麗遼戰爭 |
Goryeo–Khitan Wars |
1 소개
993년(성종 12)부터 1019년(현종 10)에 이르기까지 3차례에 걸친 거란의 고려 침입으로 촉발된 전쟁.
거란은 현존하지 않는 집단이기 때문에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이나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등 다른 주요 전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간략하게 다뤄지는 경향이 있지만, 앞에 적은 전란들에 결코 덜하지 않았던 큰 전란이며, 한때 고려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고 이후의 고려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큰 전쟁이다.
2 명칭 문제
'여요전쟁'이라는 용어는 엄밀히 말하면 틀린 표현이다. 이들이 처음으로 공격한 993년부터 귀주 대첩으로 전쟁이 끝나는 1019년까지 당시 거란인들이 세운 나라의 정식 국호 자체가 '거란'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거란인들은 자신들이 세운 나라의 명칭을 민족명인 '거란'과 요태종 때 만들어진 '요'를 쓰다 말다를 반복했는데, <요사> 거란 성종 2년(983년)에 '국호를 다시 거란으로 바꾸었다'는 기술이 존재한다. 그나마 요가 국호이던 시절에도 거란인들은 스스로의 나라를 거란어인 '카라 키탄(대거란)'이라고 칭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거란이나 요나라 항목 참고. 거란이라는 국호를 다시 '요'로 바꾼 건 1066년이며, 고려에 침입했던 성종 재위기에는 계속 '거란'이라는 국호를 유지했다.
일단 네이버 백과사전이나 국사 교과서에서는 '거란의 침입'이라고 쓰고 있고, 대중적으로 '거란의 침입'이란 표현이 제일 많이 쓰인다. 위키백과 한국어판에서는 '고려-요 전쟁'과 '고려-거란전쟁'이 같이 쓰고 있으며, 일본어판 위키에서는 '契丹の高麗侵攻(거란의 고려침공)'이라고 쓴다. 한편,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Goryeo–Khitan Wars(고려-거란전쟁)'이라고 표기하고 있다.[1][2]
따라서 이때의 전쟁의 정식 표현은 '거란의 침입'이며 국사 교과서나 사전에서도 이 명칭을 공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냥 전쟁이라는 명칭을 붙이려면 고려-거란 전쟁 정도가 맞는 표현이지 줄이고 싶다면 여거전쟁, 여란전쟁 정도? 여요전쟁이라는 말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거란의 국호가 '요'가 아니었기 때문에 틀린 표현이다.
3 제1차 침입
고려는 북진정책과 왕건의 훈요 10조를 충실히 따라 거란을 배척하면서 송(북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였다.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북방에 주둔중이던 거란을 공격하려고 시도하였고, 발해 유민들의 국가인 정안국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에 대항하였다. 이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으며 이를 타개하고자 요는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고려에 송과 친교를 끊고 거란에 화친할 것을 종용하였다.[3]
결국 993년, 10월 요나라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 때 소손녕은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 거란의 군사가 80만 대군이라고 선전하면서 빨리 항복하라고 고려 조정을 윽박질렀다. 물론 80만 대군은 소손녕의 허풍이었고 실제로는 많아봐야 10만 이하 병력만 동원했다는게 통설이다. 안융진 전투 이후 거란이 줄기차게 회담을 요청한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1차 침입은 일종의 무력시위적 성격이 강했다.
서희(徐熙) |
그러나 고려는 동요했으며, 신료들은 항복론이냐 자비령 이북 할양론이냐(...)로 나뉘었다. 이때 오로지 서희만이 소손녕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고 할지론을 강력히 반대하여 이를 막았다. 이어진 안융진 전투에서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이 소손녕의 거란군을 격파하자 조정은 강화론으로 돌아섰다. 이때 소손녕이 다시 줄기차게 회담을 요구하자 서희는 단신으로 거란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서희와 소손녕(蕭遜寧)의 담판 |
이 위엄차고 기발한 담판과 그 의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서희 항목 참조. 이 회담으로 거란군은 물러갔고 고려는 지금의 평안도(정확히는 평안북도 서북부) 일대인 강동 6주, 상세히 열거하면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구성/귀성), 곽주(곽산)을 얻게 되었다.
