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자/역사

1 에도 막부 시대

일본 야쿠자의 역사는 이른바 폭력을 주무기로 하는, 국가가 승인하지 않은 사설 집단의 역사로 그 기원은 일본 센고쿠 시대가 끝난 이후 에도 막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세기 에도 막부가 들어서고 대부분의 전란이 종료, 사회가 안정화되먼서 150여년의 세월 동안 무력 계급에 위치해있던 수많은 사무라이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이 중 일부는 학자나 상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고, 살인 기술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던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은 제대로 된 봉록을 받는 것은 꿈도 못 꿀 형편으로 전락했다. 결국 정해진 직업을 가지지 못한 채 떠도는 낭인이나 최하위 계층에 놓인 하타모토 얏코(旗本奴)들은 전쟁에서 배운 각종 살인 기술들을 바탕으로 폭력 조직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가부키 모노에서는 기이한 복장과 머리 모습을 한 사내들이 무방비한 상태의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며 칼날이 잘 드는지 시험하겠다는 미친 이유로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고 다녔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무뢰배로 전락한 낭인들은 묻지마 식의 폭력과 공포를 바탕으로 여러 지역에서 분탕질을 쳤고, 이런 조직들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에 대항하는 마을 젊은이들의 모임인 마치 얏코(町奴)도 등장하였다.

일반적으로 야쿠자의 뿌리라고 부를 만한 일본내 폭력조직은 크게 하타모토 얏코와 마치 얏코 두 축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현대의 야쿠자들은 자신들이 하타모토 얏코에 대항한 용감한 하층민들인 마치 얏코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곤 한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 수많은 가부키 연극에서 하타모토 얏코를 악역으로 설정하고 마치 얏코를 미화한 탓에 저렇게 여겨질 뿐 실제 마치 얏코들 역시 하타모토 얏코와 유사하게 도박장을 차리고 보호비를 갈취하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이 시기 마치얏코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른바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폭력으로 맞서는 용감한 하층민이라는 이미지는 후대에 본격적으로 야쿠자들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미화하는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현대 야쿠자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바쿠토[1]와 데키야[2], 구렌타이[3]가 등장한 건 이로부터 좀 더 시간이 지난 18세기 경이다. 이들은 대체로 범죄자, 농토가 없는 평민, 사회에서 소외된 무뢰한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바쿠토는 주로 대로변과 큰 읍의 상권을 중심으로 형성된 노름바닥을, 데키야와 구렌타이는 무역이 증가하면서 늘어난 장터와 암시장을 중심으로 서서히 세력을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들로부터 나타난 것이 오늘날 야쿠자 조직의 기본적인 틀인 오야붕(親分)과 꼬붕(子分)의 개념이다. 한자를 보면 미루어 짐작하겠지만 폭력조직들은 두목과 부하 간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며 조직원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강요했다. 야쿠자하면 떠오르기 마련인 오야붕의 죄를 대신 떠맡아 감옥에 가는 꼬붕의 역할이나, 사카즈키고토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잔을 나누는 의례' 등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형성되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바쿠토와 데키야, 구렌타이 3대 깡패 조직들이 자신들의 주 활동무대였던 시장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전통적인 상인, 직공 계층들의 스승과 도제 관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관계나 의례는 과거 주로 오야붕과 꼬붕 간의 수직적 관계에 한정되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서 형제의 관계를 맺거나 조직끼리 관계를 맺을 때도 유사한 형태의 의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2 바쿠토

먼저 바쿠토는 주로 정부의 토목공사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돈을 다시 회수할 목적으로[4] 정부의 관리나 유지들이 고용한 노름꾼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들은 정부나 지역유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각종 노름기술들을 이용해 돈을 벌어들였는데 초기에는 주로 하층 노동자나 농민들을 주로 상대했지만 후기에는 고위 사무라이스모 선수들도 이들의 손님이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바쿠토 조직들은 그 자체로 일본 민담속 폭력조직들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는데 실제로 야쿠자라는 용어의 기원이나 유비쯔메 즉 단지의식이라는 행위나 파면장 문화같은것들이 바쿠토 조직들에서 처음 등장해서 데키야 조직으로까지 퍼져갔다.

