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의 주요 정당 (괄호 안은 일본 중의원 / 참의원의 의석 수) | ||||||
집권당 | 자유민주당 (291 / 122석) | 공명당 (35 / 25석) | ||||
야당 | 민진당 (97 / 49석) | 일본 공산당 (21 / 14석) | 일본 유신회 (15 / 12석) | |||
사회민주당 (2 / 2석) | 자유당 (2 / 4석) | 일본의 마음 (0 / 2석) | ||||
원기모임 (0 / 2석) | 신당대지 (1 / 0석) | 오키나와사회대중당 (0 / 1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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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共産党 (にほんきょうさんとう) | ||
영문 명칭 | Japanese Communist Party: JCP | |
한글 명칭 | 일본 공산당 | |
창당일 | 1922년 7월 15일 | |
이념 | 마르크스주의, 과학적 사회주의 좌파 민족주의[2] | |
정치적 스펙트럼 | 좌익 | |
주소 | 도쿄도 시부야구 센다가야4초메 26-7 (東京都渋谷区千駄ヶ谷四丁目26番7号) | |
중앙위원회 간부회 위원장 |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 |
서기국장 | 코이케 아키라(小池晃) | |
의석수(중의원) | 21석 / 475석 (4%) | |
의석수(참의원) | 14석 / 242석 (6%) | |
공식 사이트 | 일본공산당 중앙위원회 |
목차
1 개요
일본의 좌파 정당이다. 현재 당 대표(위원장)는 시이 가즈오.
2 상세
2016년 현재 일본 의회에서 자유민주당, 민진당, 공명당에 이어 4번째로 많은 의석수(35석, 중의원, 참의원 합계)를 확보하고 있는 제2야당이다. 참고로 중의원에서는 제3야당이고, 참의원에서는 제2야당이다.
현재로서는 일본 사회민주당, 자유당과 함께 원내 진보정당이다(민주당은 진보적 색채가 약하므로). 다만, 지방선거에서는 중앙정계보다 더 힘을 쓰고 있어서 2016년 기준으로 7명의 지방자치단체장과 기초의원 의석수는 약 2,800석으로 공명당과 근소한 차이로 1위, 자유민주당(약 1,800석)이나 민주당(약 1,100석)보다 1.5~ 2배정도 많고, 도도부현 광역의원 의석수는 136석으로 자유민주당, 민주당, 공명당에 이어 4번째로 많다.
참고로 일본에서 현재 활동하는 정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정당이다. 그 긴 역사만큼 일본 정치사에서 잦은 탄압을 받기도 했다. 설립을 하기도 전부터 체포되거나 억압을 받았으며, 군부 출신이 아닌 총리가 집권하고 있을 때도 사건이 터지면 제일 먼저 공격받았다.(...) 심지어 전후에도 마찬가지 였다.
위의 당기는 하나로 합쳐진 4개의 적기로 Microsoft Windows 민주주의 혁명 · 민주 통일 전선 · 국제 통일 전선 · 일본 공산당 건설을 상징하고 벼와 톱니바퀴는 농민과 노동자를 상징한다.
3 성향
다른 정당이 우경화를 외치고 있을 때, 여기는 반대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 원전 폐기, 자위대의 국방군 전환 반대, 간접세 증세 반대 등을 주장한다. 또한 당의 강령 중에 천황제 폐지, 자위대의 해산이 공식적으로 2004년까지 존재했을 정도이다. 2004년 당 대회에서 두 존재를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점진적인 자위대의 군축 및 평화 헌법 9조 수정에 의한 군대 전환을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천황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 외에 일본에서 대표적으로 세계화에 반대하는 정당으로, 예전부터 차량 유세 등에서 자본의 위험성을 강조해왔다. 그럼에도 가끔씩 일본 공산당 내 반전주의자들이 있다보니 자위대와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이 나오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후지노 야스후미 전 공산당 정책위원장의 방위비는 살인 예산.
일본 공산당은 마오이즘을 신봉하는 일본 공산당(좌파)와는 별개의 정당이다. 1966년에 일본 공산당으로부터 제명 당한 후쿠다 마사요시가 창설한 정당으로 자신들이 진짜 정통 공산당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제명 사유는 중국 정부의 지령을 받으며 별도의 활동을 벌인 것. 2001년에 후쿠다가 노환으로 사망한 이후 거의 활동 중단 상태다.
한국에서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를 방문하여 둘러본 뒤 헌화하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방문하고, 일본에 약탈된 한국의 문화재를 반환하는데 힘쓰는 등의 모습 등을 보여왔다.# 일본 공산당은 침략전쟁 당시에도 당 기관지에서 일제의 중국침략을 고발하는 등의 기사를 쓰는 등 전쟁 반대, 식민지 독립 등을 호소해왔다.
부락민 해방동맹(部落解放同盟)과는 1965년부터 노선의 차이로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반당 수정주의자, 우익 사민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부락민 차별 자체를 찬성하는 게 아니므로 이 점은 가려서 봐야 된다. 부락민 해방동맹은 사회당-사민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대신 부락민 해방동맹에서 갈라져 나온 전국부락해방운동연합회(全国部落解放運動連合会)가 일본 공산당과 가까이 하고 있다.
일본 공산당은 또한 주일미군 철수 및 미일동맹 해체를 통한 독자노선을 주장하고 있으며, 2004년 강령개정 당시 목표를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사회 진전 및 주요 생산 수단의 소유 • 관리 • 운영을 사회 손으로 옮기는 생산 수단의 사회화로 명시하고 있다.#[3] 물론 무장투쟁 노선은 이미 1950년대에 쓴 맛을 본 후 포기한지 오래다.
부부별성 선택적 제도에 찬성하며, 동성결혼에 대해서 현재의 결혼 제도를 변화해야 하며, 시민 결합 같은 파트너 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3.1 천황제의 인식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 공산당은 패전 직후, 천황이 여전히 일본을 통치하고 있던 '대일본제국헌법' 아래 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발표했다. 자세한 것은 일본인민공화국참고. (1945년 강령) 1961년 강령은 일본국헌법 중 천황 조항에 대해 민주주의 혁명 속에서 군주제를 폐지한다고 했다. 2004년의 강령 개정을 계기로 현재 일본 공산당은 군주제도 공화제에도 속하지 않는 과도적인 상태라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일본제국 의회의 개회식의 형식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비판때문에 일본 공산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천황이 참석하는 국회 개회식에 그동안 불참해왔으나, 2016년 1월 4일에 열린, 2016년 첫 정기국회에서 처음으로 개회식에 참석했다.