다만 강동 6주는 사실 거란의 영토라고 볼 수 없다. 미개발 상태로 일정한 정치적 구심점이 없는 여진족(말갈)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토 할양이라기보다는 고려가 강동 6주를 치더라도 이것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이 때 거란은 고려가 그렇게 쉽게 강동 6주를 평정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겠지만, 고려는 그렇게 했다. 게다가 험한 지형인 이 일대에 방어 시설까지 갖추게 되자 훗날 거란이 몇 번이고 고려를 쳐도 이 요새들의 저항에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하였으며 거란군은 단 한 번도 이 강동 6주의 요새지대를 함락시키지 못했다.[4]
이런 점에서 1차 침입은 변변한 전투는 없었지만 외교관 한 명으로 가히 나라를 구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의미있는 전략적 승리를 거뒀다. 프리퀄이 본편할 기세
4 제2차 침입
요나라 장수 |
고려 초기 최대의 국가적 위기. 이 침입 때 고려는 수도 개경이 함락당하는 등 정말 멸망 직전까지 갔었다.
고려는 994년 즉각 송과 국교를 끊었으나[5], 성종이 994년 6월, 송나라에 '고려는 진심으로는 송을 따르고 있으며 거란을 증오한다'는 국서를 보냈으며, 목종이 997년에는 이부시랑 주인소를 송에 파견하여 고려가 중화를 사모하고 있으나ang? 오랑캐 거란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국서를 보냈으며 계속해서 송에 비밀리에 사신을 보냈다.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한 후 하공진은 강조에게 협력한 대가로 동료 유종과 함께 북방 양계에 주둔하게 되는데 1010년(현종1) 봄, 조정의 명도 받지 않은채 무단으로 동여진 부락을 공격했다 패전한다. 이에 당시 화주를 맡고 있던 유종이 앙심을 품고 고려 조정에 조회하려고 화주에 들어와 있던 여진 추장과 그 수행원 95명을 모조리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학살로 고려에 깊은 원한을 품게된 여진은 거란에 강조의 정변을 알리며 원한을 갚아줄 것을 호소했다. 여진의 협력을 얻게 된 요성종은 자신감을 얻었다.
현종이 즉위하고 요에 사신을 파견하여 사실을 알린 것을 비롯하여 몇 차례의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요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 정벌의 군령을 내려 준비를 서두르는 한편 사신을 파견하여 목종 시해의 이유를 정식으로 물어왔다. 고려는 두 차례나 사신을 파견하고 특히 9월에는 거란의 수도인 동경의 유수에게도 특사를 보냈으나 거란의 강경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고려 조정은 이에 대비하여 10월에 실권자인 참지정사 강조를 행영도통사에 임명하고 출정부서를 정한 뒤 고려 전역의 병력을 있는대로 긁어모아 30만 군으로 통주로 보냈다.[6] 또한 귀양 보냈던 하공진과 유종도 복직시켜 거란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총사령관이 된 강조는 통주[7]에 주둔하며 거란군을 기다렸다.
요성종은 친히 보기(步騎) 40만을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고 하며 거란군을 진두지휘했는데, 친정이지만 실제 군세를 주도하는 도통(都統)에는 대송 전쟁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선보였던 귀주대첩 때 처발리는 소배압을 임명하였다. 또한 이전 침공과는 다르게 사신을 보내어 미리 출병 사실을 통지하는 일종의 선전포고를 했는데 이는 단순한 요식 행위가 아닌 고려 조정 내 주전파와 주화파의 분열을 유도한 전술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거란군은 1010년 11월 기존에 알려진 진군로를 따라 내원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청천강까지 행군하였는데, 이곳은 강동6주를 말발로 털어 잡수신 서희가 안정화시킨 이후 주요 거점이 모두 요새화된 지역이었다. 특히 흥화진은, 11월 중순 경부터 일주일 이상 공략하고도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 진사 정성 등이 이끄는 방어군의 거센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요성종이 수비군 20만을 무로대에 남기고 남진을 결정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아무리 흥화진에서 고전했다고는 하나 총병력 40만 중 반이나 되는 20만의 대병력을 후방에 두고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과 대결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라 이 대목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 일단 기록을 긍정하여, 내원성 고려 침공의 중간 기지였다는 점이나 거란군 특유의 기동전 선호 등에서 이유를 찾기도 하지만,
- 기록의 행간을 읽어, 거란이 송과의 전쟁에서도 20만 이상을 끌고 내려간 적이 없다는 점을 들며 당시 거란군의 실제 병력을 20만 정도로 파악하는 사람도 있다.