일본의 봉건시대는 바쿠토 조직들이 성장하는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 당시 에도 막부는 모든 다이묘들에게 매년 도쿄를 한차례 방문할 것을 명령하고 그 가족들이 도쿄에 거주하도록 규정함에 따라 도쿄에 이르는 주요 도로들은 그 자체로 경제적인 부문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부문에서대 핵심적인 생명선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바쿠토 조직들은 수많은 귀족들과 명망있는 인사들이 지나갈 수밖에 없는 도로들에 있는 숙박소를 이용해 도박장을 활성화시켰고 이는 바쿠토 조직들에게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3 데키야

데키야의 기원은 크게 3가지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 첫째는 장터를 떠도는 유랑민들이 조직화했다는 주장, 2번째는 시골을 떠돌아다니는 낭인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장, 3번째는 약장사를 하면서 떠돌던 행상인들에 의해 조직된 집단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다만 그 기원에 대한 추측이 다양한 것과는 별개로 데키야의 조직화가 1700년대 중반 도쿠가와 막부의 불안 속에서 상권의 이익과 보호를 위해 이루어졌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이렇게 조직화된 데키야는 일반적으로 지역의 시장역할을 담당한 신사의 자리다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초기에는 일부 상인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위해 시작된 데키야는 곧 얼마안가 자리세를 걷거나 싼 물건을 비싸게 파는 등 사기행위를 벌여대는 범죄조직으로 변질되었다.

데키야 조직들내에는 봉건적 신분제를 모방해서 크게 5가지 신분계급이 존재했는데 두목, 부두목, 조장, 꼬붕, 견습생이 그것이다. 이러한 계급구조하에서 오야붕의 집은 조직의 본부인 동시에 견습생들의 훈련소 역할을 담당했고 적절한 훈련을 거쳐 꼬붕이 된 조직원은 조직의 상품을 팔기위해 곳곳으로 흩어졌다.

데키야 조직들에는 크게 3계명이 일반화되서 공유되고 있었는데 첫째, 다른 조직원의 처를 건드리지 말것, 둘째, 잡히더라도 조직의 비밀을 누설하지 말것, 셋째, 오야붕과 꼬붕의 관계는 철저히 지킬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최소한의 규칙하에 오야붕은 꼬붕을 행상인으로 돌리거나 특정한 가게를 배정해서 가게 사용료와 보호금을 받았다. 또한 행상인들의 가게를 열 권리를 사고 팔거나 상품 자체를 사고 팔기도 했으며 만약 이를 거부하면 부하들을 시켜 상품을 도둑질하게 하거나 손님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곤 했다.

이외에도 데키야 중에서는 아예 자체적으로 서커스같은 조직을 구성해서 전국을 떠돌면서 물건과 예능을 파는 조직들도 있었다.

그러나 바쿠토가 초기 정부관리나 지역유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등장했지만 나중에 와서도 계속 불법적 위치를 점했던것과 달리 데키야는 막부정권에서 합법적인 지위를 누리는 일이 흔했다. 수많은 데키야의 오야붕들이 표면적으로는 각종 사기행위와 시장에서의 폭력사태를 막는다는 목적으로 막부로부터 시장감독자로 임명되곤 했는데 실제로 이렇게 임명된 오야붕들은 자체적인 성을 사용할 수 있었고 검도 휴대할 수 있었다. 물론 바쿠토 조직들 중에서도 좀 큰 조직들은 어느정도 공식 승인을 받아 상당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지만 데키야처럼 아예 공식적인 지위까지 받아내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4 에도막부 말기

시미즈의 지로조는 에도막부 말기에 활동한 전통적인 야쿠자 조직들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1820년 시미즈항에서 탄생한 지로조는 어렸을때 부유한 친척에게 입양되었다가 양부가 죽은 이후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곧 싫증을 내고 아내와 사업을 내버린채 당시 도쿄로 이어지는 도로를 왕래하던 바쿠토 조직에 가담하게된다.

약 3년간 바쿠토 조직들 사이에서 중재자이자 싸움꾼으로 명성을 얻은 지로조는 시미즈로 돌아와 수많은 낭인, 노름꾼, 노동자들을 규합해 자신만의 조직을 만들었는데 19세기 중엽 도쿠가와 막부가 쇠락해가는 사이 지로조는 정부에 뇌물을 주고 공권력들이 존재했던 자리에 자신의 조직을 침투시켰다.

