 미국의 참전으로 연합군이 우위에 서게 되면서 종결되었다.
후술하는 제2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전쟁의 종결은 서부전선에서 결정되었다. 다른 전선에서도 활발한 전투가 벌어졌고, 동부전선은 러시아 제국의 붕괴로 인해 전선 자체가 독일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으나, 결국 서부전선에서 독일의 최후 공세가 실패하면서 독일의 패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의외로 밀덕들조차 잘 모르고 간과하는 사실인데, 이 때 당시의 프랑스는 독소전쟁에서의 소련의 승리만큼이나 기적적인 승리를 일구어냈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 제국보다 공업력, 산업력, 인구, 병력, 동원능력 등 모든 면에서 딸렸고, 무기 수준도 프랑스가 독일에 비해 형편 없었다. 뭐... 쇼샤라든지... 쇼샤라든지.... 게다가 프랑스는 전쟁 초기, 국경 전투의 패배로 북부의 곡창 지대를 죄다 독일에게 빼앗긴 상황이 되었다. 즉, 독일과는 달리 본토가 전쟁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프랑스는 승리했다. 어떻게 보면, 어찌되었든 1941년 기준으로도 나치 독일보다 인구, 병력, 자원 등이 우월해서 이겼던 소련군보다도 오히려 모든 면에서 독일보다 딸린 상황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프랑스군이 더 기적적인 승리라고 볼 수도 있다.
2.1 주요 전투
3 제2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1940년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면서 서부전선은 한동안 영국 혼자 외로이 독일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형국으로 진행되었다. 영국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수행하면서 끝끝내 버텨내는 데 성공했고 일본 제국이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면서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이후 지중해 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추축국 세력을 분쇄한 뒤 소련이 서유럽에서의 제2전선을 형성할 것을 요구했다. 윈스턴 처칠은 이탈리아 전선을 대충 열고는 발을 빼려 했지만 천조국 황상의 암묵적 지지를 받은 강철의 대원수의 집요한 요구와 격노에 결국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행되어 프랑스가 해방되었다. 동부전선에서 모든 힘을 쏟아부은 독일은 마켓 가든 작전에서의 분투 등에도 불구하고 서부전선으로 진격하는 연합군을 막을 능력이 매우 부족했고 최후의 도박으로 아르덴 대공세를 시도했지만 망해 버렸다. 결국 독일은 항복했고 유럽의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마지막 남은 추축국인 일제는 광기 어린 그리고 부질없는 저항을 계속했지만 결국 일본 본토엔 버섯 구름이 피어 올랐고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도 막을 내리게 된다.
3.1 전선의 성격
이미 독소전쟁의 전세가 소련에게 기운 상황에서 서방 연합군의 서부전선 형성은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제3제국에게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다. 남아 있는 전선들을 모조리 정리해서 소련과 맞서도 버거울 판에 히틀러 본인이 그토록 우려하고 피하려 했던 양면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당시 독일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독일 국방군은 병력과 보급에서 언제나 열세에 몰렸으며, 비록 전투에서 분전하기는 했으나 전세를 뒤바꾸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근데 애초에 소련 싸대기를 갈기지 않았으면 되는 것 아니었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외에도 남프랑스의 독일군 섬멸을 위한 조공으로 1944년 8월 15일 용기병 작전이 실행되었다. 이 작전으로 툴롱이 해방되고 론 강을 따라 미 육군 제6군 사령관 제이콥 L. 디버스 중장 휘하의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프랑스 남부를 해방시켰다.
이들은 계속 북상하여, 9월 4일에는 리옹을 해방하고 9월 12일 마침내 노르망디의 상륙군과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후 프랑스에서의 독일군은 거의 축출되고 됭케르크, 라 로셸 등지에서 잔존 병력들이 1945년 5월 8일까지 저항한다.[1]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독일은 최후의 올인으로 아르덴 대공세라는 도박을 벌였지만 그마저도 실패했고,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많은 독일 병사들은 연합군에게 항복하는 쪽을 택했다.1945년 지크프리트 선이 뚫리고 독일 내 최고 산업 도시이던 루르 지대에서 '끝까지 싸우다 죽으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씹고 포위된 독일군 중 무려 30만 명이 무저항 항복하는 등 서부전선의 독일군의 사기는 이미 바닥을 쳤다.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비록 나치독일 자신들이 먼저 이념적으로 슬라브인 학살과 노예행, 약탈을 가장 중요한 전쟁 목표로 삼아 이를 이루기 위해 국가단위로의 계획적인 학살과 약탈을 시작했지만)' 소련군으로부터 자국민을 지키기 위해 죽어라 맞서 싸울 명분이 있었지만, 서방 연합군은 별다른 잔학 행위도 저지르지 않았고 포로들에 대한 대우도 소련에 비해 훨씬 관대했기 때문에 독일군의 저항 역시 미약한 편이었다. 물론 참혹하지 않은 전장이 어디 있었겠냐만, 사실 독소전쟁의 끔찍한 사상자와 비교하면 서부전선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다.(...) 그러니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사한 소련군만 해도 서부전선의 모든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의 수를 훨씬 상회한다. 일개 전투에서 하나의 전선보다 많은 사상자를 냈다. 역시 동부전선 클라스..
