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해밀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앤드루 애덤스존 애덤스새뮤얼 애덤스토머스 애덤스
존 앨솝에이브러햄 볼드윈존 배니스터조사이아 바틀렛
리처드 바셋건닝 베드퍼드 주니어데이빗 브렐리에드워드 비들
존 블레어리처드 블랜드윌리엄 블라운트사이먼 보름
카터 브랙스턴제이콥 브룸피어스 버틀러캐럴턴의 찰스 캐럴
대니얼 캐럴리처드 캐스웰새뮤얼 체이스에이브러햄 클라크
윌리엄 클링건조지 클라이머존 콜린스슈테판 크레인
토머스 쿠싱프랜시스 대나조나단 데이턴사일러스 딘
존 드 하트존 디킨슨윌리엄 헨리 드레이턴제임스 두에인
윌리엄 듀얼엘리퍼릿 다이윌리엄 엘러리윌리엄 퓨
토머스 피츠시먼스윌리엄 플로이드나다니엘 폴섬벤저민 프랭클린
크리스토퍼 개즈던조셉 갤러웨이엘브리지 게리니콜라스 길먼
나다니엘 고램버튼 그윈넷리먼 홀알렉산더 해밀턴
존 핸콕존 핸슨코르넬리우스 하니트벤저민 해리슨
존 하트존 하비패트릭 헨리조셉 휴이스
토머스 헤이워드 주니어새뮤얼 홀텐윌리엄 후퍼프랜시스 홉킨슨
슈테판 홉킨즈티투스 호스머찰스 험프리스새뮤얼 헌팅턴
리처드 허슨제러드 잉거솔존 제이토머스 제퍼슨
토머스 존슨윌리엄 새뮤얼 존슨루퍼스 킹제임스 킨제이
존 랭던에드워드 랭워시헨리 로렌스프랜시스 라이트풋 리
리처드 헨리 리프랜시스 루이스필립 리빙스턴윌리엄 리빙스턴
제임스 러벌아이작 로우토머스 린치헨리 머천트
제임스 매디슨존 매튜스제임스 매켄리토머스 매킨
아서 미들턴헨리 미들턴토머스 미플린거버니어 모리스
루이스 모리스로버트 모리스존 모턴토머스 넬슨 주니어
윌리엄 파카로버트 트리트 페인윌리엄 패터슨에드먼드 펜들턴
존 펜찰스 코트워스 핑크니찰스 핑크니페이튼 랜돌프
조지 레드조셉 리드대니얼 로베르도시저 로드니
조지 로스벤저민 러시에드워드 러틀리지존 러틀리지
나다니엘 스커더로저 셔먼제임스 스미스조너선 베이야드 스미스
리처드 스미스리처드 돕스 스페이트성 토머스 제니퍼의 대니얼리처드 스톡턴
토머스 스톤존 설리번조지 테일러에드워드 텔페어
매튜 손턴매튜 틸먼니콜라스 반 다이크조지 월턴
존 월턴새뮤얼 워드조지 워싱턴존 웬트워스 주니어
윌리엄 휘플존 윌리엄스윌리엄 윌리엄스휴 윌리엄슨
제임스 윌슨헨리 위스너존 위더스푼올리버 월코트
조지 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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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How does a bastard, orphan, son of a whore and a

Scotsman, dropped in the middle of a forgotten
Spot in the Caribbean by providence, impoverished, in squalor
Grow up to be a hero and a scholar?


어떻게 사생아에, 고아에, 창녀와 스코틀랜드 놈 사이에서 태어나

카리브해 한가운데 잊혀진 섬에 떨어져
신에게도 버림받아 빈곤과 비참함 속에 자란 아이가
영웅이자 위인으로 자랄 수 있었을까?

- 뮤지컬 해밀턴의 오프닝 넘버 中

A national debt, if it is not excessive, will be to us a national blessing

국가 부채란 너무 많지만 많다면 국가적인 은총이다

- 알렉산더 해밀턴

Alexander Hamilton

1755년(혹은 1757년)[1] 1월 11일 ~ 1804년 7월 12일

초대 美 연방정부 재무장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명. 법률가이며, 역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재무부 장관이자 미국의 경제체계를 확립하고 강력한 중앙정부를 구상한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2 생애

카리브 해의 영국 식민지 서인도 제도 네비스 섬 찰스타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어머니도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나 불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신문에 쓴 시를 통해 비상한 머리를 가진 것이 눈에 띄어 지역 주민들이 힘을 보태 미 대륙으로 유학을 떠나 엘리자베스 타운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혁명 직전 격동기의 사회를 접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 13식민지와 본토 영국정부와의 대립이 거세지자, 해밀턴은 독립파에 가담했고 미국 독립전쟁기에는 조지 워싱턴의 부관이 되었으며 독립군 내의 알력다툼 속에서도 버텨내서[2] 요크타운 전투에도 참가하는 등 공을 세우며 입지를 쌓아갔다.