통주에서는 강조군이 초전에서 거란군을 격퇴했지만 강조가 탄기(彈棊)를 하며 방심한 사이 크게 격파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강조를 비롯한 부통사 이현운(李鉉雲) 등 많은 장수가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강조와 이현운도 모두 거란에 포로가 되는데, 이현운이 배신하고 거란을 섬긴다고 하자 강조는 그에게 욕을 하면서 발길질을 했다고 하며,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결국 죽음을 당했다.
그렇게 장렬히 죽은 강조를 포함해서 죽은 자가 3만 명에 이르렀다. 사실상 2차 여요전쟁 당시 고려군 주력은 여기서 소멸한다(…). 이는 2차 여요전쟁 때 3차 여요전쟁과 달리 고려군이 거란군에 야전으로 승부를 걸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됐으며, 개경을 그대로 방폐하고 몽진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 때 서경 공방전에서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현종은 거란군을 막기 위해 동북면 도순변사 탁사정과 함흥의 중랑장 지채문을 서경으로 급파했다. 먼저 도착한 지채문이 탁사정과 합류해서 서경으로 입성하기 위해 서경 인근 성천에서 대기하는 동안 서경은 이미 항복을 결정한 상태였다.
먼저 지채문이 급히 서경에 도착했으나 이미 항복 분위기로 돌아선 서경은 성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고려사에는 그냥 서경 사람들이 열어주지 않았다고 쓰여있다). 마침내 지채문 막하에 있던 최창이 서경 내의 조자기와 연락해 문을 열었지만 이미 항복 문서는 서경을 뜬 상황. 결국 지채문은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하고 항복사절을 추격해 살해한 뒤 항복문서를 불태웠다. 그러나 이 극약처방에 서경 민심이 "지채문 저놈 때문에 우리가 다 죽게 생겼다"며 극도로 흉흉해졌고, 이에 이기지 못한 지채문은 다시 서경 성내에서 쫓겨났다. 게다가 이 순간 거란군 진영에 현종의 시간 끌기용 항복 표문이 도달해 요성종은 스스로 서경 유수와 부유수를 임명해 파견하였다. 어디까지나 시간끌기용이었지만, 서경이 함락됐다면 진짜 항복 사절이 됐을 것이다(...).
서경은 항복을 결정하고, 거란의 새 서경유수 일행이 남하하던 그 결정적인 순간…드디어 탁사정의 동북면군 주력이 서경에 도달했다. 지체문은 바로 탁사정을 만나서 정세를 이야기하고, 대군을 이끌고 온 탁사정에 의해 서경의 혼란은 진압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서경에 강화 사절의 선발대로 새로운 서경유수 요의 한기가 이끄는 기병 200기가 도착했다. 만약 탁사정이 단 하루만 늦었더라면 서경은 함락되고, 전투는 여기서 끝이었을 것이다. 전투가 다 끝난 줄 알고 여유만만이던 이들은 당연히 고려 기병의 기습에 반은 죽고 반은 포로로 잡혔다.(...) 또한 이들이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한 덕분에 사절 본대인 서경부유수 울름의 1000기 역시 포위공격에 걸려 궤멸당했다. 분노한 성종은 거란군에 서경 총공격을 명령하였다.
거란군의 공세가 거세어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탁사정은 대도수[8]에게 동문으로 공격해 거란군의 주의를 끌도록 하고 자기가 이끄는 주력이 서문에서 출격해 거란군을 기습하자는 작전을 내놓았다. 그런데 탁사정은 서문을 나오자마자 거란군을 공격하기는 커녕 남쪽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이로서 그는 기껏 패전을 막은 영웅에서 하루 아침에 졸장으로 돌변(...) 배신당한 대도수는 결국 분전 끝에 거란에 항복했다.
지휘부와 주력군이 하룻밤 새에 증발하는 황당한 사태에 직면한 서경은 잠시 혼란에 빠지지만, 중간급 간부던 통군 녹사 강민첨과 조원의 활약으로 서경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강민첨은 후일 3차 여요전쟁에서 강감찬에 다음가는 부원수의 자리에 이른다.
