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부 케이이치


입단 당시(25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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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모습 (44세)

藪 恵壹

1968년 9월 28일생

일본의 전직 야구선수이자 야구코치, 그리고 해설자.

한신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에이스였던 투수였다. 알고보면 꽤 힘든 시기를 어릴때부터 보냈는데 초등학교때 오른팔을 크게 다치는 바람에 오랫동안 야구를 하질 못했고 그이후 비만 오면 심한 통증이 와서 ? 눈물을 흘릴정도로 아팠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이걸 딛고 야구선수로 성공했으니 인생의 승리자.

그러나 고교 대학까지 거치면서도 그는 전혀 이름없는 우완투수에 불과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아사히 생명의 사회인 야구팀에 입단해서 2년을 뛰었는데, 대학때까지도 별볼일없던 이 우완투수는 사회인야구팀에서 2년을 뛰는동안 구속이 일취월장하면서 사회인리그 최고의 투수로 급부상하게 된다. 130km대 후반이었던 최고구속이 150km를 넘나들게 된 것. 그리고 다양한 변화구를 습득하면서 특히 프로에서도 위력을 떨치게 되는 고각도의 슬라이더와 고속 슬라이더를 갖추게 된것도 이시기이다.

그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고교 & 대학 졸업때 어느팀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야부 케이이치는 1993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한신 타이거즈에 당당하게 1순위로 지명을 받아서 25세의 늦은 나이에 프로데뷔를 하게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그가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도쿄국제대학 출신으로는 첫 프로선수였다는 것이다.[2]

신인을 '키운다'는 개념에 걸맞지 않게, 야부 케이이치는 이미 사회인야구에서 완성된 선수였다. 신인때부터 선발 로테이션을 꿰차더니 이후 수년간 꾸준히 이닝이터로써의 면모를 보이며 한신의 주축투수로 급부상한다. 하지만 야부는 전성기인 신인때부터 선발로테이션을 꾸준히 지키던 2002년까지 기복없는 투구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신은 리그 꼴찌를 도맡아하던 기나긴 암흑기였던 만큼 전력이 막장이었던데다 야부가 등판하는 날엔 타자들이 죄다 고인이 되었던 탓에 전체 커리어에서 세 시즌이나 다패왕을 차지하기도 하는 불운을 맛보기도 했다. 더군다나 다패왕할때 야부가 못 던진것도 아니었던지라 더더욱 안습...

윤석민이 형님이라고 부를만한 야부 케이이치의 통산기록

청소년기때까지 부상으로 신음했지만 오히려 프로에서는 특별한 부상없이 2004년까지 잘 던져줬고(2001년엔 혹사여파로 쉬어갔지만) 그 이후 해외진출을 선언하면서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주로 중간계투로 뛰었다. 2010년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1년을 더 뛰었지만 이때는 거의 커리어를 마감하던 시기라 11이닝만 던지고는 결국 은퇴했다.

그리고 2011년 한신 타이거즈의 투수코치로 복귀했고 2012년에도 계속 재직중이다.

일본야구계의 왕초 키요하라 카즈히로에게 쫄지 않는 몆 안되는 일본인 투수로도 유명했다. 의도적으로 기요하라에게 위협구를 많이 던졌다고도. 한번은 키요하라가 머리에 공을 맞은 뒤 손가락 세 개를 펴보이며 세 번이나 맞았다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그 후 기자들이 이걸 가지고 야부에게 질문을 하자 연봉 3억을 받고 있다는 뜻이겠죠 허허허허 하면서 쿨하게 무시해버렸다고 한다. 은퇴 뒤 코치로 재직하던 중에는 거인 vs 한신 OB전에서 키요하라를 상대로 140km의 속구를 던지기도...

신인시절만 해도 미남으로 유명했는데 체중이 크게 늘면서 역변하고 있기도 하다.

2015년부터는 카네모토 토모아키와 함께 마이니치 방송에서 야구 해설자로 활약하고 있다.
  1. LG 트윈스 소속 임정우 선수의 모습과 닮았다.
  2. 원래 도쿄국제대학 자체가 소속 리그인 도쿄 신대학 야구리그에서 그저그런 팀이었다. 도쿄국제대학은 이후 2011년 비원의 첫 리그 우승을 달성하게 되는데 이 당시 감독이 바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명장 고바 타케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