왠지 나무위키에서는 독소전쟁 문서가 튼실하게 들어찰 동안 서부전선 문서는 생성되지도 않았었다. 사실 2차 세계 대전의 서부전선은 프랑스의 항복 이후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다시 전선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영국과의 공중전이 대부분이였으므로 양측이 거의 모든 국력을 쏟아부은 1차 세계대전에 비하면 비중이 낮은 편이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존재감이 거의 없어서 그런 듯.
다만 전후 서방권에서 제작된 제2차 세계대전(대독전 한정) 영상물의 경우 서부전선을 다룬 매체의 비중이 동부전선과 대등하거나 더 많다. 특히 냉전시기에는 소련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에도 뭣했으니까.
지상전에서 제공권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처음 드러난 전쟁이 2차 대전이었고 그 중에서도 서부전선이 압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동부전선에선 지상군의 진격을 보조해 주는 공격기들과 이들을 상대하는 전투기들이 전술적인 성격을 많이 지녔던 반면 서부전선에선 전략적인 성격을 지녔다. 서방연합군의 전략 폭격기들은 독일의 산업 기반 시설을 파괴해 독일군의 물자를 서서히 거덜냈고 독일군은 연합군의 항공기 때문에 항상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이 밀리면 밀릴수록 이 문제는 심해졌다. 오죽하면 나치 독일의 군수장관인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 "맑은 날에 도로에 나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고 써 놓을 정도였다.
3.2 주요 전투
4 한국 전쟁
시기상 구분에 차이가 있다. 그리고 칼로 딱 끊는 것처럼 엄밀하게 서부전선 - 중부전선 - 동부전선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 겹치는 지역이 항상 있었으며, 전선간의 병력 이동 및 교대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따라서 분리된 전선이 아니라 전선의 일부 지역을 편의상 나눈 것이라고 보면 된다.
개전 직전 | 38선중 독립 제17연대 - 제1보병사단 - 제7보병사단이 담당하던 옹진 - 청단 - 연백 - 개성 - 고랑포 - 동두천 북방 - 포천 북방 지역을 말한다. 황해도 - 경기도에 걸친 구간으로 당시 길이로는 약 130km 정도였다. 그리고 제6보병사단이 담당한 강원도 영서 지역은 중부전선, 제8기계화보병사단이 담당한 동해안 지역은 동부전선이라고 구분한다. |
미군 참전 개시 | 경부선 철도를 기준으로 해서 서쪽 지역 전체와 철도 인근을 포함한 지역을 미군이 담당하면서 해당 지역을 서부전선으로 삼았다. |
대전 함락 이후 | 방어선 수립이 불가능한 전라도 지역은 대한민국 경찰 및 잔여 부대에게 방어를 담당하고, 경부선 이남의 소백산맥에서 남해안까지를 지칭한다. 전선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지만 서쪽인 것은 변함이 없다. |
낙동강 방어선 | 경상북도 왜관 지역의 경부선 철도를 기준으로 해서 남쪽의 낙동강 방어선 및 마산 서부의 산악 지대를 거쳐서 남해안까지의 방어선을 말한다. 주로 미군이 방어를 담당했다. |
인천상륙작전 성공 | 38선 이남 지역의 대부분을 급속탈환할 때는 전선의 구분이 명확치 않았고, 이후에는 아직 미수복한 개성 남쪽의 임진강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동쪽으로는 동두천 북부, 서쪽으로는 황해까지의 전선이다. |
북진 작전 | 황해도를 거쳐서 평안도 지역 전역을 서부전선으로 삼았다. 서부전선의 주력은 미8군. 동부전선은 따로 원산 상륙작전 이후 미10군단이 독자적으로 활동했으며, 낭림산맥의 험준함으로 인해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았다. |
1.4 후퇴 |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를 기준으로 해서 황해까지의 전선을 말한다. 중부전선과 어느 정도 겹친다. |
서울 재탈환 후 교착 상태 | 황해에서 임진강을 거쳐 철원 근방까지를 잡는다. 물론 중부전선과 어느 정도 겹친다. |
휴전 이후 2016년 현재까지 | 서해 5도에서 철원 근방의 경기도 - 강원도 경계선까지의 휴전선을 말한다. |
5 참고
- ↑ 코브라 작전 이후 미군의 진격 과정에서 남겨진 수만 명의 독일군들로 대개 프랑스 연안의 요새화된 항구 도시에 고립되었다. 몇몇 항구 도시(Ex: 브레스트)는 미군이 무력으로 탈취했으나 사상자나 소요 시간 등의 문제로 추가 작전을 펼치긴 힘들었다. 프랑스가 해방되고 연합군의 진격이 독일 본토로 초점을 맞춘 상태에서 고립된 독일군은 연합군과 암묵적인 휴전 협정을 맺어 식량을 공급받고 포로 교환을 하는 등 항복하거나 무기를 버리진 않았으나 그들이 고립된 그 지역 내에서 사실상의 포로 수용소 신세로 지내다 독일이 항복하면서 정식으로 항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