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

1 强調

글자 그대로 어떤 문장이나 말을 강하게 나타냄.
폰트에 시각적 효과를 줌으로써 단어나 문장을 강조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무위키이런 것이나 이런 것이나 이런 것[1], 그리고 이런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무분별한 강조는 오히려 가독성을 떨어뜨리니 주의할 것[2]. 특히 이런 식으로 글씨를 키우고 볼드를 치는 행위는 가독성을 떨어뜨리며, 이런 식으로 붉은 글씨를 강조하는 행위가 가장 가독성을 해치니 더더욱 자제하길 바란다.

예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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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康兆

(?~1010)

2.1 개요

고려 초기의 무장[3]이자 권신. 무신정권을 거쳐 이성계까지 이어지는 고려시대 무신 쿠데타 수난사의 시초격 인물. '반역자'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가문의 내력이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고려사》 열전을 비롯해서 어느 곳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정확한 출신지도 알 수 없으나, 일단 황해도의 신천 강씨일 가능성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이른바 패서호족 계열의 인물인 셈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강태주(康泰周)의 아들이고 이부상서를 역임했다고 하는데, 신천 강씨 족보에 똑같이 강태주의 아들로 이부상서를 역임한 강억(康億)[4]이라는 인물이 현재 신천 강씨의 직계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서 적어도 강억이 강조의 형제이거나 동일인물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2.2 강조의 정변과 거란의 침입

강조는 목종대에 서북면 도순검사[5]로 전방에 나가 있었다. 목종은 김치양 일파의 정권 탈취 음모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강조를 불러들였는데, 강조는 오히려 목종을 쫓아내고 대량원군(현종)을 옹립하여 임금으로 세웠다(강조의 정변).

이어 강조는 김치양 일파를 숙청하고 목종도 부하를 시켜 시해하고는 고려의 실권자가 되어 나라를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북쪽 나라 거란이 호시탐탐 고려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 요성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역자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6]으로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 칭한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거란의 침공에 대해 고려는 '30만 대군[7]을 소집하였다.

거란군이 국경 지역인 흥화전에서 양규에게 고전하게 되자, 요성종은 약간의 별동대를 귀주 방면으로 보내고 본대는 빠르게 강조가 주둔한 통주로 진군하여 이틀 만에 도착하게 된다. 야전으로 승부를 보기로 한 강조는 전체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한 부대는 전면에, 또 한 부대는 배후 요새와 전면에 나선 부대 사이의 후퇴로를 지키기 위해 성 근처에, 나머지 한 부대는 주변 고지에 주둔시켜 굳건히 지키게 하였다. 하천을 기병 기동을 방해하는 천연 참호로 이용하여 측면 강습을 막고 전면에는 검차(劍車)를 배치하여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에 대한 기록을 보면,

兆引兵(강조가 군대를 이끌고), 出通州城南(통주성 남쪽으로 나아가서), 分軍爲三(군사를 셋으로 나눠), 隔水而陣(물과 거리를 두고 진을 쳤다): 一(하나는), 營于州西據(통주 서쪽에 쳤는데), 三水之會(세 강물이 만나는 곳으로서), 兆居其中(이곳에 강조가 머물렀고); 一(하나는), 營于近州之山(통주 근처 산에 쳤으며); 一(하나는), 附城而營(통주성에 붙여서 쳤다). 兆(강조는), 以劒車排陣(검차들로 진을 만들고), 契丹兵入(거란군이 쳐들어오면), 則劒車合攻之(검차들로 이들을 일제히 공격해서), 無不摧靡(당최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契丹兵屢却(거란군이 번번이 물러가자), 兆(강조는), 遂有輕敵之心(적을 우습게 보고), 與人彈棊(사람들과 탄기를 했다). - 『高麗史』 卷127 「列傳」 40 ‘叛逆’ 1

하지만 그렇게 알까기만 하다가 결국은 패배, 고려군은 궤멸되고 강조는 포로가 되고 만다.[8] 물론 단순히 지휘관의 방심 때문에 패배했다고 보기는 힘들고, 강조의 의도는 거란군이 방어선 안으로 좀 더 들어왔을 때 이를 분쇄하려는 것이었을 수 있지만[9] 거란군의 정예인 우피실군의 기동력이 강조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서, 미처 고려군이 협공하기도 전에 지휘부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2.3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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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서는 또 이때 강조가 목종의 혼령을 보고 "죽을 죄를 지었다."며 무릎 꿇고 빌었다고 전하는데, 강조만 보았을 혼령에 대한 기록이 역사에 남았다고 해석하기보다는 그런 일 없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굳이 사실이라고 해석한다면 이후의 장렬한 죽음과 연관해서 뒤늦게나마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깨닫고 후회한 것을 표현한 듯. 아무튼 최후는 당시 강조와 함께 포로가 된, 당시 부사령관 이현운이라는 자와 대비되는 장렬한 죽음으로 기록되었다.