독립 이후에는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지가 미국 내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전쟁이나 차후 영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과 싸워야 할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을 인식한 이들도 있는 반면 영국의 억압을 기억하라며 중앙정부의 권한을 축소를 요구하며 각 주의 강력하 자율권을 요구하는 등 수많은 의견들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1787년에 결국 어떤 정부를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는 제헌 협의회가 열렸는데 해밀턴은 종신 대통령이 주지사까지 임명할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정부안을 구상하였다.

이후 구체적인 헌법 초안이 완성되고 각 주의 비준만이 남아 있었으나 새로운 헌법은 강력한 중앙정부가 주와 인민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며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알렉산더 해밀턴과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3]는 후대에 페더럴리스트 페이퍼라고 불리는 에세이[4]를 신문에 기고하면서 연방 헌법 비준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연방 헌법은 비준이 된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조지 워싱턴의 요청으로 초대 재무장관이 돠어 미국 재정문제 해결과 정부 체계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나, 재임 중 미국 역사상 최초의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고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재무장관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2.1 적이 많은 사나이

해밀턴은 더러운 성격문제와 이념문제로 인해 정적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에런 버[5]와의 관계는 해밀턴의 장인의 지역구에서 출마해 이기면서 틀어지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결국 3대 대통령 선거에서 해밀턴이 버를 대통령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성향이 정 반대였던 제퍼슨을 지지하면서 극으로 치달았고[6] 이후로도 해밀턴이 공개적으로든 비공개적으로든 버의 치부를 비난하는 글들이 기사화하고 버를 향한 정치적 공작을 펼친다는 의혹까지 나오면서 결국 분노한 버가 해밀턴에게 결투를 신청하면서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초유의 결투가 벌어졌고 해밀턴은 버의 총을 맞아 쓰러졌다. 그가 총에 맞아 죽을 당시의 나이는 기껏해야 쉰을 바라보던 정도였다.

성격적으로도 사교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인물이었고 강력한 중앙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부의 권력보다는 주와 인민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중시하던 제퍼슨[7]을 비롯한 반연방주의자들과는 사이가 당연히 안 좋았고 같은 연방주의자였던 존 애덤스도 해밀턴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예 결투까지 벌인 에런 버와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 사교성이 안 좋다고 평가받은 인물들은 많았지만 해밀턴은 당대 거물급 인사들에게 유독 비난괴 비판,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오죽하면 '해외에서 태어난 이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는 조항이 해밀턴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

3 업적

해밀턴은 남부의 입김이 닿는 워싱턴 DC를 수도를 하는 조건으로 중앙은행의 설립과 중앙정부가 진 빚을 각 주가 균등하게 갚게 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펼쳐 미국의 산업을 발전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기반을 닦았다. 이러한 조치는 반연방주의자들에게 소수 부자들과 공업 기반의 북부에게만 유리한 정책이라는 비난을 샀고 세수 확보를 위해 연방정부가 위스키에 세금을 매기자 분노한 농민들의 반발로 위스키 반란까지 일어났다. 홍차에 세금 내는 게 싫어서 독립했는데 이제 와서 위스키에 세금을 내라니 이런 도둑놈들 보소.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해밀턴은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였고 미국의 경제기반을 닦았다. 지금도 미국의 경제사를 다룰 때 해밀턴의 정책은 반드시 언급이 될 정도.

한편 중상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상선들을 보호하기 위한 미 해군 창설을 지지했는데 미영전쟁과 남북전쟁등을 거치며 성장한 미 해군은 전 세계를 주름잡는 강력한 해군으로 거듭난다.

정치사적으로도 해밀턴이 기고한 에세이들이나 그 외에도 저술한 문서들은 당대 건국의 아버지들의 사상을 연구하는 주요 자료로 쓰이며 현대에도 헌법 해석 이론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가 구상했던 강력한 중앙정부에 대한 이론은 차후 미 행정부 체계를 만들 때 반영이 되었다. 특히 미국이 주들의 연합체가 아닌 연방정부를 구성하게 된 것은 해밀턴 본인이 강력한 중앙정부에 대한 구상을 하고 이를 지지하는 이들을 모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해밀턴을 인격적으로는 싫어했어도 연방주의안을 지지한 인사들이 있었던 것[8]과 해밀턴의 선언만으로도 연방주의자들이 버가 아닌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지지한 점 등 그가 정치적으로나 학술적으로나 굉장한 능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4 사상

비록 독립전쟁에서는 적으로 싸우기는 했으나 해밀턴은 강력한 영국의 국력을 동경했고 그 비결을 강력한 중앙정부의 존재와 귀족과 엘리트로 통치되는 정치체제에 있다고 보았다. 해밀턴은 대중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며 교육받은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통치되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 주장은 대중에게 권력을 주어야 한다는 파와 각 주의 자율성을 중시하던 파에게 반발을 샀고 결국 타협왕 제임스 매디슨의 조정에 의해 지금의 삼권 분립 체계가 확립된다.