한편 흥화진을 고수하던 양규는 정예 700기를 뽑아 출격, 일단 적에게 빼앗겼던 곽주를 탈환 주둔하고 성 주민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겨 작전지역을 넓혀 나갔다. 이에 전국의 교착상태를 타개하려고 초조히 굴던 거란군은 곽주, 통주, 서경의 요충지를 후방에 그대로 방치한 채 개경을 향하여 남하해왔다.
400km의 고립을 감수하는 요성종의 대담한 결단에 고려 조정은 경악하지만, 결국 강감찬 등의 주장으로 항전의 뜻을 굳히고 왕의 몽진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피난길에서 신하, 병사, 노비들은 다 달아나 버리고 현종과 두 왕후를 수행하는 이는 지채문 등 신하들과 금군 50여명이 전부였다. 앞서 주전론을 펼쳤던 장수들마저 태반이 왕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이 때의 몽진은 안습의 연속이다.
"적성현(경기 연천)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니 무졸(武卒) 견영이 역인(驛人)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행궁을 범하려 하므로 채문이 말을 달려 이를 쏘았다. 적의 무리가 도망하여 무너졌다가 다시 서남쪽 산에서 갑자기 나와서 길을 막았는데, 채문이 또 쏘아 이를 물리쳤다." -고려사절요- |
나중에 똑같이 몽진하던 선조도 이런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어쨌든 추격하는 무리들을 떨쳐낸 현종 일행이 창화현에 이르렀을 때 고을 아전이 왕의 일행을 보고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습니까."하고 거만을 떨었다.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고려 시절의 아전은 조선의 하급 공무원인 아전과 다르게 지방 호족으로 사실상 지방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아는 아전=이방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현종은 애써 모른 척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종의 태도에 화가 난 아전은 사람을 시켜 하공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고 외치게 했다. 당황한 지채문이 무슨 이유로 오느냐고 묻자 아전은 채충순과 김응인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다고 답했다.
이 말에 현종 일행은 크게 겁을 먹었다. 채충순과 김응인은 현종의 최측근이었으며 하공진은 강조파에다가 이번 전쟁의 원인에도 관여한 사람이라 무슨 짓을 저지를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겁에 질린 김응인은 시랑 이정충, 낭장 국근 등과 함께 달아나버렸으며 밤이 되어 다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적[9]이 공격해오자 그나마 남아있던 신하, 환관, 궁녀들까지 죄다 도망가 숨어버리고 두 태후(경종비 대명궁부인, 성종비 문화왕후)와 시녀 2명, 승지 몇명만 남았다. 게다가 왕후는 임신 상태였다! 지채문만이 남아 한 줌 남은 병력으로 적을 물리쳤지만 말과 기물을 빼앗기고 경황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후 상황을 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새벽이 되자 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으로 탈출하여 나가기를 청하고, 손수 임금의 말을 몰고 사잇길로 가서 도봉사(道峯寺)로 들어가니 적은 이를 알지 못하였고 충순이 뒤따라 왔다. 채문이 아뢰기를, “지난 밤의 적은 공진(拱辰)이 아닌 듯하니 신이 가서 뒤를 밟아보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가 도망할까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채문이 아뢰기를, “신이 만약 주상을 배반하여 행동이 말과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고려사절요 현종조 원년 |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양주로 향한 지채문 일행은 달아났던 국근을 만나 합류하게 되고 다시 하공진과 유종을 만났다. 지채문이 그들을 만나 정말 반역하였냐고 묻자 하공진은 극구 부인하였다. 지채문은 하공진이 이끌고 있던 병사 20여명을 데리고 양주로 돌아가 빼았겼던 말과 안장을 되찾아왔다.
이처럼 안습에 안습을 거듭하였지만 (중간에 왕후를 버려두고 뛰는 경우도 있었다) 거란군이 물러날때까지 현종은 2차침입 내내 전라도 전주, 광주, 나주를 전전하면서 무사히 몽진을 마치고 충청도 공주에서 새장가를 드는 성과도 올렸다.