이렇게 성장한 지로조의 조직은 곧 일본열도를 뒤흔든 존왕양이 운동을 마주하게되는데 지로조는 당시 많은 야쿠자 조직들이 막부편에 선것과 달리 존왕파에 가담했고 결국 최종적으로 지로조는 막대한 승리를 거머쥐게된다.

사실상 막부가 몰락해가는 시점에서 지로조의 도박이 성공함에따라 지로조는 공식적으로 과거의 모든 죄과를 지울 수 있게되었고 이에 따라 본거지인 시미즈를 말그대로 지배하는 수준에 이르게된다.

지로조는 1893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지로조의 이러한 성공은 그 자체로 야쿠자 조직들 사이에서 전설로 자리매김하게되었고 수많은 민담과 극의 소재로 사용되었다. 다만 수많은 민담 등에서 시미즈의 지로조를 전설처럼 떠받드는것과는 별개로 결국 이 사람은 폭력조직의 두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의 행정문서를 살펴보면 지로조는 지역주민들에게 전혀 존경을 받지 못한 두려움의 존재였을 뿐이며, 공식적으로 정부의 인정을 받은 이후에도 깡패두목으로서의 버릇을 버리지 못해 시미즈를 폭력으로 지배했다고한다.

5 근현대

1800년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지로조의 성공 이후 극우 국수주의에 기반한 야쿠자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은 특히 아시아 대륙과 가장 가까운 후쿠오카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본래 반정부 사조가 강했던 후쿠오카는 오늘날 일본 우익세력의 원조격 인물인 도야마 미츠루의 등장 시점과 함께 군국주의 및 애국주의의 중심지로 변모하게된다. 도야마는 이 시기 후쿠오카에서 빈민가의 황제로 군림하면서 폭력단을 동원해 세력을 확대했다.

도야마가 구성한 현양사라는 조직은 당시 국수주의 연합체로서 수많은 극우폭력활동을 주도했고 이 과정에서 구마모토 등 큐슈 지방의 도시 폭력조직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했다.

이렇게 성장한 현양사는 이후 일본 전국으로 확대되서 극우 비밀결사의 상징같은 조직으로 자리잡게 되며 이는 후신이되는 흑룡회로까지 이어지게된다.

미점령 이전까지 정치조직과 영합해 크게 성장한 야쿠자 조직들은 전후 미점령하에서 다시 물밑으로 숨어들어가기 시작했다가 삼국인과의 충돌로 다시 성장할 수 있게된다.

당시 일본은 이른바 삼국인이라고 불려지는 한국, 중국, 대만인들이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계층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송환된 이들도 많았지만 일본에 정주한 이들도 상당했기때문에 이들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특히 이들의 대부분은 강제징용으로 일본으로 끌려온 케이스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증오가 상당했고 동시에 일본인들에게는 차별의 대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요 암시장을 중심으로 크게 성장 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미군정은 당연하게도 일본인에 대한 불신이 상당했고 이에 따라 삼국인 계층을 미국인 관리들의 조수로 임용하거나 주요 일본인 범죄조직에대한 제보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들 세력이 일본인들을 밀어내고 성장하기에는 더욱 용이했다.

이윤이 높은 암시장에서의 삼국인들의 세력확장은 자연스럽게 수많은 무력충돌로 이어지기도했는데 실제로 고베에서는 삼국인 조직 300명이 실력과시용으로 경찰서를 습격하자 야마구치 구미의 다오카 가즈오가 부하들에게 각종 무기를 동원해 경찰을 도와(!) 이들을 진압하기도했다. 당시 일본 경찰조직은 미군정에 의해 완전 무장해제된 상태여서 힘이 매우 약했고 무장도 기껏해야 방망이 수준이었는데, 그에비해 야마구치구미는 당시 진압에서 수류탄을 동원할 수 있을정도였으니 말다했다.

이러한 직접적인 무력충돌속에서 야쿠자들은 이른바 삼국인에 대항하는 조직으로써 경찰을 포함해 지역정부기관과 협력하는 일이 많았고 이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외국인들로부터 패전한 일본인들을 구하는 영웅이라는 이미지로 포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과거 마치 얏코의 이미지를 덧씌워서 자신들을 합리화한것과 동일한 양상이었다.