3.2 대외 정책
공산당 홈페이지의 영토분쟁 관련 입장을 보면 한국에 대해 식민지 지배에 관한 진심어린 사과가 우선되어야만 영토분쟁 해결을 위한 테이블을 마련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을 때도 이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일본 국회에서 채택하자 사민당과 공산당만이 반대표를 던질 정도로 영토분쟁에 관해서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일단은 일본의 제도권 내의 정치세력 중에서는 가장 전향적인 편.
반대로 러시아와의 쿠릴 열도 분쟁에 있어서는 일본에서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정당이다.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북방 4개 도서 중 하보마이와 시코탄 두개는 애시당초 쿠릴열도가 아니라 홋카이도의 부속도서이므로 당연히 일본 땅이라는 입장이고, 나머지 쿠나시르와 이투르프 두개의 섬 뿐만 아니라, 쿠릴 열도 전체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건 홋카이도의 지역정당인 신당대지(다이치)도 그렇다.
3.2.1 북한과의 관계
당명이 일본 공산당이다 보니 한국에서는 북한과 깊은 연관이 있고 북한을 지원해주는 악의 조직마냥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4] 하지만 북한과의 관계는 당내외 정치적, 사회적 입장 때문에 교류는 전혀 없고 오히려 적대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다. 북한 조선노동당과는 창당 때부터 티토주의적 노선으로 창립 이념부터 차이가 있었고 친밀도만 보자면 일본 공산당보다는 일본 사회당이 북한과 더 친밀했다. 그러나 의지하고 있던 일본 사회당부터, 연대관계인 유럽지역 사회주의 정당이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이들 때문에라도 아예 교류가 없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방북단을 보내기도 했지만 북한이 무슨 생각을 한건지, 1968년에 일본 공산당 방북단이 묵고 있는 객실에 도청기를 숨겨놨다가 딱 걸렸다. 이를 계기로 방북은 종결, 관계가 급격히 악화됐는데 1983년에 북한의 아웅산 테러 사건이 벌어지자 일본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일체의 교류를 단절한다고 알려졌다.
그 후 90년대 들어서 산케이 신문과 후지 TV 등 메이저 언론사가 북한의 일본인 납치에 일본 공산당이 관여되어 있다고 의혹을 제기하자, 일단은 북한과 교류가 단절됐다고 알려진 일본 공산당은 발칵 뒤집힌다. 이들은 언론에 정면으로 맞서는 한편, 그 동안 무시로 일관해왔던 북한에 대해서 어느 정도 비판적인 입장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특히 발사체가 일본 상공을 지나간 1998년 북한의 대포동 1호 발사 실험 사건 이후부터는 극도로 험악해져서 그 이후부터는 북한을 비판할 때 과격한 발언들이 속출한다.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역시나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서 강도높은 비난과 국제사회에 대한 제제를 조치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전문
3.2.2 한국과의 관계
한국의 좌우를 가리지 않고 지지를 많이 받고 있다.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식민지의 독립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현대에 들어서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노력과 외국인[5]의 지방 참정권 부여 등 있었으며 실제로 당시 도시전설로 떠돌아다니던 731부대의 실체를 밝히는 데 대중적으로 알렸던 사람들이 바로 일본 공산당원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일제강점기에 행했던 악질행위(일본군 위안부 포함)에 대한 식민지 통치 전반적인 사과가 있어서 더욱 우리나라 정당들을 제외하고 외국에 있는 정당 중 가장 호감이 있는 정당이기도 한다. 주류 언론들도 많이 주목하고 있으며 경향신문은 자민당에 강렬한 브레이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으며 한국일보는 아베 정권의 독주를 막는 유일한 정당이라 보도하는 등 여러 언론들이 기대하고 있다. 또한 2013년에는 사단법인 한국영화감독조합 공동 부대표 정윤철은 "일본 공산당이 한국인들과 가장 친한 친구이며 강력한 연대 세력 일본 공산당만이 조선의 해방을 주장했다" 라고 기고하기도 했다.
4 지지기반
전국적으로 지지율의 편차가 거의 없이 10%대의 고정 지지율을 얻는 편이기 때문에 지역구 소선거구제에서 고전하고 있다. 지역구에서 낙선한 사람들이 비례대표로 석패율제의 힘을 입어 생환하는 편. 그나마 선전하는 지역은 칸사이(지지율 15%), 그 가운데서도 교토(지지율 20~25%)다. 과연 그 외에는 '대도시권'에서 지지도가 있는 편이다. 다만 2010년대 이후 일본 내 진보성향의 표심을 급격히 흡수하고 있다. 원래 일본 사회민주당, 일본 민주당 등과 표를 나눠 가졌지만, 블랙기업 정책, 여성의 정치참여 장려, 투명성 등을 내세워 최근 3년간 치뤄진 선거에서 크게 약진했다.
