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페르난도 파테르노스테르 (Fernando Paternoster) |
생년월일 | 1903년 5월 24일 |
사망년월일 | 1967년 6월 6일 |
국적 | 아르헨티나 |
출신지 | 페와호 |
포지션 | 레프트 풀백 |
신체조건 | 179cm / 70kg |
등번호 | -[2] |
소속팀 | CA 아틀란타(1921-1926) 라싱 클루브 데 아베야네다(1927-1932) CA 벨레스 사르스필드(임대)(1930-1931)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1936) |
국가대표 | 16경기 / 0골(1928-1930) |
감독 | 데포르티보 무니시팔(1937) 콜롬비아(1938) 아틀레티코 나시오날(1948-1951) 아틀레티코 나시오날(1954-1956) 에멜렉(1962-1966) |
1 생애
1.1 선수 생활
1.1.1 클럽
파테르노스테르는 1919년부터 아틀란타 클럽에서 뛰기 시작하였고, 1921년에 1군 무대에 데뷔하였다. 1927 시즌부터는 라싱 클루브에서 활약하였다. 그 중 1930년과 1931년에는 벨레스 사르스필드 팀에서 칠레와 미국에 투어를 돌기 위해 파테르노스테르의 임대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라싱 클루브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파테르노스테르는 1년 뒤 라싱 클루브를 떠났고 그대로 은퇴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1936년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 1경기를 더 뛰고 은퇴하였다.
1.1.2 국가대표
파테르노스테르는 1928년 올림픽에서 데뷔하였다. 결승전까지 모든 경기에 출전하면서 조국의 은메달 획득에 큰 기여를 하였다. 여기에서 큰 활약을 한 파테르노스테르는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와 초대 월드컵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월드컵에서는 라싱 클루브의 동료였던 호세 데야 토레와 주전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1.2 은퇴 이후
파테르노스테르는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등지에서 감독으로 큰 명성을 날렸다. 1937년 콜롬비아에 건너간 그는 새로 창립된 클럽 데포르티보 무니시팔[3]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콜롬비아 대표팀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이후에는 콜롬비아의 아틀레티코 나시오날과 에콰도르의 에멜렉에서 감독으로 활동하며 팀을 각 리그의 강팀으로 만들었다.
2 플레이 스타일&평가
선수로서는 다소 전성기가 짧았다. 하지만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축구계에서는 대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3 뒷이야기
- 파테르노스테르는 월드컵에서 득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페널티 키커로 나섰지만 그의 페널티 킥은 멕시코의 골키퍼 본피글리오에게 막히고 말았다.
- 아들인 펠릭스도 1960년대 아틀란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만큼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4 수상
4.1 국가대표
4.2 감독
- 카테고리아 콜롬비아 A 우승 1회: 1954
- 카테고리아 콜롬비아 A 준우승 1회: 1955
- 에콰도리안 세리에 A 우승 1회: 1965
- 에콰도리안 세리에 A 준우승 1회: 1962, 1966
- ↑ 귀족 집안 출신인 배경이 있다.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이 클럽은 CD 미요나리오스의 전신이다. 1940년대에 아돌포 페데르네라,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등 아르헨티나의 스타 선수들을 쓸어 모은 그 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