이런 상황속에서 결국 거란군은 수도 개경을 함락하고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이 때 대량의 고서적, 특히 사서(史書)들이 불타 없어졌다. 역대 고려 왕조의 실록들도 소실되어서 이후 이를 복구하라는 현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것이 7대 실록. (7대 실록의 완성은 덕종 때 이루어짐) 하공진은 스스로 요성종에게 화친을 설득하겠다고 말하고 고영기와 함께 사신으로 북쪽으로 향했으며 현종은 남쪽으로 떠났다. 당시에 현종일행은 앞서의 창화현에서 갓 벗어난 상태였다. 현종의 표문을 얻어 거란군 쪽으로 향하던 하공진은 창화현 관아에 닿기도 전에 거란군 선봉과 조우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실로 고려사를 떠나 5천년의 한국사에서 최고로 긴박한 순간이었다! 당시 거란 선봉과 현종일행의 거리는 십수리에 불과하였다.
하공진은 거란군의 안내를 받아 성종을 만났다. 그리고 고려의 남방은 수천리에 달하며 고려왕은 이미 그 밖까지 도주하였다고 거란 성종을 속였다. 이미 퇴로가 위험하여 전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거란 성종은 이 말을 믿고 고려왕의 친조(직접 황제를 알현함)를 조건으로 하공진을 인질로 잡아 퇴각했다. 훗날 하공진은 결국 요성종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 이유는 요성종이 하공진을 회유하려 무던히 노력하였지만 하공진은 고려로 탈출하려다 실패하여 잡혔고, 이 때에도 하공진은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죽인 후 심장과 간을 꺼내 먹었다고 한다.(...)
한편 통주, 귀주 등지를 확보하여 적진 후방을 위협하고 있던 양규 휘하의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맞이하여 섬멸적인 대 타격을 가하였다. 적병 1만 명을 격살한 귀주별장 김숙흥의 대전과를 필두로 양규의 의주지방 무노대 전투에서는 적 사살 2천, 포로 3천, 이수 석령의 추격전에서 적 사살 2천 5백, 탈환인 1천, 여리참 전투에서 사살 1천, 탈환 1천여, 애전 전투에서 사살 1천여의 전과를 올렸다.
이처럼 곳곳에서 적을 섬멸한 양규, 김숙흥 부대는 마침 회군 중인 거란 성종의 주력부대와의 조우전에서 분전하다가 마침내 모든 장수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 죽음은 헛되지 않았으니 거란은 자칫 주력군에 괴멸적 손실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어 왕의 친조 조건을 수락하여 겨우 체면을 유지하고 회군한 것이었다. 또 황급히 철군하는 그들이 양규 휘하부대의 요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으므로 강동의 성들을 점령할 수도 없었거니와 회군 후에도 명분상 즉시 강동 6주의 노른자를 요구하지 못한 것이었다.
거란군이 철수한 이후 고려에서는 사신을 거란에 보내어 회군한 것에 감사를 표하고 동지사, 생신사를 파견하여 양국 간의 화평 유지에 노력하였다. 거란군은 명목상 고려왕의 친조를 약속받았을 뿐 그 이상의 이익은 얻지 못하였으나 고려와 송의 군사적 연합을 저지하는 것에는 성공하였다. 고려는 거란에 대한 친조를 다시 한 번 약속하였으나, 끝내 친조하지는 않았다.
고려는 수도가 함락되고 서북지방이 초토화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거란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서 관졸이 몰살당하는 바람에 조금이라도 글만 읽으면 특채로 뽑아야 하는 상황까지 오게 된다.[10]
또한 거란과 고려 사이에서 수많은 여진 난민이 발생하였다. 고려는 이들을 내지에 집단 이주시키고 수공업 등에 종사하게 하였는데 기록을 보면 직역상 천민으로 된 것 같다.