5 역사
5.1 과거
현존하는 일본의 정당들중 가장 오래된 정당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불어닥친 사회주의 바람에 따라 1922년 창당된 것이 시초이다. 당 강령은 당시로선 가장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군주제와 귀족원[6] 폐지, 18세 이상 모든 남녀에게 보통 선거권 부여, 집회·결사·출판의 자유, 1일 8시간 노동 실시, 실업보험을 포함한 사회보장 및 최저임금제, 누진소득세에 따른 과세 실시 등 민주적 요소를 가미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식민지의 독립까지 주장했다!군주제 폐지빼곤 다 이뤄졌다[7] 하지만 이들은 이 당시 정식 정당으로 등록이 되지 않았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화에 우려한 일본제국은 이들을 탄압하고 1924년 조직을 해산하고 만다. 1926년에 재결성하고(물론 지하정당으로)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총선에 나가기도 한다. 그 중 야마모토 센지(山本宣治)가 사상 첫 ‘일본공산당 계열 의원’으로 의회에 입성하기도 했다.[8] 침략전쟁에 반대하였으며 1925년 치안유지법 제정을 기점으로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가속화되자 이후 극심한 탄압을 당했다. 특히, 1931년 만주사변을 전후로 탄압이 심해져, 일본 공산주의자로 유명했던 사노 마나부 같은 인물조차 '전향'을 강요당하고 결국에는 전향할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일본의 패전 이후 1945년 GHQ 미군정당국에 의해 치안유지법 폐지와 함께 합법화된 정당으로 다시 출발하였고 일본 사회당과 같이 큰 활동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 정세에서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 승리하고, 1950년 5월 인민광장 사건으로 공산당이 GHQ와 충돌한 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1951년 2월에 열린 일본공산당 제 4회 전국협의회(약칭 4전협)에서는 반미 무장투쟁 방침을 결정하고,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식 유격전 전술을 받아들여 전국의 농촌에 해방구를 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공산당 제 5회 전국협의회(약칭 5전협)에서 농촌 지역의 게릴라전을 규정한 문서인 "일본 공산당의 당면 요구"가 채택되고, 시골에서는 산촌 공작대, 도시에서는 중핵자위대등의 무장대를 만들어서 미군기지, 경찰서, 법원 등을 습격하고 경찰관을 살해하는 등 무장 투쟁과 마오이즘적 선전을 감행했다. 1952년에는 피의 메이데이 사건일본위키으로 인해 사실상 일본공산당이 폭력 혁명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여기에는 좀 복잡한 배경이 있다. 1950년 1월 6일 코민포름의 기관지에서 일본의 정세와 일본공산당에 관한 비판 글이 실린다. 당시 일본공산당 의장 노사카 산조는 연합군을 "해방군"으로 평가했고 "점령 하의 평화혁명론"이라는 노선을 취했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해 코민포름의 기관지에서 일본공산당의 이러한 노선을 비판하는 논문인 "일본의 정세에 대하여"가 실렸고, 일주일 뒤 일본공산당 정치국은 "'일본의 정세에 대하여'에 관한 소감"(『“日本の情勢について”に関する所感』)을 발표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까지 일본공산당 비판에 나서자, 당 내부는 둘로 분열되게 되었다. "소감"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소감파"라고 불리게 되고, 중국 공산당과 코민포름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국제파"라고 불리게 된다. 국제파는 미야모토 켄지를 위시로 한 파벌이었다.[9]
그러나 이 시기에 레드 퍼지가 일어나게 되고, 많은 숫자의 공산당원과 공산당 간부들이 정치활동 금지를 당하게 된다. 일본공산당 간부들도 정당등 규정법에 따라 검거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노사카 산조와 토쿠다 큐이치등의 지도부는 국내에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여행(사실상 망명)을 떠난다. 중국으로 건너간 일본공산당 간부들은 베이징에서 지도부를 만든 뒤[10] 중국에서 활동한다. 일본에는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중앙위원회를 해체한 뒤, 토쿠다 큐이치가 임시 중앙위원회를 지정해서 남겨놓은 상태였다(...).[11] 이들은 소감파 중 잔류파들로서 당 지도부가 중국으로 튀기 이동하기 전에 초안을 잡아놓은 "일본 공산당의 당면 요구"를 5전협에서 그대로 올려서 무장투쟁 노선을 확립하게 된다. 1951년부터 일본의 농촌에는 산발적인 산촌 공작대의 게릴라전이 펼쳐졌고, 도시에서는 중핵 자위대가 경찰서와 공공 기관에 화염병으로 불바다를 만드는 짓이 빈번하게 일어난다.[12][13]
이 시기에 재일 조선인들도 일본공산당과 함께 미군정에 맞서 투쟁했는데, 이후 조총련이 창립되면서 재일 조선인들은 일본공산당 대신 조선노동당을 추종하게 되었다. # # #
여하튼 이런 무장 투쟁 노선은 별 호응을 얻지 못한 채 1952년, 1953년 두 차례에 걸쳐 치러진 중의원 선거와 1953년에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공산당은 각각 1석만 얻는 참패를 당했으며 이런 참패의 영향으로 무장투쟁 노선은 사실상 폐기처분 되었다.[14] 1955년 즈음이 되면 베이징으로 피신했던 대부분의 간부들이 돌아오게 되고,[15] 소감파는 국제파와 화해하고 다시 당을 통일하게 된다.[16] 그리고 1955년 7월 일본 좌익/진보 운동의 역사에 큰 전환점이 된 일본 공산당 제6회 전국 협의회(약칭 6전협)가 열리게 된다. 일본공산당은 이때 무장투쟁 노선의 포기를 선언한다. 무장투쟁을 좌익 모험주의로 평가하고 정세 판단의 오류가 있었음을 스스로 시인한다. 게다가 일단 소감파와 국제파의 통일을 선언했지만, 결과적으로 중국공산당과 국제파가 제기한 문제를 소감파가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무장투쟁을 했지만 이에 따른 피해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17] 당의 실권을 잡은 미야모토 켄지는 당의 통일을 우선으로 하여, 6전협의 방침에 따라 각 개별 당원의 행위는 불문에 부치도록 하였다. 결국 소감파계 당원도 새로이 주류가 된 미야모토 파로 흡수되어 갔고, 무장투쟁기의 불법투쟁 기록은 굳게 봉인되었다.[18] 어째 일본은 좌익이건 우익이건 과거사를 덮고 가는 일에 익숙한거 같다 기본적으로 이때의 무장 투쟁 노선 포기가 나중에 신좌익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후문이 있다. 실제로 당시 6전협에 충격을 받은 많은 당원들이 공산당 지도부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당을 떠나는 일이 많았다.[19]
1953년의 참패에다 때마침 재통합한 일본 사회당에게 밀려 군소야당으로 큰 세를 나타내지 못했다가, 1960년대 중반 자주노선을 표방하고 사회당이 지리멸렬한 틈을 타 사회당의 지지기반 일부를 뺐으면서 리즈시절을 맞게 되는데 이 무렵 공명당도 주요정당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 때를 즈음해 극좌단체 적군파가 결성되면서 일본의 도시게릴라 운동이 활발해지고 요도호 사건, 아사마 산장 사건 등의 병크를 일으키며 일본 사회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의 신좌익과 적군파는 실제로 직접적으로 일본공산당과 관계가 없다. 신좌익이라는 말 자체가 구좌익인 일본공산당과 결별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들은 일본 공산당 중앙당사가 있던 요요기(代代木)의 이름을 따서 반요요기파라고 불렸다. 이와 다르게 일본 공산당은 합법정당으로서 꾸준히 제도권 안에서 활동하게 된다.[20]
반면 공산당은 지방선거에서 사회당과 연합전선을 짜며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고[21] 중, 참의원 선거에서도 선전해 1972년 중의원 선거와 1979년 중의원 선거에서 대승하며 전성기를 이어왔다. 다만 1976년 중의원 선거에서 록히드 사건등의 호재에도 타 정당에게 의석을 빼앗기는 바람에 참패했다. 그래도 득표율은 소폭 감소에 그쳤다. 1979년 통일지방선거에서 패배했지만, 6개월 뒤에 펼쳐진 중의원 선거에서 사상최다 의석수를 기록했다. 이것이 이른바 1970년대의 "자-공" 시대이다.
