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田浅右衛門
일본 에도시대에 타메시기리(시험베기), 참수형 집행, 도검 감정등에 종사하였던 야마다(山田) 가문의 당주에게 전해지던 이름이다. 朝右衛門(똑같이 아사에몬으로 읽는다)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다. 목베기 아사에몬(首切り浅右衛門), 살인자 아사에몬(人斬り浅右衛門)으로도 불렸다.
1 기원
전국시대나 에도시대 초기에는 타니 모리요시(谷衛好), 모리토모(衛友) 부자나 모리토모의 제자 나카가와 시게요시(中川重良) 등이 타메시기리의 명인들로 알려져 있었다. 타메시기리을 전문으로 하는 것은 시게요시의 제자 야마노 나가히사(山野永久) 때 부터였고. 나가히사의 아들 칸쥬로 히사히데(勘十郎久英)는 1685년에 오타메시고요(御様御用)의 직함을 받고 정식으로 막부의 신하가 된다. 이후 야마다 가의 후계자의 기량이 미숙하였기 때문에 몇몇 제자들이 오타메시고요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야마다 아사에몬 사다타케(山田浅右衛門貞武)에 이르러서는 오타메시고요의 직함을 야마다 가문에서 상속하게 되었다.[1]
2 직업과 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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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물봉행(腰物奉行)[2] 밑에서 일하였으나, 공식적으로는 하타모토(旗本)[3]나 고케닌(御家人)[4]이 아닌 낭인이었다. 그 때문에 정식으로 급료를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막부로부터 헌금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으며, 겸업인 참수형 집행으로도 돈을 벌었다. 또한 참수형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사형수의 목을 베는 일은 고난이도의 기술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전문가인 야마다 아사에몬에게 일이 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주 수입원은 그게 아니었다.
야마다 아사에몬의 주 수입원은 무려 시체였다! 사형을 집행하고 일반적으로는 시신을 사형수 가족에게 찾아가도록 하지만 간혹 죄질이 매우 나쁘거나[5] 가족이 인수를 거부하거나 연고자가 없는 사형수의 시체를 넘겨받는 일이 있었는데, 이 시체를 가지고 타메시기리를 했던 것. 당시 타메시기리의 용도로는 사람의 시체가 최고로 평가받았는데, 사형집행인의 일을 하면서 안정적으로 시체를 공급받게 되고 이 시체로 타메시기리를 하면서 일본도를 감정하여 돈을 벌었다. 또한 많은 사무라이들이 직접 시체로 타메시기리를 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많은 의뢰가 들어왔다. 아무리 사형 집행인이라지만 사형수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시체 한 구를 가지고 여러번 타메시기리를 했다고 한다. 가끔은 직접 타메시기리를 하고 싶어하는 무사들에게 시체를 팔기도 했다. 진짜 시체팔이
5대 야마다 아사에몬인 요시무츠(吉睦)는 그동안의 타메시기리 경력을 토대로 잘 드는 일본도(와자모노)의 등급을 나눈 <회보검척>(懐宝剣尺)을 저술하여 수익을 얻기도 했다. 다만, 신뢰성이 떨어질 수도 있는게 뇌물을 받고 몇몇 일본도의 등급을 올려주기도 했다고.
부업으로 약장사도 했다. 그가 파는 약은 야마다 환(山田丸), 아사에몬 환(浅右衛門丸) 등의 이름이 붙은 결핵 특효약이었다고 하는데 원료가 무려 사형수의 간, 뇌, 쓸개, 담즙이었다고 한다. 흠좀무. 그리고 유녀들에게 시체의 새끼손가락을 팔기도 했다. 당시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할 때 새끼손가락을 잘라서 건내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때 가짜 새끼손가락으로 많이 쓰였다고.
이러저러한 수입을 통해 야마다 아사에몬은 3~4만석 급의 다이묘와 필적하는 부를 쌓아올렸다고 한다.