다만 위의 마치 얏코에 대한 설명에서도 언급한 거지만 결국 이들은 악랄한 폭력조직이었다. 미국공공사업부의 해리 슈파크가 당시 관동에서 알아주던 조직인 마츠다구미를 지휘하던 마츠다의 처 요시코를 심문한 내용에따르면 이들은 데키야적 전통을 계승해서 일대의 모든 노점들을 암시장화해서 노점상들에게 허가증을 팔아넘겼으며, 매달 사용료, 청소비 및 전기료를 징수했다고 밝히고있다. 또한 삼국인들을 포함한 경쟁조직과의 항쟁도 상당했다고 하는데 이들이 자신들을 외국인에대한 영웅처럼 포장해댔지만 결국 이들의 행동은 암시장을 확보하기위한 경쟁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6 구렌타이의 성장

이러한 삼국인 계층을 공격하는 집단으로써 이 시기의 폭력 조직들은 과거의 극우적 성향의 연장선상에서 많은 지지를 받으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구렌타이는 기존의 조직화된 노름꾼 혹은 행상인들 중심의 야쿠자 집단에서 한발 더 나아가 더 무자비하고 단순화된 갱집단에 가까운 폭력조직으로 전쟁말기부터 전후에 이르기까지 존재한 혼란속에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전의 전통적 형태의 야쿠자 조직들이 오랜기간 가문을 중심으로 이어져오면서 발전했고 정치권과의 연결은 그 자체로 곁다리였던데에 반해 구렌타이는 주로 젊은 청년층을 1대로 하여 정치권과 더욱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급격하게 성장했으며 그 범주또한 일본인과 삼국인을 가리지않고 구성되어있었다.

이 시기 유명한 구렌타이중에는 안도 아키라가 있다. 안도는 미군방첩대가 주목할정도로 구렌타이중에서는 상당한 거물이었는데 41년 도쿄경찰이 직접 안도를 조선인 노무자들의 수호자이자 조선인 소년들의 보호자로 지명하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을정도로 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주로 일본 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어용 폭력조직을 운영하던 안도는 전후 건설업자로 둔갑해서 아츠키 공군기지 건설 등 수많은 기간사업에 참여해서 막대한 이득을 취했는데 겨우 40대밖에 안되는때의 일이었다.

안도는 주로 일본인 정치가와 미국 장성들을 연결해주기위해 자신의 고급 나이트클럽[5]을 이용한 그는 실제로 수많은 미군 최고위 장성들을 손님으로 받아들이면서 로비를 했고 이는 천황제 유지를 설득시키는데에 중요한 역할로 작용했다고도 평가받는다.

이와같은 구렌타이 조직의 성장은 미군공공안전과 분과위원회의 보고에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이 보고에 따르면 구렌타이 세력의 중심지인 도쿄에는 꼬붕 7,400여명에 오야붕만 180여명이 있으며 주로 중소기업에 대한 갈취로 각 기업체마다 평균 5,000~1만엔가량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7 미군정과 야쿠자의 관계변화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미군정의 주요 방침은 군국주의와 국수주의자들에 대한 박멸에 맞춰져 있었으나 이는 47년 냉전의 시작이 가시화되는 시점에서 정반대로 바뀌게된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일본 공산당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일본 보수파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대놓고 이들을 숙청의 대상으로 삼고 2만명 가량의 공무원 및 교원을 해직하고 언론사들에 대한 대규모 압수수색, 좌익교수들에대한 해직권고를 단행했다.

이러한 충돌속에서 이미 야쿠자식 조직으로 재편되었거나 극우화된 야쿠자조직들은 수많은 노조와 좌익지도자들에대한 공격의 일선에 자리잡고 있었다.

미국은 전후 47년까지는 일본 우파조직들에대한 숙청을 진행해왔지만 47년부터는 그 속도를 늦춰오기 시작했고 49년에는 공식적으로 이를 해제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우익갱단의 수는 750여개가 넘을정도로 급속도로 증가했고 이들중에는 아예 정당을 창설하고 노동운동조직을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그리고 48년 말 고다마 요시오가 석방되었다.