그러나 1980년 일본 사회당에서 공산당과 결별하기로 방침을 정하며 사실상 왕따로 전락하게 된다. 당시 사회당에서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다 보고 연립정부 구상을 하고 있었는데 공명당, 민사당에서 사회당과 공산당과의 결별을 하지 않으면 연립정권을 구성할 수 없다고 결별을 요구했다. 이는 공명당, 민사당과 공산당의 사이가 매우 적대적이라 공산당과의 연대에 부정적이었던 사회당 우파의 세가 강해진 영향도 있었다. 공명당은 공산당과 지지층이 어느 정도 겹쳐 있는 데다가, 공산당의 데마때문에 이미지가 나빠진 적이 있어 공산당에 우호적일수 없는 입장이었다. 공명당의 지지모체인 창가학회와 공산당이 1974년에 신사협정을 맺은 적이 있었으나, 공명당이 거세하고 반발하여 결국 사문화되었고,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또한 민사당은 민주사회당이라는 당명과는 다르게 반공주의를 표방하던 정당이었기 때문에 [22][23] 도저히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사회당과의 결별에는 사회당의 친북 성향과, 일본 공산당이 방문단을 보냈더니 도청이나 하는 북한에 대한 배신감이 팽배한 일본 공산당과의 입장 차이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서 1980년대 내내 선거에서 의석수가 계속 줄어들었고 특히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여기서 소련의 붕괴가 일본 공산당 의석수 저하와 직접 관계가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 당시 일본 공산당의 의장 후와 테츠죠는 소련의 붕괴를 환영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90년대 중반 일본 정치권이 혼미를 거듭하며 한동안 소외되었던 공산당은 중흥기를 맞았고 이 시기에 사회당 지지층과 무당파 성향의 지지율이 높아져서 표를 받아 비례대표제 하에서 1996년 중의원 선거와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연달아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중의원 선거에서 지역구 선거에서 전멸한 걸 시작으로 당세가 다시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2003년 자유당이 민주당으로 합류한걸 계기로 양당제가 고착화되며, 지지기반 상당수가 일본 민주당으로 이동하면서 사실상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안습. 그러나 최근 몇년에는 참의원, 중의원, 지방선거 등에서 민주당이 몰락하면서 기존에 민주당을 지지하던 진보성향의 유권자들이 공산당으로 결집, 꾸준히 의석수를 늘리고 있다.
5.2 현재
90년대에는 당원이 계속 감소하다가 최근 일본의 경제난 여파로 인해 청년 당원들이 증가하고 있다.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경향이 있는 20대를 주력 지지층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심지어 니코니코 동화 생방송에 일본공산당 소개 방송을 개설하기도 할 정도. 일본 공산당은 1960년대에 무장혁명노선을 포기하면서 마오이즘을 같이 버렸다. 이 때 마오이스트들도 같이 짤렸는데 그 짤려나온 사람들이 만든 정당이 일본공산당(좌파). 그런데도 일본공산당은 마오이즘 신봉 연상, 60년대 폭력적 무장투쟁 연상, 그리고 적군파 등 극좌 테러단체 이미지 연상으로 대중의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24] 게다가 우익 성향의 대형 미디어 매체에서 심심하면 북한과 연계가 있다고 두들겨 패는 통에..
- 2013년 도쿄 도의회 선거
- 2013년 6월 23일 치러진 도쿄 도의회 선거에서 17석을 확보하여 민주당을 꺾고 도쿄 제 1야당에 등극했다. 흥미롭게도 당선된 17명의 의원 중 11명이 여성인데, 이는 공산당이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해 여성 후보를 가장 많이 낸 덕이다. 도쿄 도의회 선거가 대체로 참의원이나 중의원 선거의 전초전으로 평가받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산당이 제23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약진할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 2013년 제23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
- 위에서의 예상과 같이 정말로 약진했다. 제23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에서 목표로 하던 5석을 획득하고, 선거구에서도 12년 만에 의석을 획득했다. 도쿄(개선수 5)에서 3위, 오사카(개선수 4)에서 4위, 교토(개선수 2)에서 2위를 기록해 당선되었다. 특히 교토에서는 창가학회 등에서 공산당을 떨어트리기 위해 막판에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었는 데도(..)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 그 결과 공산당의 참의원 개선+비개선 의석은 총 11석으로, 향후 6년 간[25] 공산당 단독으로 법안 제출이 가능해졌다. 덧붙여서, 총 의석 수가 10석 이상이기 때문에, 당 대표가 총리를 상대로 1:1 토론을 하는 당수토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2014년 중의원 선거에서 보여준 모습은 진격의 공산당. 유신이 망하고 민주가 의석수를 10여석 정도 늘린 것 이외에는 의석변동이 거의 없었으나, 일본 공산당만은 혼자서 2배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면서 2000년 이후 처음으로 20석이상(21석)을 확보했다.
- 상당수 지역구에서 팀킬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저 상황에서는 팀킬이라는 용어가 매우 적절하지 않다. 우선 정당이 선거에 후보자를 내는건 당연한 권리이고, 일본 공산당이 다른 일본의 야권 정당과는 성향이 다르다. 일본 공산당을 일본 사회민주당과 함께 유이한 진보정당으로 볼 수 있으나, 일본 사회민주당의 당세가 정말 심각하게 기울었다... 그리고 공산당이 모든 선거구에서 후보를 냄으로써 당세를 과시했는데 당세가 기울어가는 일본 민주당으로써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일본 공산당은 정당으로써 당연한 권리인 선거에 출마할 권리를 행사한 것이고, 일본의 야권은 애초에 한 팀이 아니다. 무엇보다 일본의 제 1야당인 민주당의 정체성은 사실상 그냥 반자민당이다.
