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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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레옹 전쟁의 여섯번째 국면. 보통 영국이나 프랑스는 "반도전쟁"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고, 에스파냐에서는 "에스파냐 독립전쟁"이라 칭한다. 또한 현재까지 세계 여러 분쟁 지역에서 쓰이는 게릴라의 시초와 어원이 된 전쟁이다.
2 진행
1806년,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이 조치에 중립을 표방하며 참가를 거부한 두 나라가 스웨덴과 포르투갈이었는데 1807년의 틸지트 조약 이후 스웨덴은 나폴레옹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면서 나폴레옹은 이제 눈을 이베리아 반도로 돌리게 된다.
1807년 11월,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에 대륙봉쇄령 참가를 요구했지만 포르투갈은 여기에 난색을 표하며 거절했고 나폴레옹은 이를 빌미로 포르투갈 침공을 결정한다.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고 있던 에스파냐와 연합하여 포르투갈을 공격하기로 하고 자신의 휘하인 앙도슈 쥐노가 지휘하는 부대를 에스파냐로 파병했다.
포르투갈은 영국의 포르투갈 진공만을 고려해 군대가 항구쪽에 있었던 탓에 나폴레옹군은 손쉽게 별다른 저항없이 12월 1일, 리스본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왕비와 섭정 쥬앙 6세를 비롯한 요인들이 브라질로 도망치는 바람에(…) 포르투갈은 해외식민지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나폴레옹에겐 타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어찌됐든 포르투갈 본국과 영국간 무역을 차단하는 것에는 성공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을 점령한 뒤 나폴레옹은 포르투갈 점령을 강화한다는 구실로 에스파냐에 본격적으로 프랑스군을 파병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1808년 2월, 바스크 지역과 바르셀로나가 프랑스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카를로스 4세와 마누엘 데 고도이의 학정에 지칠대로 지쳤던 에스파냐 민중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프랑스의 자유주의 정신을 전파하러 온 해방군으로 받아들이고 대환영을 하였으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에스파냐 왕위에 야심을 품고 있었던 나폴레옹의 원쑤원수 조아생 뮈라가 본격적으로 행동에 들어갔던 것.
프랑스군이 에스파냐에 진주하자 에스파냐 민중들은 왕실 근위대와 함께 혁명[1]을 일으켜 카를로스 4세를 쫓아내버리고, 덕망이 높았던 페르난도 왕세자를 페르난도 7세로 세워 새로운 정부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 때 뮈라가 갑자기 끼어들어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한꺼번에 망명(...)시켜버리고 자신이 왕 노릇을 하려 들었으며, 이 순간을 기점으로 프랑스군에 대한 에스파냐 민중의 호의는 적의로 일변하게 된다. 이에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대규모 민중 봉기가 벌어지게 되나, 이 봉기는 뮈라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만다[2]
뮈라에 의해 항쟁은 간단히 진압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5월에서 6월에 걸쳐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이에 나폴레옹은 에스파냐의 민심 이반을 우려, 뮈라 대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호세 1세로 즉위시키고, 대신 뮈라를 나폴리 왕에 봉해준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들이 지지하던 페르난도 7세는 아웃 오브 안중이라는 사실에 분노한 에스파냐인들은 게릴라 전법으로 나폴레옹군에게 맞섰고 나폴레옹은 에스파냐의 게릴라 전법에 지친 나머지 "이베리아가 내 위장을 더 쓰리게 한다"라고 할 정도였다(…). 몇 주 만에 곳곳에서 대규모 군벌이 등장했으며 프랑스군은 기본적으로 보급을 현지조달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베리아 전역의 프랑스에 대한 반감은 더더욱 고조되었다.
이런 가운데 포르투갈에서도 나폴레옹에 맞선 반란이 일어났고 1808년 7월 19일, 안달루시아의 바일렌에서 듀퐁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에스파냐군에게 격파당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은 점점 불리한 형국에 빠져들었다. 결국 에스파냐군은 8월 마드리드에 입성해 죠세프 보나파르트를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조세프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에게 '이베리아를 점령하려면 20만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고 내 권위를 세우려고 하면 단두대만 1만 개 쯤 필요할걸? 넌 집집마다 요새화되고 사람들은 쉽게 단결하는 여기 상황을 잘 몰라. 우리가 정복자 행세하는 한 여긴 꿈도 희망도 없음.'이라는 요지의 편지를 보냈을 정도.