8 고다마 요시오의 등장과 관동-관서의 대립

고다마 요시오는 항목에서도 나온것처럼 1950년대 야쿠자 조직의 정계진출에 중대한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특히 유우바리 탄광 노조 탄압에 야쿠자 조직을 개입시키는것으로 미군정계와 일본 정부의 신뢰를 크게 얻게된 고다마 요시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정계와 일본내 야쿠자사회를 연결하는 중개인으로 명성을 얻게된다.

60년대 초부터 이렇게 시작된 명성을 바탕으로 고다마 요시오는 관동에서 크게 성장하기 시작한 이나가와회와 손을 잡게된다. 당시 이나가와회의 당시 수장인 이나가와 세이쵸는 야쿠자조직들중에서도 특히나 정치활동에 관심이 많았고 일본 폭력조직사회와의 연결점을 원했던 고다마 요시오의 입장에서는 관동에서 크게 세를 불리고있던 이나가와회와의 협력은 그 자체로 매우 고마운것이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이나가와회와 고다마 요시오의 협력관계는 관서의 야마구치구미의 급격한 성장과 함께 관동회라는 조직의 등장에도 영향을 미치게된다. 관동회는 관동지역에서도 특히나 도쿄를 중심으로하는 거대 야쿠자조직들의 모임으로 이나가와회를 중심으로 스미요시회와 같은 거대조직들이 참여해 이루어진 모임이었다.

60년대 초를 기점으로 야마구치구미는 규슈 침공 등 관서지역에서 대규모 세력확장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고 자연스럽게 관서지역의 통합이 거의 완료되자 일본의 수도가 위치해있자 가장 많은 이권이 몰려있는 관동지역 진출에 큰 관심을 표방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에따라 관동지역의 야쿠자 조직들은 야마구치구미라는 강대한 적에 대항하기위해서 조직들간의 의견교환을 위한 모임을 구성할 필요성을 느꼈고 마침 야쿠자세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했던 이나가와 세이쵸와 고다마 요시오는 관동지역의 야쿠자 조직들을 모아 1963년 12월 관동회라는 모임을 결성함으로써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고자하였다.[6]

이렇게 결성된 관동회는 그러나 이나가와 세이쵸와 고다마 요시오가 가진 정치적 목적과 관동회에 참여한 다른 조직[7]의 이견차이로 인해 시작부터 삐걱거렸고 결국 결성 2년만인 65년에 해산되게된다.[8]

그러나 이렇게 해산되었던 관동회는 야마구치 구미가 고다마 요시오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다나카 세이겐과의 협력 이후 보다 공격적인 확장을 시도하면서 72년에 마츠바회와 이나가와회가 다시 협력하는것을 시작으로 관동계 조직들이 다시 모여 관동이십일회라는 모임을 구성하는것으로 재건되었다.[9] 이렇게 정기적인 회합이 이루어지는 모임을 통해 결속력을 다진 관동계 야쿠자 조직들은 고다마 요시오의 백업을 바탕으로 70년대 내내 야마구치구미와의 대립을 이어갔다.

이렇게 60~70년대의 관동-관서 조직간의 대립은 78년 발생한 벨 아미 나이트클럽 습격 사건 이후 반전을 맞이하게된다.

8.1 관서-야마구치 구미의 몰락

78년 벨 아미 나이트클럽에서 다오카 카즈오에대한 암살시도는 야마구치 구미의 상승세가 멈추게된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 습격사건으로 인해 다오카의 카리스마에대한 의심이 야마구치 구미 내부에서 확산되었고 결국 대규모 기자회견 이후 얼마안가 다오카 카즈오의 사망으로 인해 야마구치 구미는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다오카 카즈오 사후 유력한 후계자였던 야마모토 겐이치의 어이없는 사망은 이러한 분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조직의 1인자와 2인자가 연달아 사망하면서 야마구치 구미의 후계갈등은 격화되었고 결국 유력한 후계후보였던 다케나가 마사히사와 야마모토 히로시의 대립이 야마모토 히로시의 독립으로 이어짐에따라 대규모 내부항쟁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항쟁은 결국 야마모토 히로시의 이치와회가 4대 구미쵸 다케나가 마사히사를 습격해 죽이면서 정점에 달했고 최종적으로는 85년 호놀룰루에서 야마구치구미 또한 죽은 구미쵸 다케나가 마사히사의 동생 다케나가 마사시가 대규모 무기밀매로 잡히면서 소강상태를 맞이한다.

