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

楊規
?~1011

1 개요

고려시대 여요전쟁 때 활약한 장군. 요성종이 직접 침입했을 때 소수 정예 병력을 이끌고 각지에서 거란군을 격파하며 포로로 잡혀가던 고려 백성들을 구해낸 명장이다.

고려사 본인 열전을 보면 초년의 기록이 거의 없고 요성종의 침입 때인 1010년 11월부터 1011년 1월 말 사이의 활약상만이 존재하지만 이 3개월간의 활약이 엄청 굵직하다. 후대의 척준경, 김경손 등과 함께 소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전과를 올린 고려의 용장 중 한 명. 사실 척준경이나 김경손의 선배 격이다.

2 초년기

대(對)거란전쟁 이전 초년기의 양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목종 때 여러 관직을 거친 끝에 형부 낭중이 되었다는 기록만이 존재하는데 이로 미뤄 보면 성종 말년이나 목종 재위기에 관직에 나섰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하자 곧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고려를 침공했다. 이 무렵에 양규가 도순검사가 되어 흥화진(오늘날의 의주)에서 흥화진사 정성, 흥화진부사 이수화, 판관 장호 등과 함께 이 흥화진을 지켰다.

덧붙이면 양규의 전임 도순검사가 바로 강조다. 양규는 강조의 후임으로 흥화진에 부임한 것인데, 아무래도 정변 직후의 군 인사는 민감한 사안인 만큼 강조의 추천이나 승인 없이는 이 지역에 강조의 후임으로 부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양규는 어떤 형태로든 강조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3 전초전

거란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쳤을 때 성종은 1010년 11월 17일부터 일주일간 이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양규 이하 흥화진 부대는 이 공격을 잘 막아냈다. 성종은 사로잡은 고려 농민들을 보내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요지는 "전왕 왕송(목종)은 우리 거란을 잘 섬겼는데 강조가 그를 시해했기에 이를 정벌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임. 강조를 잡아 보내면 돌아갈 거고 안 그러면 니들 다 죽은 목숨이다. 강조에게 협박당해서 어쩔 수 없이 따른 사람들은 다 용서해준다"는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흥화진의 장수들은 정중한 말로 거절했고, 성종이 다시 한번 흥화진 장수들에게 비단옷과 은그릇 등을 보내면서 항복을 권유했지만 흥화진 장수들은 끝내 듣지 않고 정중한 말로 항복을 거부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자 성종은 항복 권유가 소용없음을 깨닫고 20만 병력을 무로대(오늘날의 의주 남쪽)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직접 20만 병력을 이끌고 남하했다. 그리고 통주 삼수채에 주둔하던 강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강조까지 잡아 죽였다. 그리고나서 성종은 항복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작성해 강조의 서신으로 위조하여 흥화진으로 보냈는데 양규는 "우리는 왕의 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지시를 받을 수 없다"고 일축했다.

이후 남하하던 거란군은 통주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근처의 곽주성을 함락시켜 6천여명의 수비군을 남겼다. 이것은 곽주를 일종의 중간기지로 삼기 위함이었고 빠른 직공을 위해 최소한의 중간 기지를 둔 것이다. 이후 거란군은 개경으로 남하하는 길에 서경(평양)까지 공격했으나 서경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규의 활약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4 대활약

서경이 거란군의 공격을 받고 있던 1010년 12월, 양규는 흥화진에서 7백의 결사대를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1천 명의 군사를 수습했다.[1] 특히 흥화진 남쪽이 무로대에 주둔한 20만 거란군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양규는 소수 정예 병력으로 은밀히 부대를 운용해 거란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통주까지 남하한 것이다.[2]

그리고 이 부대를 이끌고 야음을 틈타 거란군이 점령한 곽주로 향했고 6천의 거란군이 지키는 곽주를 습격해 거란군을 몰살시키고 성을 탈환해 버렸다. 소수의 병력으로 성으로 치고 들어갔다는 의미인데 어떻게 공격했는지 자세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정공법이었을 가능성은 없고 성 내 고려인들의 내응을 이용했거나 뭔가 책략을 써서 성 안으로 잠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곽주를 점령한 후 여기 잡혀있던 고려 백성 7천여명을 통주로 옮겨 통주성의 방비를 강화시켰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전투야 말로 여요전쟁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극적인 승리였다. 만약 곽주성이 거란의 손에 남아있었다면 보급로가 확보된 거란군의 공격에 서경이 버티지 못했을 것이며, 만약 서경이 거란의 손에 넘어갔다면 고려가 당장의 위기는 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개경이 거란의 공세에 그대로 노출되어 전쟁을 수행할 역량을 상실했을 것이다.

중간기지를 상실한 데다가 서경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거란군은 그래도 서경에서 개경 사이의 길에 고려군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서경도 놔둔 채 그대로 진군했고 1011년 1월 1일 성종은 개경에 입성해 성을 불태웠으나 고려 왕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을 갔고 거란군도 꽤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곧 철수를 시작했다. 이들은 고려인 포로 수만 명을 납치해가며 청천강까지 북상했는데, 1011년 1월 17일, 귀주에 주둔하던 귀주 별장 김숙흥과 중랑장 보량이 이들을 습격해 거란군 1만 명을 죽였다. 그리고 때맞춰 양규도 거란군 예비병력이 주둔하던 무로대를 습격하여 2천여 명의 목을 베고 고려 백성 3천여 명을 탈환한다.