5 제3차 침입
고려군 |
고려는 계속해서 송과 비밀리에 통교하였으며 특히 1010년 송에 사신을 보내 송의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송은 고려가 오래도록 조공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사실 거란의 침공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고려는 거란의 2차 침입 때 군사적 예봉을 완화시키기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서 '거란군의 철수'에 대응한 '국왕의 친조'라는 강화 조건을 제시한 것이었다. 또 아직 강동6주 반환 떡밥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구는 실제로 실현하기 어려운 요구였으므로 결국 3차 침입의 구실이 되었다. 고려왕의 입조 요구가 고려측의 거부로 실현되지 않자 거란 성종은 강동 6주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고려에서 현종 3년 (1012) 6월에 전공지를 문후사로 파견하여 '왕은 병이 있어 친조가 불가능하다'고 통고하자 요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빼앗겠다는 공식성명을 내고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이 문제는 이후 계속되고 거란이 국경지방에 소규모로 여러 차례 공격을 가해왔다. 거란은 해를 거듭하여 고려에 침입하였으나 소득 없이 철병해야 했고 그 때마다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계속되는 군사적 침입의 실패는 요나라에 복속해있던 여진족들이 고려에 연줄을 대기 위해 개경으로 조공사절을 줄지어보내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대규모 전쟁은 불을 보듯이 뻔했고, 고려는 무리한다 싶을 정도로 중앙군대를 확장해나가기 시작했다. 헌데 그러다가 사단이 터졌다. 1014년, 영업전을 빼앗겨 분개한 중앙군인 경군과 관직체제의 문제로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상장군 최질과 김훈을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것이다. 솔직히 아무리 국가재정을 살린다지만 죽도록 싸운 무신들과 중앙 군대의 땅을 빼앗았으니 배은망덕한 것 맞다. 더구나 빼앗은 영업전은 국가재정을 확보한 것도 아니고 문신들의 녹봉 확보용으로 들어갔으니 변명의 여지도 없다.[11] 무신정권의 프리퀄 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정변은 현종이 서경유수 이자림과 짜고 고위 무신 19명을 잔치를 벌인다는 명목으로 불러들여 살해하는 것으로 싱겁게 끝났다.
결국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난을 처리한 1015년, 고려는 송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송은 거절하였다.[12]
결국 요성종은 이 기회를 노려 고려에 대한 대규모 침략을 결심하게 된다.
강감찬(姜邯贊) |
거란은 현종 9년(1018)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소굴렬(蕭屈烈)을 부통으로 삼아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내침하였다. 고려에서는 평장사 강감찬(姜邯贊)으로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천 명을 이끌고 영주(寧州, 安州)에 나아가 대기하였다.
강감찬 등은 흥화진(의주)으로 나가 정예 기병 1만 2천을 뽑아 산곡 사이에 매복시키고 큰 줄로써 소가죽을 꿰어 흥화진 동쪽의 큰 내를 막은 후 거란군이 마음 놓고 건너가기를 기다렸다가 수공을 가해서 도하하는 거란군의 허리를 끊고 매복한 기병을 돌격시켜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일화가 너무 유명해서 흥화진 대첩을 귀주 대첩의 일화로 잘못 아는 예가 많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요군의 기세가 여전한 상황. 고려군이 매복 작전으로 큰 타격을 주자 소배압은 남진하여 그대로 개경을 위협하기로 결심하였다. 2차 침입 때에 개경으로 직진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이때에도 남진을 꾀한 것이다. 이에 고려에서는 개경의 방어에 진력하였다. 거란군이 무리하게 남하하여 개경으로 향하였으므로 고려군은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곳곳에서 타격을 주었다. 거듭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이 계속 개경으로 공격해오자 태조의 재궁을 북한산의 향림사(香林寺)로 옮기고 개경을 계엄하였다.
마침내 현종 10년 정월 3일에 소배압이 이끈 거란군이 개경에서 100여리 떨어진 신은현(新恩縣 황해도 신계)에 이르자, 현종은 청야전술을 써서 성 밖의 민호를 전부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전부 철거토록 한 후 도성의 방비를 엄하게 하였다.
제2차 침입의 교훈을 받아들여서 개경의 주산인 송악산에 산성을 구축하는 등 수도 일원의 경비가 굳건한데다가 거듭되는 패전으로 군사들의 사기마저 떨어지니, 소배압은 더 이상 개경에 대한 공격이 불가능함을 알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앞까지 왔는데 싸울 힘이 없다니(...)[13] 고려군은 2차 침입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전쟁에 대비하였고 수적으로도 적을 압도할 수 있었다.
귀주대첩(龜州大捷) |
후퇴하던 거란군 10만은 전략/전술적 길목인 귀주에서 기다리던 고려군 보병+기병 20만과 회전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14][15] 그리고 수일 간의 격전 끝에 등 뒤에서 튀어나온 고려군 1만에 의해 등짝이 쪼개지면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이것이 바로 귀주 대첩이다.