한 마디로 짬뽕때문에 야당이라고 해서 하나로 뭉칠 근거나 힘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 이번 선거에서 공산당이 타 야당과 차별화 된 점은 소위 블랙기업에 대한 대책을 주요 정책으로 어필했다는 것으로, 이것이 공산당이 약진한 이유가 아닌가 하는 분석도 있다. 그외에도 반 개헌세력의 중심이 된 점도 있다. TV 아사히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큰 정부·작은 정부에대한 각 당의 의견은 명확했으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서는 자민·공명·차세대의 찬성에 비해 민주당은 입장이 미묘했고, 유신회는 하시모토[26] 와 에다[27] 공동대표의 입장차, 사민·생활의 약소화에 비해 공산당은 명확한 반대와 명분때문에 집단적 자위권 반대 운동의 중심이 된것이라 하였다. 이런 식으로 아베정권의 폭주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등 최근 일본 진보 세력, 반아베세력의 표를 흡수하고 있다. 또한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측면이 강한 일본사회에서 여성의 정치 활동 장려를 열심히 하고 있다. 실제로 여성의원 비율이 다른 일본의 정당에 비하여 높고, 최근 그 비중을 더욱 늘려가고 있다. 실제 2015년 현재 참의원+중의원 여성의원의 수는 10명으로, 타 정당에 비해 그 비율이 월등히 높다. 이처럼 일본 공산당이 블랙기업 정책마련, 선명성, 여성의 정치참여 장려 등의 효과로 반등한 것을 정의당 등, 한국의 진보정당들도 본보기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 2015년 통일 지방 선거
- 그리고 2015년 열린 일본 통일 지방 선거에서도 크게 약진하였다! 4월 12일 열린 전반전에선 선거가 실시 된 모든 41 현 부 의회에서 의석을 획득했다.
성지교토부에서는 전체 60석 중 14석을 차지해 전체 2당, 제1야당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득표율은 24.52% 나가노현에서도 전체 58석 중 8석을 차지해 전체 2당, 제 1야당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득표율은 13.08% 고치현에서도 전체 37석 중 4석을 차지해 전체 2당, 제1야당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득표율은 13.98% 4월 26일 열린 후반전에서도 의석수를 크게 늘렸다. - 10월 25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미야기 현에서 치뤄진 광역 의회 선거에서 전 의석보다 2배 증가한 8석을 차지하여 제2당이 되면서, 역시 약진하였다.
- 미야기 현은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후 지방 선거를 따로 치르고 있다.
- 그리고 2015년 열린 일본 통일 지방 선거에서도 크게 약진하였다! 4월 12일 열린 전반전에선 선거가 실시 된 모든 41 현 부 의회에서 의석을 획득했다.
- 2013년 이후 현재까지 약 3년간 일본 공산당이 각 선거마다 약진하는 사실을 분명하고 일본 공산당 '당 자체'에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보다 크게 볼 때 일본의 현 야권이 다시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일본 민주당 등 일본 공산당보다 오른쪽에 위치해있고 더 대중적인 세력의 부활이 절실하다.[28] 공교롭게도 거대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아베 신조 현 총리가 안보법 개정 파동을 통해 일본의 야권에게 결집의 계기를 준 건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야권연대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현재 다수임을 볼때 심도깊은 논의를 통해 야권 지지 성향 국민 혹은 중도층에게도 희망을 주는 전략이 필요할 듯.#
- 2015년 이후 집단적 자위권에 관한 법이 통과되면서 국민연합정부라는 만들어서 야권의 연대를 요구하고 있다. 알다시피 일본 민주당과 이념, 성향에 안 맞고 일본 사회민주당, 생활당과는 연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대중적인 정당으로 만들기 위해 대표적인 예가 당의 핵심 강령인 미일안보조약 폐기 주장을 당분간 봉인과 천황의 참석에 있는 국회 개회식에 1947년 1회 이후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일본 공산당이 가지는 당명과 당의 지향점에 대해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일단은 목표를 지켜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 2016년 3월에 일본 공산당이 폭력적 혁명을 일으킨다는 정치권 발 악성 루머가 나왔는데 이에 대해 3월 22일에 국무회의에서 스즈키 타카코 중의원 의원이 정면으로 반박을 하였다. 앞에서 얘기하듯이 일본 공산당은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폭력적 혁명을 포기하였으며 1961년 당 강령에 의회의 다수를 얻는 것이 혁명이라고 명시 이후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다.
5.3 제24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
이러한 급격한 상승세를 바탕으로 일본 공산당은 2016년 7월 열리는 제24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 득표율 15%, 약 850만표 득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정도 득표면 참의원 비례대표에서 8석정도를 획득할 수 있다.
지역구에서도 23대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오랜만에 획득했던 지역구 의석이었던 도쿄(5명 선거구, 3위), 오사카(4명 선거구, 4위), 교토(2명 선거구, 2위) 3곳을 수성하고, 아쉽게 의석 획득에 실패했던 카나가와(4명 선거구, 5위)[29], 아이치(3명 선거구, 4위)[30]에서 의석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할 듯하다.
참고로 지난 통일 지방선거에서 '전체 2당(제 1야당)'으로 도약한 나가노현에선 2013년 참의원 선거에선 19.6%를 득표했지만 2인 선거구이기에 의석 확보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는 통일 지방선거에서 역시 '전체 2당(제 1야당)'으로 도약한 고치현에서도 마찬가지다.[31]
이런 가정이 현실화되면 개선의석 기준 10석을 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디까지나 현재로선 일본 공산당의 목표이다. 쉬운 목표는 아니나 최근의 상승세와 아베 내각 반대층의 표심을 어떻게 끌어오느냐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2015년 9월 19일 안보법안이 통과가 되고나서 시이 가즈오 공산당 위원장[32]은 폭동을 일으킨 사람에게는 반드시 역사의 심판이 내린다 라고 말할 정도로 가장 비판적이면서 그 전에도 아베 신조의 역사인식부터 시작해 꾸준히 반(反)아베에 대한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앞으로 안보법안에 대한 실체 등 전반적인 활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선거연대' 는 물론이고 야당끼리 힘을합쳐 반 아베 전쟁법 폐지를 위한 국민연합정부를 구성하자고 말하기도 하였다. 야당의 연립 정권 ‘국민 연합 정부’구상이 현실화 될 경우 당 강령에서 정한 미일 안보 조약 폐기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당히 전향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간의 일본 공산당의 선거전략을 생각해보면 인상적인 변화가 아닐수 없다. 2014년 중의원 선거에서 팀킬을 한다고 비판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비판이 적절한지는 위의 해당 선거 항목을 읽고 각자 판단해야 할 듯.