거란주가 강조의 포박을 풀어주면서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묻자 "나는 고려 사람이다. 어떻게 다시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대답했다. 한 번 더 물었지만 대답은 처음과 같았다. 살을 도려내며 또다시 물어 봐도 역시 대답은 처음과 같았다. 이현운에게 묻자, "이미 두 눈으로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는데 한 마음으로 어떻게 옛 산천을 떠올리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강조가 화를 내며 이현운을 발로 차면서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결국 거란이 강조를 죽였다.

契丹主, 解兆縛, 問曰:"汝爲我臣乎?" 對曰 :"我是高麗人, 何更爲汝臣乎!" 再問, 對如初。又剮而問, 對亦如初。問鉉雲, 對曰:"兩眼已瞻新日月, 一心何憶舊山川?" 兆怒, 蹴鉉雲曰:"汝是高麗人, 何有此言!" 契丹遂誅兆。
『高麗史』 卷127 「列傳」40 ‘叛逆’1

2.4 평가

외적과 1선에서 맞서싸우고 잡혀서 목숨을 잃었어도 굴하지 않았던 점으로 그나마 강감찬을 다룬 위인전이라든지 고려 역사 학습서적에서도 언급되면서 정변을 일으키고 왕을 죽인 죄인일지 몰라도 적어도 나라를 배신하지 않고 장군답게 떳떳하게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고 호평하는 반응이 많다.

웅진출판사에서 펴낸 역사만화인 "한국의 역사"에서는 거란 왕에게 항복해서 부하가 되겠다는 이현운의 얼굴을 "이런, 쓸개빠진 놈!"이라고 욕하면서 걷어차버린 뒤, "내가 임금을 죽인 게 네놈들에게 나라를 바치려고 그런 줄 알았느냐?"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들어가기도 했으며 어느 강감찬 위인전에선 요 성종에게 고개를 쳐들고 "난 비록 왕을 배신했어도 나라를 배신하진 않는다. 네놈에게 머리숙여 굴하지 않을테니 정 굴하게 할려면 내 목을 벤 다음에 목을 가지고 머리를 숙이거라." 라고 일갈하는 대사를 넣기도 했다. 90년대 어느 출판사 버전에서는 요 성종을 비웃으며 고문을 받음에도 크게 일갈하며 웃으며 숨을 거뒀다는 창작을 넣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조작이라고 할 수 없는 강조의 장렬한 최후를 이야기한 것이니...

당시 고려의 일개 무장도 아니고 실권자라는 사람이, 전선에서도 최전선까지 나가 목숨 걸고 적을 맞아 친히 싸운 모습부터 포로로 잡힌 뒤에 거란의 회유를 받아들여 살 수 있었음에도 굴하지 않고는, 살을 찢어내는 어마어마한 극형을 받아가면서도 끝내 스스로를 고려 사람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떳떳하게 죽은 모습까지... 이런저런 음모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대목이다. 강조는 왕의 충신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고려의 충신이었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강조의 죽음 이후로 정권을 유지하려면 앞에 나서면 안된다는 교훈을 깨달았는지, 후대의 최씨정권은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쳤다.

여담이지만 강조가 집권해서 패망에 이르는 사건 구조 자체는 600년 뒤의 이괄이괄의 난과도 흡사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의 신립과도 묘하게 이미지가 겹치는 부분이 있다.둘 다 북방에서 커리어를 쌓았지만, 일대 회전(통주 전투,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하여 죽음을 맞았고, 그 패배로 왕이 피난까지 갈 정도로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는 점이 비슷하다. 또한 강조는 현종을 옹립한 권신이었고, 신립은 선조의 사돈이었기 때문에 당시 왕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점도 겹친다.

