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함브라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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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에스파냐어 : Alhambra[2]
아랍어 : قصر الحمراء (Qaṣr al-Ḥamrā)
영어 : Alhambra Palace

개요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했던 무어인들이 그라나다에 지은 궁전.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극도로 세련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곳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건축이 절충된 예이기도 하다.

크게 4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처음 지어진 건축물이자 가장 전망 좋은 요새인 알 카사바, 아라베스크 양식의 꽃인 나사리 궁전, 아름다운 정원과 분수의 헤네랄리페, 스페인 르네상스 시기의 건물인 카를로스 5세 궁전과 산타 마리아 성당과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다.

세계의 건축 장식을 연구했던 "Grammer of Ornament"의 저자 오웬 존스는 알함브라, 무어인의 장식을 최상의 것으로 꼽기도 했다. 아라베스크 무늬와 종유석 모양의 세밀하고 방대한 장식을 가진 아치와 기둥, , 각종 수로와 수변, 담담한 벽의 대비 등을 볼 수 있다.

이미 로마시대에 조그만 요새가 있었고, 9세기에 그라나다의 에미르가 성벽과 토대를 올렸다. 1238년에 그라나다의 술탄 유세프 1세가 수도를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화려한 궁궐로 변모시켰다. 사실, 알함브라 궁전이 화려하게 장식된 시기는 그라나다를 비롯한 이슬람 왕국들의 황혼기였다. 레콩키스타로 인해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어진 것.

이사벨라 1세 가 인근에 신도시이자 그라나다 포위망의 완성인 산타페를 건설하고 결국 항복을 받아낸 뒤에, 이교도 상징이 빼곡한 공간이었음에도, 스페인 국왕이나 왕족들, 귀족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대부분을 그냥 둔 채로 그대로 궁궐로 썼다. 반대로 여길 빼앗기고 북아프리카로 가야했던 그라나다의 마지막 에미르[3] 무함마드 12세는(보압딜) '영토를 빼앗기는거보다 이 궁전을 떠나는게 슬프구나.' 라며 떠났다고 한다. 패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보고 그의 어머니도 한심하다는 듯이 "남자처럼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여자처럼 울기라도 해야지" 라며 툭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결국 여길 잊지못하던 보압딜은 북아프리카에 알함브라보단 못해도 대충 비슷한 궁궐을 만들어 거기서 살다가 죽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이교도 상징을 지우려는 카를 5세[4] 주도하에 궁궐 일부분인 모스크가 성당이 되고, 성당에 딸린 수도원이 지어졌고, 궁궐의 일부도 기독교식으로 새롭게 만들어졌다. 그 와중에 이전에 있던 아름다운 여러 건물 및 장식이 부숴졌다. 카를 5세는 막상 그렇게 만들어진 건물이 기존의 이슬람 양식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매우 이질적이고 흉물이 되어버렸기에 이렇게 탄식했다.

이럴 수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을 지으려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것을 부수어 버렸구나!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다니!

그리고 궁궐에 대하여 수리가 아닌 한 건드리는 건 일체 허락하지 않겠다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훼손되고 마는데 계속적인 개수공사도 있었지만, 이곳도 이베리아 반도 전쟁을 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 말미인 1812년에 프랑스의 세바스티앵에 의해서 탑들이 철거되어 피해를 입고, 1821년에는 지진피해까지 입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전에는 스페인 왕실에서 잊고 찾지 않아 퇴락하고, 집시들이 무단거주를 하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

이후 미국인 작가이자 외교관인 워싱턴 어빙에 의해 1829년 알함브라의 이야기(Tales of the Alhambra)가 집필되어 출판되면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5] 그리고 1828년부터 호세 콘트레라스에 의해 보수가 시작되었다. 1830년에 페르난도 7세의 기부로 지속적으로 보수공사를 할 수 있었으며, 1847년 호세가 사망했으나 그 아들이 물려받아 계속 보수하였다. 1870년에는 국보로 지정하였고 이후 1984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카를 5세가 만든 카를로스 5세 궁전은 오늘날에는 다른 궁전에 하중을 떠넘겨 골칫거리가 되고 있으나 18세기부터 알함브라 궁전에서 진행되는 모든 문화행사의 중심지가 되어 근대문화행사를 이 곳에서만 치뤄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유명한 관광명소답게 인원 제한을 걸고 방문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기대거나 만지는 것도 내부에서 엄격하게 금지할 정도로 훼손에 민감하다. 바코드가 찍힌 입장표를 지니고 다녀야 구역 별로 이동이 가능하니 나가기 전까지 소중히 지참할 것.

현재는 천장과 기둥 사이 레이스를 묘사한 부분들을 복원하기 위해서 기둥과 건물 사이에 쇠파이프로 지탱해놓고 있다. 지금은 세월의 풍파로 색이 바랬으나 원래대로 복원하면 알록달록 색이 입혀져서 아름다울 거라고.

주변 학교에서 소풍 장소로 선정을 자주 하는 듯. 어린 학생들이 관광객들 사이로 떼지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시 세계 어디나 유적지가 가까운 학교의 선택이란 다 같은 모양이다.

작곡가이며 기타 연주가인 프란시스코 타레가가 이 궁전을 여행한 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음악을 작곡하였다.

KOF 98의 스페인 스테이지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베르세르크에서 세르피코가츠가 싸울때 나오던 건물이 바로 이 곳을 모티브로 했다. 이슬람풍 기둥이 세워진 곳에서 세르피코가 오래전 이교도가 살던 성을 차지하여 그 건물을 그대로 썼다는 말을 하는데 가츠가 이 기둥들을 닥치는 대로 베며 둘이 신나게 싸웠다...[6]
  1. 사자의 중정, 기둥 사이 폭포수처럼 묘사된 것은 레이스다.
  2. 스페인어에서 H는 묵음이므로, 알람브라라고 읽는 것이 맞다.
  3. 기록상 에미르로 칭하고 있다.
  4. 카를 5세의 가톨릭 신앙은 매우 충실하였고, 그런 성향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영향을 주었다. 알함브라 궁전 파괴도 그런 신앙심의 발로로 모스크를 파괴하면서 곁다리로 벌린 일이다.
  5. 그는 알함브라에 거주하면서 책을 집필하였다. 궁전 내에 그를 기념하는 명패도 새겨 놓았다.
  6. 가츠와 세르피코가 싸우던 곳의 모티브는 알함브라 궁전이 아니라 코르도바의 메스키타라는 곳이다. 이곳은 원래 이슬람 모스크였는데 레콩키스타로 정복된 뒤 성당으로 개조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