대규모 무기밀매의 실패 이후 계속된 내부항쟁으로 일본경찰들의 수사망을 버텨낼 수 없게된 야마구치 구미는 결국 내부항쟁을 멈추고 자중하는 방향으로 선회함에 따라 야쿠자세계에서의 영향력을 상당히 많이 상실하게된다.

8.2 관동-스미요시 연합의 몰락

7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던 관동-관서의 대립은 70년대 후반 야마구치 구미가 내흥으로 약화되는 과정에서 일단락되었다. 이에따라 관동지역의 조직들은 안정적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재편성해나갔으나 스미요시 연합은 그렇지못했다.

82년 스미요시 연합의 산하조직인 이케다회는 극동회와 벌인 이케부쿠로항쟁 도중 경찰관을 사살해버리는 사고를 치고만다. 항쟁 도중에 발생한 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스미요시연합은 이케다회를 향해 가장 큰 징벌인 절연을 선포하게 되는데 결국 꼬리자르기에 가까웠던 스미요시연합 간부진의 이러한 결정은 이케다회의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 외부세력을 끌어들이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고, 여기에 큐슈의 도우진회가 응답하게 된다. 큐슈의 도우진회는 무투파로 유명한 큐슈 조직들 중에서도 규모가 상당한 조직이었는데 이를 도쿄진출의 기회로 본 도우진회는 산하 조직원들을 대규모로 파견하여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감행, 결국 스미요시연합은 수도권지역의 거점을 상당부분 상실하게된다.

이후 스미요시회는 도우진회와 화해를 하고 나중에는 다시 수도권내 주요 거점을 다시 회복하는데에 성공하나 이때의 타격은 상당히 오랫동안 스미요시회의 성장을 가로막게된다.

9 91년 폭력단 대책법의 도입

이와같이 60~80년대는 야쿠자 조직들이 일본의 경제성장과 함께 급속하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항쟁과 대립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그러나 70년대 말부터 80년대까지 야쿠자 조직들의 폭력항쟁들 속에서 대규모 조직들의 세력감소도 동시에 이어지자 일본 정부와 국회는 야쿠자조직을 단속할 절호의 기회로보고 91년 폭력단 대책법을 발표하게된다.

폭력단 대책법은 일본내 대규모 야쿠자 조직들을 지정폭력단이라는 형태로 규정, 집중 감시하고 기존의 조직들이 파문 등의 절차를 통해서 꼬리자르기를 하여 범죄의 책임을 회피하는것을 방지하는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에따라 기존엔 대규모 항쟁 발생시 행동대장격인 조직들만 잘려나가는데에 그쳤던것이 이 법안 이후 최상위 조직들까지 얽힐 수 있게됨에 따라 야쿠자조직들의 폭력활동이 급격하게 감소하였고 대체적으로 항쟁급 갈등은 실제 항쟁보다는 돈을 통해 해결하는 경향이 늘어나게된다.[10]
  1. 노름꾼. 특히 봉건 시대의 길거리 노름꾼 집단.
  2. 노점 및 행상인들
  3. 무법자 혹은 악한이란 뜻
  4. 이러한 사례는 흔한데 과거 열강이 대대적인 공사에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하고 현장 근처에 도박장을 개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5. 말이 나이트 클럽이지 사실상 사창굴이었다.
  6. 특히 이는 같은 년도 3월에 이나가와회가 연루된 그랜드 펠리스 사건의 영향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야마구치 구미는 동성회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도쿄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는데에 성공했기 때문에 관동계 조직들이 경계심이 강화되기도 하였다.
  7. 특히 스미요시회는 정치문제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야마구치 구미에대한 견제에만 관심이 있었다.
  8. 다만 이는 65년에 스미요시회가 너무 급격하게 세를 불리면서 경찰의 견제를 받아 형식적인 해산을 한 영향도 있었다.
  9. 다나카 세이겐은 15만명 규모 극우세력인 전애회의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던 거물이었고 이런 인물과 다오카 카즈오의 연대는 자연스럽게 관동계 조직들과 이들과 커넥션을 맺은 고다마의 입장에서는 큰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10. 물론 쿠도카이같이 여전히 미쳐날뛰는 조직들도 있긴하다. 다만 60~80년대와같이 수십명은 가볍게 피를 보는 항쟁들이 급감한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