이러한 사상적 차이는 외교 문제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 돌입하자 해밀턴을 비롯한 연방파는 자코뱅당의 악명으로 프랑스 혁명을 폭도들의 반란으로 본 것과 영국과의 관계개선을 중시한 반면 제퍼슨을 비롯한 반연방파는 혁명을 미국을 이은 대중민주주의 정권의 탄생으로 봤고 과거 독립운동에 도움을 받은 과거재조지은 근데 니들 도운 정권은 혁명이 타도한 왕정인데?를 잊으면 안된다는 이유로 프랑스를 지지했다. 비록 조지 워싱턴이 중립주의 정책을 펼치기는 했어도 정파간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고 훗날 미영전쟁의 불씨가 된다.

5 기타

10달러 지폐에도 그려진 초상화에도 표현되었듯이 당대에서도 인물 하나는 잘 빠졌다고 평가받았다고 한다.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는 정치적 업적에 비하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9] 심지어 미국 내에서도 대통령까지 한 정적들이 있어서 '10달러에 나온 사람', '결투하다 죽은 사람'(...)으로만 알던 사람이 많을 정도로 정적들에 비하면 유명한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활약한 분야도 정치, 행정, 경제 관련 분야라서 그런지 과학 관련 교양서적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벤자민 프랭클린과는 인지도가 넘사벽으로 차이가 날 정도. 물론 다른 나라에서 해밀턴을 죽인 버의 인지도는 0에 가깝다.

그러던 중 2015년 그의 일대기를 조명한 해밀턴이라는 힙합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에 올라오며 전례없는 신드롬을 일으킨걸로 모자라, 해밀턴이라는 인물 자체의 재평가를 불러오며 해밀턴을 워싱턴이나 제퍼슨 급으로 널리 알려진 위인으로 만들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 여기보다 일대기 설명이 더 상세하다,

  1. 출생 신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어느 문서에는 1755년이라고 적혀 있고 어느 문서에는 1757년이라 적혀 있어서 정확한 탄생년도는 불명이다(...). 정황 증거는 1757년쪽이 더 많고 본인은 13식민지에 처음 상륙하고 작성한 서류에 1757년이라고 적었다.
  2. 워싱턴의 새 부관이었던 찰스 리가 워싱턴을 모함하는 사건이 벌어진 데다 해밀턴의 뛰어난 외국어 실력으로 친분을 쌓은 라파예트 후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3. 나중에 최초의 연방대법원장이 된다.
  4. 단순히 헌법을 옹호한 것 뿐만이 아니라 이 헌법을 어떻게 적용하고 이렇게 탄생한 국가의 권한은 어떻게 해야 하고 등의 이론적인 내용도 전부 설명하는 글이다.
  5. 부통령 자리에 오르고 의회에서의 탄핵 절차를 고안하는 등 당대 정계에서 거물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밀턴은 그나마 지폐에라도 나오기라도 해서 이름이라도 들어보기라도 하지 이 인물은 미국 밖에서는 인지도가 거의 없다.
  6. 버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연방파든 반 연방파든 가리지 않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철새로도 볼 수 있는 행적을 벌였는데 이것이 해밀턴이 버를 공격하는 빌미로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7. 이념적으로나 세력싸움에서는 가장 정 반대의 극단에 있던 존재였다. 서로의 능력도 상당히 비등비등했다는 평가도 있다.
  8. 당대에는 연방주의자들을 해밀턴의 이름을 따 해밀터니안, 반연방주의자들을 정적인 제퍼슨의 이름을 딴 제퍼스니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제퍼슨이 후에 대통령이 될 정도로 거물 정치인이었을 정도였는데도 그와 맞설 수 있을 정도로 해밀턴이 얼마나 당시 정계에서 중요한 인사로 취급되었는지 알 수 있다.
  9. 심지어 이 위키에서도 애런 버와의 결투나 그의 일생을 다룬 뮤지컬 해밀턴 항목이 훨씬 먼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