양규와 김숙흥은 사전에 서로 연락을 취했던 것 같은데 김숙흥은 귀주에서 흥화진 방향으로 거란군을 추격했고, 양규는 흥화진에서 귀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며 거란군을 계속해서 공격했다. 계속해서 이수(梨樹)에서 석령(石嶺)까지 추격해 2천 5백여명의 거란군을 베고 고려인 1천여명을 탈환했고, 3일 뒤 여리참(余里站)에서 세 번의 전투를 벌여 1천여명의 적병을 죽이고 고려인 1천여 명을 탈환했다. 즉 지친 거란군에게 계속 타격을 입혀가며 고려 백성들을 최대한 많이 구출해내는 것이 양규의 의도였으며 양규가 이 전쟁에서 세운 최대의 공적이다. 그리고 이렇게 연속해서 전투를 벌이다가 김숙흥 부대와 합류했다.

5 장렬한 최후

1011년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艾田)[3]에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고 애전에서 이 부대를 요격해 1천여명의 목을 벤다. 그런데 이 애전에 최종보스 성종이 직접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난다. 거란 황제의 친위군이었던만큼 꽤 많은 병력이 양규 부대를 포위했다.

양규와 김숙흥은 성종의 친위군을 맞아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처절하게 싸웠고, 마침내 힘이 다해 양규와 김숙흥 이하 고려군은 전군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양규의 최후 분전은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고 한 것도 있었을 것이고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양규 부대는 전멸했지만 거란군도 그 공격에 입은 피해가 컸던 데다가 큰 비까지 내려서 군마와 낙타가 쇠약해지고 무기가 상해 버렸다. 겨우 국경인 압록강 일대에 이르렀지만 여기서 양규의 임지였던 흥화진의 수비대장 정성은 흥화진에서 뛰쳐나와 거란군이 반쯤 압록강을 건널 때 그 후위를 맹렬하게 습격했다. 이 공격으로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

양규는 원군도 없이 한 달 사이에 모두 일곱 번을 싸워 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고 그가 구출한 고려인 포로는 무려 3만에 이르렀다. 또한 그가 노획한 군마와 낙타, 병장기도 무수했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6 후일담

사후 양규는 그 대활약에 걸맞게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았다. 현종은 양규를 공부상서로 추증했고, 양규의 아내 홍씨에게는 죽을 때까지 매년 쌀 1백 섬을 지급하게 했으며 양규의 아들인 양대춘에게는 교서랑 벼슬을 내렸다. 한편 양규와 함께 전사한 김숙흥은 장군직으로 추증했고 그 어머니에게 매년 쌀 50섬을 지급하도록 했다.

여요전쟁이 완전히 끝난 현종 10년(1019년)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했다. '삼한벽상공신'은 태조 왕건이 건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이니 건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인 셈. 뒷날 고려 문종은 두 사람의 초상화를 공신각에 봉안하게 했다.

양규의 아들 양대춘은 아버지의 공도 있었겠지만 그 자신도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평가받았으며, 이후로 크게 출세해서 안북대도호부사를 거쳐 재상까지 지냈다. 왕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평을 받았지만, 양대춘이 활약할 무렵에는 고려도 평화기에 접어들어서 장수로서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

7 현대 매체에서

어째 여요전쟁이 전쟁의 중요도에 비해 비교적 현대 매체에서 소외받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이런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 용장도 현대 매체에서는 다뤄진 적이 거의 없다. 앙 기무딱

그나마 KBS 천추태후가 이 시기를 다뤘던 만큼 여기서 등장했었다. 배우는 홍일권. 그래도 용장의 면모를 보여준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인간흉기(...), 강조를 두번이나 제압한[4] 야율적로를 원샷원킬로 베어버렸으며, 웬만한 장수 여러 명은 상큼하게 웃으며 베어버리는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웬만한 에이스급 장수들과는 당연히 진적이 없다.
최후에는 그는 김숙흥과 함께 화살을 맞고 선 채로 죽는 최후의 순간에도 도망가는 거란군을 노려본다.

  1. 통주에서 1천의 병사들이 합류해 1700의 병력이 되었다는 의미인지, 통주에서 수습된 병사들까지 합쳐 1천의 병사가 되었다는 의미인지 확실하지 않다.
  2. 다만 무로대에 위치한 20만 거란군을 뻥카로 보는 의견도 있다. 아무리 당시 요나라가 전성기였다고 하더라도, 송이 배후에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 중국 제국조차 동원하기 힘든 40만 원정군을 동원할 역량이 있었는지 의문이며, 우리나라에 20만이란 군세를 주둔시킬 거점이 있는지도 문제되며, 이후 전쟁에서 무로대에 남았다는 20만 대군은 종적이 묘연해진다. 물론 무로대에 주둔한 거란군이 20만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보급로를 유지하기 위해 적지 않은 병력은 남겨두었을 것이다.
  3. 공교롭게도 지명이 '쑥 애'에 '밭 전'이라서 쑥밭이라는 의미가 된다. 어? 오늘날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김정호의 동여도에 의하면 영변과 곽주 북쪽에 '애전현'이라는 고개가 있다고 한다. 거란 군사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쑥대밭으로 만든 것은 맞다
  4. 물론 기습이거나 무방비 상태이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