2.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천추태후>에서는 최재성이 배역을 맡았다. 여기서는 전형적인 우직한 맹장으로 등장한다. 작중 등장인물들 중에서 무력이 혼자 궤를 달리한다. 어느 정도냐면 혼자서 어지간한 무장 2~3명은 거뜬히 제압하며[10], 거란 최고 맹장이란 야율분노까지 제압할 정도. 무력으로 치면 양규와 함께 투톱이다.[11]

근데 문제는 천추태후 극 중 강조의 출생배경이란 것이다. 강조이 나고 자란 곳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본관은 황해도 신천임이 유력한데 어째서인지 극 중에서는 발해 유민 출신으로 나온다. 천추태후 극 초반 경종에게 무릎꿇고 고하는 장면이 있는데 대사가 "나는 발해에서 온..."이라면서 대놓고 역사왜곡을 한다. 아무튼 강조는 발해 유민과는 전혀 관련 없고 고려 호족 가문 출신이라는 거 알아두자.

최재성이 전에 연기한 <불멸의 이순신> 속의 원균 캐릭터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천추태후를 짝사랑하는 설정이 붙었다. 은근히 순정남으로, 천추태후와 가까워지는 김치양을 싫어했다.

나중에 그를 짝사랑하던 천향비와 결혼한다. 천향비가 김치양의 정체를 추적하다가 살해당하자 안그래도 미워했던 김치양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북방으로 떠난 후에 김치양의 반란이 일어나자 즉시 황궁으로 돌아와 김치양 일당을 쳐부수는데, 강조의 정변 부분은 왜곡이 좀 많이 곁들여져 있다. 예를 들면 정변 이후에 대량원군이 새 황제로 즉위하기 전 "태후마마가 섭정해야 한다"면서 고집을 피웠다.

역사 기록에서는 거란 성종에게 잡혀갈 때 모포말이를 당하는 굴욕을 당하고 모진 고문 끝에 죽었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마지막에 성종을 암살하려다가 진삼국무쌍을 한 판 찍고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거란군과 100vs1 대결을 벌이는데, 이 100명이 일반병이 아니라 가려뽑은 정예병이다. 거기다 이당시 강조는 고문을 받아서 컨디션도 완전 바닥인 상태. 그런데도 이 100명을 상대로 승리했다. 하지만, 그 이후 난입한 거란의 명장 5명의 합공을 받아 죽게된다. 특이한 점이라면, 사극에 등장하는 주연인데 이 아니라 을 썼다는 것. 그런데 천추태후의 고증 상태를 보면 고증 때문은 아닐 듯(…).

그런데 마지막 강조의 회상 장면에 천향비와의 결혼 생활이 없어서 '강조는 결국 천향비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냐'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1. 원래는 취소선이지만 리그베다 위키나 나무위키 등 내에서는 문장 내의 특정 단어를 부각하려고 사용하기도 한다.
  2. 눈치 챘겠지만, 이게 바로 강조다. 그 중 이건 볼드다.
  3. 《고려사》를 보면 군무를 담당한 건 서북면 도순검사 직책이 처음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전형적인 무장은 아닐 것이다. 사실 고려시대의 숭문천무를 고려하면 당연히 문관출신 장군일 가능성이 더 높다.
  4. 한자의 뜻을 유심히 보라. 억(億)은 만의 만 배이고 강조의 조(兆)는 억의 만 배이다.
  5. 《요사》에는 서경(평양) 유수라고 되어 있는데, 겸직했을 가능성도 있다.
  6. 이것 말고도 화주 방어사 유종이란 자가 여진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이 거란 조정에 상주된 것도 있었지만, 설마 성종이 여진족의 한을 씻어 주겠다고 쳐들어온 건 아닐 것이다. 물론 고려에 군신의 도리가 바로 서기를 원해서 침공한 것도 아닐 테지만.
  7. 초기 고려는 10만단위 대군을 생각보다 자주 동원해서 보는 이들을 놀라게 만든다. 참고로 한반도에서 전근대에 이 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한 예는 임진왜란 말기 밖에 없다.
  8. 여담이지만 이 때 강조의 부대를 격파하는 데 선봉에 선 부대가 '우피실군'인데 이들은 거란 황제의 친위부대로 편제상 병력은 총 6만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이 부대는 훗날 귀주 대첩 때 강감찬에게 패하여 거의 전멸했다.
  9. 거란군이 방어선을 돌파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강조는 "놈들은 입안의 음식과 같다. 너무 적으면 안되니 더 들어오게 하라!"라고 했다.
  10. 장수 2명이 정면으로 칼을 휘둘렀는데, 창으로 받아내서 2명을 냅따 벽까지 쭉 밀어버렸다(...).
  11. 양규는 다소 미묘한데, 막판에 급전개로 야율분노보다 더 강하다는 야율적노가 양규한테 원킬로 당해버린 것. 앞서 야율적노가 (기습이기는 했어도)강조를 2번이나 제압한 범상치 않은 포스를 보여줬기에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