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미호 실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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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미해결 실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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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6월 4일 오전 10시경, 20살의 야마모토 미호(山本 美保)씨가 야마나시현 고후시 나가마츠데라쵸의 자택에서 "도서관에 갈게"라는 말을 남기고 행방불명되었다.
미호씨의 가정은 경찰관인 부친과 자영업자인 모친, 장남 카즈오씨, 쌍둥이인 미호&미사씨 5인 가족으로, 대학 2학년인 카즈오씨가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하여 가족 전체가 슬픔에 빠져있던 중에 미호씨마저 갑자기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사건 이틀 뒤인 6월 6일 미호씨가 가져간 미니 바이크가 고후역 앞에 놓여져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4일 뒤인 8일에는 니가타현 카시와자키(柏崎)시내의 아라하마 해안가에서 실종자의 손가방이 발견되었는데 가방 안에선 면허증과 지갑이 들어있었고 도난품은 없었다.

1 이어지는 무언 전화

실종 반년이 지난 무렵부터 4년간 무언 전화가 이어졌으며 거의 대부분의 전화는 수초만에 끊어졌으나 실종 후 3년 4개월에서 6개월 사이에 걸려온 2번의 전화는 10~15분 정도 이어졌고 전화를 건 상대방은 가만히 듣고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얼마 후 10월 18일경의 전화에서는 흐느껴 우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사: "미호지?잘 있어?"

라는 동생의 물음에

"...잘 있어(・・・げんき・・・)"라고 대답.
모친: "잘 있니? 잘 있어?어서 돌아와"

"......"(TV소리만이 커진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전화가 끊겼고, 재차 전화가 걸려와 미사씨가 카시와자키에 간 것을 얘기했으나 끊겼다.
다시 또 전화가 걸려와 미사가 "빨리 돌아와"라고 얘기하니 끊겼다. 10분정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2 납북의 가능성

70년대 중후반부터 80년대 초반 사이에 일본에선 이유를 알 수 없는 실종자들이 소리소문없이 생겨났지만, 이것이 북한 공작원에 의한 납북이라는 것이 알려진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방북으로 드러난 북일 정상 회담에서였다. 미호씨의 실종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도 일본에선 납치라는 인식은 없었다. 미호씨 가족들은 마음 가는 곳이 없는 채로 18년간 미호씨의 귀가만을 하염없이 기다려왔으나 2000년대에 들어 상기한 일본인 납북 문제가 크게 대두되기 시작하게 됨에 따라 납북에 무게를 두게 되었다. 2002년 3월 1978년 니가타현에서 납북되었다가 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일시 귀국한 하스이케 카오루(蓮池 薰) 부부의 납북 문제 보도에서 몇번이고 '카시와자키(柏崎)'라는 지명이 나온 것이었다.

카시와자키는 미호씨가 실종된 날 가지고 간 손가방이 발견된 장소였다. 미호씨 가족들의 의심은 확신으로 커지고, '납북 문제가 명확해진 지금 목소리를 내지않으면 평생 미호씨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동생 미사씨는 신문사에 편지를 보냈다. 동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북한을 방문하고 야마나시현 경찰측에서 가족들의 사정을 듣고싶다는 연락이 온다. 그 후 실종 당시 상황이나 여러가지 입장을 토대로 미호씨는 납북 가능성이 있는 특정 실종자 조사회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미호씨 구출을 위한 움직임도 조직적으로 일어나, 서명 활동도 열려 약 1년간 20만명의 서명을 모아 일본 정부나 경찰 측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 속에 부친이었던 미츠오씨가 병으로 타계하여 세간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3 실종 뒤 발견 된 시체

미호씨가 특정 실종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지 1년이 넘은 2004년, 야마가타현의 유사마치(遊佐町) 해안에서 발견되었던 익사체 DNA가 미호씨의 쌍둥이 자매 미사씨의 것과 일치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20년전에 발견된 행방불명자의 시체가 미호씨라는 것이었다.

시체는 미호씨가 실종되고 2주밖에 지나지 않은 1984년 6월 21일 발견된 것으로 일부 백골화된 시체가 해안에 떠밀려 온 것을 관광객이 발견했으며 조사 결과 일란성 쌍둥이인 미사씨와 DNA가 일치하였기때문에 야마모토 미호씨와 동일인물임을 판명지었다고 하였다. 사인은 자살에 의한 익사였다.

갑작스런 경찰의 연락에 가족들은 엄청난 패닉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너무 갑작스럽다'라는 위화감에 휩싸였다.

4 의문의 조사

이 DNA 조사는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먼저, 가족들에게 비밀로 하고 DNA 감정을 실시한 것이었다.
이에 야마나시현 경찰은 '미호씨로 추정되는 시체가 2구 있었는데 1구는 DNA감정이 가능하므로 해보자' 라고 2004년 4월 26일에 전했다고 한다. 다른 날에도 총 4회 감정을 할 것임을 가족들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러한 얘기를 일체 듣지 못했다. '미호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체가 2구 나왔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흘려들을 리 없을 뿐더러 4회나 전달했는데 듣지못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기에 경찰들의 말은 거짓말임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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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더욱 이상한 점은 20년전 발견되었다는 시체였는데, 경찰이 발표하던 DNA 감정 이외에는 키, 체형, 복장, 속옷 사이즈, 그 외 모든 것이 미호씨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경찰은 이에 대한 질문에 설득력있는 대답을 내지 못했으며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않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또한, 시체가 발견된 건 미호씨 실종 17일 뒤였는데 그렇게 빠르게 시체가 백골화하는지, 시체에서 치아가 13개가 빠져있었는데 20살이었던 미호씨의 치아가 단기간에 빠질 수 있는지 등등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5 미호씨의 행방

납북 피해자로 명단에 오른 특정 실종자 조사회는 미호씨가 납북당하려다가 실패한 것이라는 가능성도 있다고 하였다. 북한 공작원이었던 안명진[1] 의 말에 따르면 납치한 사람이 저항할 경우 강렬히 구타하여 사망한 사람도 있었기때문에 그런 이유로 사망하여 공작원들의 주요 상륙 루트였던 유사마치 해안가에 유기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는 점. 또는, 북한에서 한국으로 망명한 권혁(権革)이 1994년 북한에서 봤던 여성이 미호씨와 빼닮았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에 납북당했다면 북한에서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미호씨의 가족들은 현재도 일본에서 납북 피해자들을 위해 북한까지 전파를 보내는 라디오 단파방송 'しおかぜ(Shiokaze)'에 메시지를 보내며 미호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래는 가족들이 남긴 말.

우리들은 진실이 알고싶은 것 뿐입니다. 만약 시체가 미호가 맞다면 당장이라도 아빠와 오빠의 묘에 안치해서 쉬게 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시체의 자료와 유류품 사진 속에 미호를 나타내는 건 무엇 하나 없습니다.

실종된 야마모토 미호 씨는 1964년 3월 3일 생으로[2] 띠는 용띠이며 실종 당시 나이는 만 20세였다. 만일 현재까지 살아 있다면 2016년 기준 현재 그녀의 나이는 만 52세이다.
  1. 요코다 메구미의 피랍 문제를 알린 북한 공작원.
  2. 이 링크에 따르면 그녀의 생년월일이 쇼와(昭和) 39년 3월 3일이라고 되어 있다. 쇼와는 1926년부터 쓰인 연호이므로 쇼와 39년은 1964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