조선일보(!)에서 일본 공산당의 시이 가즈오 위원장과 인터뷰한 기사에 따르면# 사민당, 생활당과는 이미 큰 틀에서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다만 민주당과의 공조는 민주당 내부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어 쉽지만은 않은 듯하다.[33]
본격적인 선거 운동을 돌입하면서 홈페이지도 리뉴얼하면서 정책 공약이 공개되었는데 특히, 2015년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 논란 이후 일본 정부가 지속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규탄하며 아베 정권과 극우단체간의 결탁,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를 지목해왔다는 점이다. 헤이트 스피치 문제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다. '영토 문제' 파트에 독도, 센카쿠 열도, 북방 영토를 함께 명시해 놓아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센카쿠 근해에 침입한 중국 해군에 항의하고, 북방 영토는 즉시 반환을 요청한다는 입장이지만, 독도에 관해서는 강경한 영유권 주장을 하지 않고, 우선은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을 하며, 그후에 한국 정부와 교섭해서 해결하겠다는 방침이다. 참의원 선거 정책 공약 영토문제에 대한 일본 공산당 위원장 시이 가즈오의 입장표명[34]
이번 선거의 최대 승부처인 32곳의 1인 선거구에서 야권 단일화를 이루어냈다. 공산당은 그 중 1개 선거구에 출마한다.[35] 도쿄에선 야마조에 타쿠 후보가 당선은 확실하고 심지어 6명 중 3위를 노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가나가와 현에서도 당선 가능성이 매우 높게 여겨지고 있다. 다만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교토에서는 의석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오사카에서는 의석을 얻을 가능성이 있으나 경쟁상대가 오사카 유신회라 힘든 승부를 벌이고 있다. 이외 의석 획득 가능성이 있는 선거구는 아이치, 홋카이도, 치바, 사이타마 선거구이다. 종합적으로 일본 공산당은 2013년 이후 계속된 상승세를 지속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예측으로는 선거구에선 1~8석, 비례대표에선 6~7석으로 총 7~15석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아사히 신문의 예측 결과로는 최저 4석, 평균 8석, 최대 11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되었다.[36] 심지어 성향이 정반대인 산케이 신문의 예측 결과로도 최저 7석, 평균 10석, 최대 13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5.4 제24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 이후
아직 선거가 끝난 것이 아니다. 중앙정치의 중심인 도쿄가 남았기 때문이다. 호헌 4개 야당(민진, 공산, 사민, 생활당)은 2016년 7월 10일에 치러진 제24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처럼 야당 간 공조를 통해 단일 후보를 출마시킨다는 계획이다. 결국 2016년 7월 12일 민진당이 최종적으로 내세운 후보는 언론인 도리고에 슌타로이다. 다음 날, 우쓰노미야 겐지 후보가 대국적인 관점에서 후보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도리고에 슌타로가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거 결과 3위로 나왔다. #
아키히토의 생전 퇴위에 대해서 진보계열의 정당과 비슷하게 정치의 책임으로 생전 퇴위에 대해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발표했다.
현재 츠키지 시장을 도요스 시장으로 옮기려고 하고 있지만 그 전에 도쿄가스 시설이었기 때문에 환경 기준에 크게 웃도는 유해 물질이 있어서 도쿄도의원단을 구성하여서 토양 오염과 지하수 오염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 이미 대책을 세우는 데 불구하고 여전히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
일본공산당 필두로 집단적 자위권인 안보법안 폐지(일본공산당 내에서는 전쟁법 라고 불린다.) 서명을 진행하고 있는데, 무려 1580만명이 서명했는 것이다. 2016년 하반기 정치권에서 부상하고 있는 쿠릴 열도 4개 섬 반환에 대해서 먼저 반환할 수 있지만 먼저 러일평화조약 쳬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시이 가즈오 위원장은 10월 13일에 주일 한국대사관을 방문하였다. #
6 기타사항
- 시이 가즈오 위원장이 쓴 <지금, 일본 공산당>이 2013년 5월에 한국에 번역되었다. 내부에서 바라보는 시각이라 어느 정도 가감의 여지는 있지만 일본 공산당이 해온 행적과 정책 방향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 2000년대 후반 일본의 경제난 때문에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진 청년들이 폭발적으로 공산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한 뒤에는 일본인민공화국을 세우려고 했었다. 덴노 제도를 폐지하고 전쟁을 금지하는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일본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발표했으나 GHQ로 부터 무시되었다. 국수 민족주의적인 중국이나 북한과 같은 방향으로 가려 했던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이들은 일본 제국의 탄압을 호되게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소련과 동일한 노선이다. 한국에서도 광복 직후에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우려 했으나 일본인민공화국과 똑같이 미국으로부터 무시당해 실패했다. 만일 세워졌다면 일본 황실이 폐지되고 국가원수로 주석이나 대통령을 세우고 농업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군사 관련에 대해서도 군대(자위대) 그런 거 없이 국경경비대급의 준군사조직만 조직하여 "아시아의 코스타리카"로 만들었을 것이고, 주변국[37]의 간접적인 압박으로 과거사 청산을 확실히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그리고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예명에서도 알 수 있듯 일본인답지 않게 큰 키로도 유명한 타카미 놋포[38] 라는 사람이 일본 공산당의 열혈 지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의 우파 성향 기성세대들과 네티즌들이 충공깽했다고 한다. 이게 왜 충공깽인가 하면 현 기성세대들과 넷 우익들이 어렸을 적 교육TV에서 했던 '데키루카나'라는 만들기 프로그램에서 자주 본 사람이었기 때문(...)