3차 여요전쟁 때의 자세한 전투 정황들은 귀주 대첩 항목 참조.
고려군은 수만 명의 포로를 획득하고, 군마와 낙타, 갑옷, 병기 등을 무수히 노획했다. 게다가 거란군 가운데 살아돌아간 자가 불과 수천에 불과하였으니, 4반세기에 걸친 여요전쟁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대의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요의 성종은 참패 보고를 듣고는 크게 분노하여 사자를 소배압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네가 적을 가벼이 여기고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대하려 하느냐. 나는 너의 낯가죽을 벗긴 다음에 죽일 것이다”라고 질책했다. 하지만 소배압은 성종의 어머니인 승천태후 소씨의 일가였고, 승천태후 소씨가 이룬 공적이 워낙 컸으므로 실제로 낯가죽이 벗겨지거나 죽지 않고 파직만 당한 후 1023년 복직해서 그 해에 죽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구사일생.
강감찬이 개선하자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 우봉) 까지 나아가 주악 속에 용사들을 맞이하여 성연을 베풀었다. 그리고 손수 강감찬의 머리에 금화팔지(金花八枝)를 얹어주고 오른손으로 금잔을,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위로하였다. 그 동안의 고난이 귀주대첩으로 일시에 설욕되는 안도와 축제의 장면이었다. 현종은 즉위 직후 2차 침입 때 수도를 버리고 남으로 몽진하던 악몽과 같은 기억을 되새겼을 것이다.
6 전쟁 결과
이후 고려는 국경문제 등으로 거란과 여러차례 트러블을 겪긴 하나 결과적으로 대규모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고려는 (형식적으로) 거란에 사대를 하며[16][17] 우호적 사대와 경계선을 놓는 외교 갈등을 번갈아 가며 거란에 대해 어느 정도 자주적인 외교를 보여준다. 서로 분위기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지, 1085년 고려 왕 선종의 생일을 축하한답시고 온 거란 사신 '이가급(李可及)'이 제 날짜보다 늦게 당도하자 고려에선 "이름은 (제때) 다다를[及] 수 있다[可]고 해 놓고 제때 못[不] 다다랐네[及]? '가급'이 아니라 '불급' ㅋㅋㅋ"라며 개드립을 날리기도(...). 참고[18]
그리고 거란은 사실상 고려의 완전병탄과 강동 6주를 포기하였다.[19] 이로서 서로 체면과 실리를 챙겨서 동북아에 세력균형이 이루어졌다. 이후 고려는 강동 6주와 천리장성을 바탕으로 국방력을 키워 거란의 자잘한 침공을 막았으며 제도를 정비하였다. 무엇보다도 고려-요-송의 명백하고 안정적인 3강 구도를 형성하며[20] 이후 고려는 120여 년간 한민족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기 중 하나로 꼽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의 정치적/경제적 태평성대를 누리게 된다.
그래도 전쟁이 내내 고려 영토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당시 고려는 적지 않은 인명손실과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 때 기록에 의하면 포로로 잡혀간 고려인들은 이국 땅-현재의 내몽골-에서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현재 남은 기록으로는 고려 정부가 이들 포로를 송환하려고 노력한 흔적은 일부 인원에 한하여서만 있고, 이들이 고려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고려 못지않게 거란과 고려 사이에 끼어 있었던 여진족들도 당시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거란도 국력을 기울인 전쟁으로 인한 출혈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랫동안 안정세를 유지했으나 거란은 더 이상의 성장을 멈추게 된다. 이미 제대로 고려를 침략한 2차전쟁 당시 거란은 유목민족 특유의 폭발적인 초기 성장동력을 가지고 있던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여진은 막심한 피해가 누적되었음에도 거란보다 더 크게 성장해서 결국 백여년 뒤에 금나라를 건국하고 거란을 집어먹게 된다.
이 모든 사태에도 불구하고 송은 여전히 거란의 위세에 눌려 있었으며 후일 이런 치욕을 설욕하고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하여 고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후일 금과 손을 잡고 거란을 멸망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 이후에 금에게 화북을 빼앗기고 말았다(...). 늑대를 내쫒으려고 호랑이를 부른 셈.
여담이지만 이 전쟁은 현충일과 약간 관련이 있다.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