3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
그러나 야마다 아사에몬은 일반적으로 쉽게 생각되는 망나니는 아니었다. 자신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은 자들을 위령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6] 그리고 사형수의 사세구를 이해하기 위해 3대 야마다 아사에몬부터는 하이쿠도 공부하여 하이고(俳号, 하이쿠 시인의 필명)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걸 가지고 순수하게 선의로 사형수를 배려했다고 보긴 힘들고 사형수를 직접 참하는데다 위에 나오듯 시신을 가지고 시험베기 부터 시신을 이용해서 약까지 만드는 등의 소위 죽은사람 가지고 몹쓸짓을 했으니 귀신, 요괴, 원혼 등의 미신이 당연시 되던 당시 시대를 생각해 보면 후환이 걱정되지 않으면 이상할 수 밖에. 당연히 자신과 가문의 안녕을 위해서도 위령을 당연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국가의 사형 집행인들 역시 이러한 사형수들의 원혼의 가능성이나 사형집행인으로서의 괴로움을 줄이려는 노력의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4 메이지 시대 이후
마지막 야마다 아사에몬 (9대) 요시스케(吉亮)의 사진. 메이지 36년으로 추정. 출처는 위키미디어 커먼즈
막부 해체 후, 각각 8대 와 9대 야마다 아사에몬인 요시토요(吉豊), 요시스케(吉亮) 형제는 고토부수인괘참역(東京府囚獄掛斬役)에 임명되어 참수형을 계속 담당하였다. 메이지 3년(1870년)에는 시체를 사용한 타메시기리가 금지되어 주요한 수입을 잃었다. 참수형을 교수형으로 대체하는 법이 1880년 제정되어 1882년 시행되자 야마다 아사에몬의 역할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9대 야마다 아사에몬인 요시스케는 1881년부터 이치가야 감옥 서기로 일하다 이듬해 퇴직하였다.
1873년에는 야마다 아사에몬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코류 카게미츠가 덴노가에 헌상되었고, 메이지 덴노의 패도로 사용된다.
5 대중매체에서 야마다 아사에몬
70년대에 일본에서 연재된 코이케 카즈오의 만화 고독한 참수자(首斬り朝)가 이 야마다 아사에몬들의 일화와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참수집행인의 삶을 그려냈다.
무한의 주인에서는 야마다 아사에몬 요시히로가 등장하는데, 동명의 야마다 아사에몬인 4대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은혼에 등장하는 이케다 야에몬 및 이케다 아사에몬 역시 야마다 아사에몬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 친자식이 사형집행인 일을 물려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대개는 자손이 아닌 제자들 가운데 뛰어난 자가 야마다 아사에몬의 이름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다.
- ↑ 코시모노부교. 쇼군의 도검, 장신구, 헌상 및 하사되는 도검류를 관리하던 막부의 직책
- ↑ 고쿠다카(石高, 영지의 한 해 쌀의 생산량)가 1만석 미만이고 주군을 직접 알현할 자격이 되는 무사
- ↑ 시대별로 의미가 달라지나, 에도시대에는 하타모토보다 격이 낮은 무사를 가리킨다. 주군을 직접 알현할 자격이 없었다
- ↑ 에도시대에 서민에게 가해지던 처형법은 6종류가 있었고, 이 중 3종이 참수형이었다. 이 중 가장 가벼운 형인 게슈닌(下手人, げしゅにん)은 참수형만으로 끝났지만 시자이(死罪, しざい)와 고쿠몬(獄門, ごくもん)은 반드시 남은 몸체를 타메시기리에 쓰게 했고, 특히 고쿠몬은 여기에 더해 참수된 머리를 효수하는 것까지 포함되었다.
- ↑ 현재 도쿄 이케부쿠로에 있는 쇼운지(祥雲寺)에는 6대 야마다 아사에몬이 세운 위령탑이 남아있다. 후일 마지막 야마다 아사에몬의 자손들과 연구자들이 세운 야마다 아사에몬의 비(碑)도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