영만아재가 노동당이나 정의당 지지 선언을 한 격. 근데 걔네들은 일본 공산당보단 우측이지 않나?[39]어린이 여러분. 오늘은 낫과 망치를 만들어 볼 거예요
6.1 아카하타(赤旗)
- 항목 참조
6.2 카쿠산부(カクサン部)
일본 공산당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특설 사이트이자 캐릭터 시리즈. 카쿠산, 오텐도SUN, 포켄 스승 등의 아기자기한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다.
7 역대 선거결과
7.1 중의원 선거
횟수 | 연도 | 의석수 | 정수 | 득표율 |
22회 | 1946 | 5 | 466 | 3.85% |
23회 | 1947 | 4 | 466 | 3.67% |
24회 | 1949 | 35 | 466 | 9.76% |
25회 | 1952년 | 0 | 466 | 2.54% |
(1953~1967년의 암흑기 추가 바람) | ||||
32회 | 1969 | 14 | 486 | 6.81% |
33회 | 1972 | 38 | 491 | 10.49% |
34회 | 1976 | 17 | 511 | 10.38% |
35회 | 1979 | 39 | 511 | 10.42% [40] |
36회 | 1980 | 29 | 511 | 9.83% |
37회 | 1983 | 26 | 511 | 9.34% |
38회 | 1986 | 26 | 512 | 8.79% |
39회 | 1990 | 16 | 512 | 7.96% |
40회 | 1993 | 15 | 511 | 7.70% |
연도 | 의석수 | 정수 | 득표율(지역구/비례대표) | |
41회 | 1996 | 26(소선거구 2 + 비례 24) | 500 | 12.55%/13.08% [41] |
42회 | 2000 | 20 | 480 | 12.08%/11.23% |
43회 | 2003 | 9 | 480 | 8.13%/7.76% |
44회 | 2005 | 9 | 480 | 7.25%/7.25% |
45회 | 2009 | 9 | 480 | 4.22%/7.03% |
46회 | 2012 | 8 | 480 | 7.8%/6.1% |
47회 | 2014 | 21 | 475 | 13.30%/11.38%[42] |
7.2 참의원 선거
횟수 | 연도 | 개선의석/비개선의석 | 정수 | 득표율(지역구/비례구) |
(1947~1968년 추가 바람) | ||||
9회 | 1971 | 6/4 | 252 | 12.1%/8.06% |
10회 | 1974 | 13/5 | 252 | 12.0%/9.37% |
11회 | 1977 | 5/11 | 252 | 9.96%/8.41% |
(1980~1992년 추가 바람) | ||||
17회 | 1995 | 8/6 | 252 | 10.38%/9.53% |
18회 | 1998 | 15/8 | 252 | 15.66% [43]/14.60% |
19회 | 2001 | 5/15 | 247 | 9.87%/7.91% |
20회 | 2004 | 4/5 | 242 | 9.84%/7.80% |
21회 | 2007 | 3/4 | 242 | 8.70%/7.50% |
22회 | 2010 | 3/3 | 242 | 7.29%/6.10% |
23회 | 2013 | 8/3 | 242 | 10.64%/9.68%[44] |
24회 | 2016 | 6/8 | 242 | 10.74%/7.26% |
- ↑ 대체로 비슷해보이기는 하지만, 일본 공산당측은 유럽의 공산당들이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협력하는 것을 비판하는등 둘 사이에는 약간의 갭이 있다.
- ↑ 정확히는 '일본민족'의 주권을 회복하여 미국의 패권주의에 의해 벌어지는 전쟁에 협력하지 않고 평화헌법의 가치를 수호한다는 뜻이다. 일본 공산당은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일본 내 외국인에 대해 선거권 뿐만 아니라 피선거권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다문화주의적인 성격도 있다. 일본의 마음을 소중히 하는 당의 극우 민족주의와는 정 반대.
- ↑ 강령 내용을 확인해보면 "지금 미국 제국주의는 세계의 평화와 안전, 나라의 주권과 독립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 그 패권주의, 제국주의의 정책과 행동은 미국과 다른 독점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사이에도 모순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경제의 '세계화'를 명목으로 세계 각국을 미국 중심의 경제 질서에 통합하려고 하면 경제적 패권주의도 세계 경제에 심각한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 ↑ 민청학련 사건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일본 공산당을 사건에 엮었고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공산당 역시 북한의 하수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현대에 들어와서 반공의식의 희석과 인터넷의 보급으로 일본 공산당의 피식민지배에 관한 사과 등 개념어린 발언을 접한 것으로 인해 많이 나아진 것.
- ↑ 물론 영주권을 가지는 사람들을 말한다.
- ↑ 참의원의 전신
- ↑ 이 때문인지 적지 않은 수의 조선인들이 일본공산당에 가담하기도 했다.
- ↑ 소속은 노동농민당이었다. 당시 합법 무산정당이었던 노농당은 제도권 내에서 가장 급진적인 정당이었다. 노농당 내에는 공산당 소속의 당원들이 잠입
기생하여 활동하곤 했는데, 야마모토 센지는 이들의 추천을 받은 케이스였다. 참고로 노농당은 당 내에 반공주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뒤섞인 복잡한 상황이었다. 애석하게도 야마모토 센지는 3.15 사건도 잘 넘기는가 했더니 다음 해 우익청년에게 암살당한다. - ↑ 좀 더 배경을 이야기 하자면, 애초부터 노사카 산조와 일본공산당 주류는 친 중국공산당 성향이었다. 노사카 산조는 1940년대 중국 연안으로 가서 중국공산당에 합류했고, 태평양 전쟁이 끝날때까지 팔로군과 함께 활동했었다. 그런데 중국공산당 마저 일본공산당을 비판하니 일본공산당 지도부가 충공깽 상황에 빠질 수 밖에.
- ↑ 이를 "페킹(베이징)기관"이라 부른다
- ↑ 이 당시의 역사는 일본공산당 내에서도 정식 절차를 따르지 않은, 정식 기관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당과 무관하다고 밝히고 있다. 일종의 흑역사.
- ↑ 심지어 이 시기의 일본은 아직 군사문화가 그대로 살아있던 수직적인 사회였다. 공산당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공산당에 젊은이들이 가입한 뒤, 선배가 소년이여 전사가 되어라라고 지시하면 그대로 산촌 공작대에 합류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딴 식으로 병력을 충원하니 뭐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소감파가 국제파들을 손 봐줄 목적으로 일부러 산촌 공작대로 보내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산촌공작대와 중핵 자위대는 목적도 상당히 달랐고(산촌공작대는 무장대와 대중 노선을 혼합, 중핵 자위대는 도시 폭동을 목적으로 한 폭력 혁명 노선) 명령, 지령 체계도 달랐다고 한다. 애초부터 망했어요가 될 싹수가 보였다.