특히나 나폴레옹에게 타격이었던 것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서 일어난 반나폴레옹 반란이 귀족이나 군인들이 주도했던게 아니라 일반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점이었다. 영국은 이에 주목했고 나폴레옹을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진 영국은 포르투갈에 상륙해 나폴레옹을 격파하려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이 시점에서 이베리아 프랑스군의 주력이 에브로 강 건너편으로 퇴각함에 따라 쥐노는 포르투갈에 고립되어 있었다.
1808년 8월,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군은 포르투갈에 상륙해 8월 17일, 로리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이후 8월 21일에는 영국, 포르투갈 연합군이 비메이로에서 다시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연전연승하던 나폴레옹군의 기세가 꺾이자 영국은 환호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잘 지휘하던 웰링턴이 너무 젊다는 이유로 포르투갈에 보내는 추가 병력을 잘 지휘할 수 없겠다고 판단해 해리 밸러드가 원정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는 포르투갈에서 불리해지게 되어 신트라에서 협정을 맺고 포르투갈에서 프랑스군은 철수한다. 그러나 앙도슈 쥐노가 고립되었던 데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프랑스군 전부와 무기, 전리품을 영국 선박으로 프랑스까지 안전하게 이송한다는 내용의 신트라 협정을 맺은 휴 달림플, 해리 버라드 등 장성 3명에 대한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아서 웰즐리는 이 협상과 무관하다고 판단되어 진상조사 대상에서 벗어났으나 귀국조치 되었고, 한동안 지휘관이 아니라 아일랜드 수상으로 있게 되었다. 이후로 포르투갈의 영국군 3만 명은 존 무어 경이 지휘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폴레옹은 직접 친정을 결심하게 된다. 무려 12만5천[3]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로 진군한 나폴레옹은 부르고스에서 영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부르고스 방면으로 진군중이던 존 무어 경의 영국군은 나폴레옹에게 밀려 결국 이듬해 1월 코루나에서 철수하게 된다. 이 때 존 무어 경이 전사하지만 영국군은 붕괴하지 않고 전력을 유지하면서 퇴각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친정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프랑스군은 그해 12월 마드리드를 탈환했고, 에스파냐 임시정부는 세비야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원수들에게 전쟁을 맡긴 뒤, 자신은 귀국했다. 그러나 존 무어 경의 군사행동은 스페인군에 집중되던 나폴레옹의 시선을 분산시켜 스페인군에게 회복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이후 아서 웰즐리의 작전에 영향을 준다.
1809년, 프랑스군은 포르투갈 재침공 작전을 감행했다. 일부는 포르투갈의 민병대에게 격파당하기도 했으나 3월 29일, 포르투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되려 프랑스군은 포르투갈 각처의 저항으로 포르투에 고립되는 형국이 돼버렸다. 그런 가운데 1809년 4월, 영국군의 웰링턴이 돌아와 포르투를 재탈환했다.
이후 웰링턴은 에스파냐로 진군해 죠세프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에스파냐 왕국군을 격파했다.하지만 에스파냐군과의 공조가 잘 진행되지 않았고[4] 앙드레 마세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포르투갈 재침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포르투갈의 방비를 위해 웰링턴은 결국 결단을 내렸다. 이른바 "토레스 베드라스 전선"을 구축해 나폴레옹군의 진군을 막은 것이다.
프랑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여러차례 포르투갈, 에스파냐, 영국군과 전투를 치뤘다. 하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오지는 못했고 전쟁은 갈수록 지리한 장기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이러면서 프랑스는 점점 병력과 물자가 부족해져갔다. 설상가상으로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길에 나서면서 그나마 부족한 병력을 차출당하기(…)까지 했다.
포르투갈을 굳게 지키고 있던 웰링턴은 1812년, 에스파냐로 진군하여 이듬해인 1813년 6월 21일, 비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프랑스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웰링턴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프랑스 본토까지 쳐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발목이 잡힌 나폴레옹은 이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3 여담
- 나폴레옹 전쟁을 다루는 게임 나폴레옹: 토탈 워에서는 아예 이 전역만 따로 빼서 DLC 캠페인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