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헬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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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탄력의 소유자

이름앙헬 페르난도 보시오 가르실란데스
(Ángel Fernando Bossio Garcilández)
생년월일1905년 5월 5일
사망년월일1978년 8월 31일
국적아르헨티나
출신지아베야네다
포지션골키퍼
신체조건176cm[1] / 75kg
등번호-[2]
소속팀타예레스(1924-1932)
CA 리버 플레이트(1932-1936)
타예레스(1937-1938)
국가대표21경기 / 0골(1927-1935)

1 생애

1.1 선수 생활

1.1.1 클럽

보시오가 처음으로 1군 무대에 데뷔한 시기는 1925년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타예레스는 그다지 전력이 강한 팀은 되지 못했다. 1925년의 세군다 디비지온 우승 이후 1930년의 5위가 최고 성적이었다. 그랬던 만큼 보시오의 존재감은 대단하였다. 일례로 초대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스쿼드를 보면 타예레스 소속의 선수는 오로지 보시오 혼자였다.

그는 5시즌 동안 리버 플레이트에서 활동한 것을 빼면 타예레스에서만 활약하였다. 그리고 우승컵은 리버 플레이트에서만 들어봤다. 그리고 타예레스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선수 생활 중 고질병이었던 왼쪽 무릎 부상으로 은퇴하였다.

1.1.2 국가대표

보시오는 1927년부터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데뷔 무대였던 코파 아메리카에서 4실점으로 뒷문을 걸어 잠가 우승에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의 올림픽. 아르헨티나는 페르난도 파테르노스테르, 라이문도 오르시, 도밍고 타라스코니[3] 등 정예멤버를 내보내 우승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결승전의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이자 라이벌 우루과이.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와 재경기까지 치르는 혈전 끝에 스카로네에게 결승골을 내주고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홈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아르헨티나의 골문을 지켰고 우승을 차지한 그는 역시 주전 골키퍼로 초대 월드컵에 나섰다. 하지만 그의 활약은 조별 예선까지였다. 4강 이후에는 후안 보타소가 골문을 지켰고,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는 다시 한 번 우루과이에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보시오는 이후에 친선 경기에서만 모습을 드러냈고 1935년에 국가대표팀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2 플레이 스타일&평가

유연한 플레이로 명성을 떨친 골키퍼로 la maravilla elástica[4]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점프력 등이 대단했던듯...

3 수상

3.1 클럽

3.2 국가대표

  1. 178cm라는 기록도 있다.
  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3. 타라스코니는 이 대회 득점왕이기도 했다.
  4. 직역으로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번역이 된다. 어순을 뒤집으면 기적의 탄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