- ↑ 게다가 산촌 공작대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예외적으로 의료반을 파견하여 순회 진료를 하는 경우는 상당한 호응을 받았지만
역시 승리의 체 게바라봉건 지주를 공격하는 내용의 그림 연극등은 주민들로 하여금 저게 뭔 소리다냐 싶은 반응만 얻을 수 있었고(...), 신문이나 삐라는 지역 주민들이 입수하는 대로 경찰에 신고했다(...). 결국 산촌공작대는 경찰 단속에 의해 소멸했고, 일부는 산에 그대로 남아 자활의 길을 모색했으나 당으로 부터는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됐고, 자연스럽게 병마와 기근에 시달리다가 소멸했다.본격 남부군 열도버전 - ↑ 심지어 이러한 일련의 폭력 투쟁은 파괴활동방지법(破壊活動防止法) 제정에 명분이 되기도 했다.
- ↑ 토쿠다 큐이치는 이미 건강이 매우 안좋았고, 결국 1953년 베이징에서 병사한다. 1955년 베이징 기관의 간부들이 귀국할 때, 토쿠다의 유골을 가지고 돌아온다.
- ↑ 여기에도 엎치락 뒤치락 하는 공산당 당내 갈등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들이 많았다. 당시에는 1국 1당 원칙에 의해 국제적으로 하나로 단결하게 되어있었고, 코민포름에서 분파로 인정받으면 정통성을 잃게 되었다. 국제파는 코민포름에 의해 분파로 인정이 되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정통성이 베이징으로 도피한 간부들에게 있었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소감파와 화해하는 모양새를 취하게 되었다.
- ↑ 게다가 소감파가 중국에 나가있는 동안 국제파가 사실상 당권을 장악했다. 이후 소감파는 조금씩 쓸려 나가더니 국제파의 미야모토 켄지가 당권을 장악하였고, 서기장이 되었다.
- ↑ 여기서 참 아이러니한 게, 애초부터 코민포름의 지시에 반대했던 것은 소감파였는데, 어째 국제파가 결국에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오히려 소감파의 당초 취지에 부합하는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 ↑ 심지어 산촌 공작대에 참여한 당원들 중에는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급진적인 청년학생 당원들은 이후 다음해에 있던 흐루시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헝가리 봉기로 인해 공산당을 스탈린주의로 비판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들은 결국 1958년에 공산주의자동맹을 만들게 된다.
- ↑ 심지어 일본공산당 청년조직인 민청이 전학련, 전공투로부터 회색분자라고 짱돌을 맞고 다닐 정도였다!
- ↑ 대표적인 사례가 1967년부터 1979년까지 도쿄도지사로 재임한 미노베 료키치이다. "천황기관설"을 주장한 미노베 다쓰키치의 아들로, 1971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면담하기도 했다.
- ↑ 칠레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하늘의 계시'라고 하는 수준..
- ↑ 한편 일본은 태평양전쟁 이전에 무산정당들이 제국의회에서 활동할 시절에도 반공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상당수 활동하고 있었다. 무산정당들 중 노동농민당은 공산당에 친화적이었고, 당원들 중에 공산당원(당시에는 일본공산당이 지하정당이었다)들이 있었지만, 사회민중당이나 일본노농당에는 국제공산주의 노선에 반대한 사회주의자들이 꽤 있었다. 이들 중 우파가 패전 이후 민주사회당을 형성하게 된다. 정확하게는 1959년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개선의석의 1/3을차지하지못하는 부진을 보이자 일부계파가 탈퇴해서 민사당을 탈퇴한 것.
- ↑ 언론의 프레이밍도 강력히 작용했지만, 심심하면 일본 공산당 내부에서 급진파들이 들고 일어나다가 짤리는 상황이 60년대까지 지속됐고, 공산당원 활동을 하다가 과격파로 전향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공산당에 거부감이 강해졌다.
- ↑ 2016년 참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 3석 확보만 한다면..
- ↑ 집단적 자위권 용인
- ↑ 개별적 자위권으로 충분한 입장
- ↑ 이 서술이 현재 일본 공산당이 팀킬을 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본 공산당은 자기 역할을 나름 잘하고 있으며 오히려 일본 공산당 외 야권이 결집 혹은 혁신을 통해 자기 역할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 ↑ 불과 0.4%(16,000여 표)차로 의석을 얻지 못하였다.
- ↑ 2.5%-76,000여표차로 의석을 얻지 못하였다.
- ↑ 2013년 참의원 선거에서 24.1%를 득표, 민주당을 제치고 2위를 기록했지만 1인 선거구라 의석확보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 ↑ 아베 신조 총리와 동갑이고 정계입문 시기도 같으나 상당히 다른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 ↑ 일본 정치에 좀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민주당이라고 해도 극우적, 역사수정주의적 태도를 가진 인사가 있고 그 때문인지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편이다.
- ↑ 2012년의 입장표명이지만, 2016년에도 재차 이 노선임을 밝혔다.
- ↑ 나머지 15개 민진당, 16개 무소속 단일
- ↑ 지역구는 도쿄, 가나가와현
- ↑ 한국, 미국, 소련, 중국 등
- ↑ 高見のっぽ, 위 사진
- ↑ 한국의 좌익 정당 중 가장 강경한 노동당도 강령에 '공산주의'나 '마르크스주의'같은 단어는 털끝 하나도 넣지 않았다. 정의당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한국에선 그보다 왼쪽으로 가면 지지율 이전에 뼈와 살이 분리된다.그런데 선관위에 등록은 안되었지만 하나 생겼다! - ↑ 원내 4당, 지지율 3당. 공명당의 약진 때문.
- ↑ 사민당을 꺾으며, 자민, 신진, 민주의 뒤를 이은 제4당
- ↑ 바로 전 선거와 득표율, 의석 수를 비교하면 대약진
- ↑ 공명당을 꺾은 제3당
- ↑ 반등의 계기를 잡은 첫 전국 선거, 유신회, 민나노당과 공동 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