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r Edmund Percival Hillary
젊은 시절의 에드먼트 힐러리 경
말년의 에드먼트 힐러리 경
-위대한 탐험가, 산악인-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이 끼친 인물
뉴질랜드 출신의 산악인(1919~2008)으로, 네팔인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1953년 에베레스트 정상에 최초로 등정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1 생애
1919년 7월 20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친구들보다 몸이 왜소했기 때문에 매우 소심했고, 책 속에서 위안을 찾았으며, 모험에 대한 공상을 즐겼다고 한다. 고등학교까지 등하교에 각각 왕복 2시간 이상이 걸렸고, 그 시간을 독서를 하는데 보냈다. 그는 왜소한 몸을 극복하기 위해서 복싱을 배운 후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16세 때, 수학여행을 통해 루아페후 산(최고 2,797m)을 등반함으로써 등반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자극하게 된다. 그는 오클랜드 대학교에서 수학과 과학을 공부했고, 1939년에는 남 알프스 산맥의 쿡 산 근처에 있는 1,933m의 올리비어 산을 등정하게 된다. 산에 관심이 많았지만 원래 양봉업자로 이름을 떨쳤고, 양봉업은 여름의 한시적 직업으로 겨울에는 등반을 하면서 뉴질랜드의 스키와 등산의 지도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공군에 자원했지만,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의 입대자원서를 철회되었다. 그러나 1943년 징병으로 인해 그는 조종사로 공군에 입대하여 비행정을 조종하는 업무에 종사했다. 1945년에 피지와 솔로몬 제도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보트 사고로 심하게 화상을 입었다. 그 이후 다시 뉴질랜드로 송환되었다.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등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네팔인 셸파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정상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텐징의 사진은 찍어주었으나 텐징이 사진기를 쓰는 법을 몰라 자신의 사진은 찍지 못했다고 한다.셀카가 없던 시절의 비애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뉴질랜드는 열광했다. 당시 뉴질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인물이 많이 없기 때문에 최초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정복으로 스포트라이트를 전 세계에서 주목받게 되면서 힐러리의 출신이 뉴질랜드 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렸으니 열광할 수 밖에 없었다.
1.1 1953년 에베레스트 탐험
당시 에베레스트로 가는 루트는 중국의 티베트 침공으로 중국의 티베트 통제로 폐쇄되었고, 네팔은 1년에 한 번에 한 해 허용을 했다. 1952년에 같이 참가했던 스위스 원정대와 정상에서 240m 지점에 남기고 악천후로 의해 하산하였다. 1952년 힐러리가 알프스 산맥를 등반하는 동안, 조지 로웨가 1953년 등반에 승인된 영국팀으로 연합 히말라야 위원회로부터 초청을 받은 것을 알게되었고, 초청이 됨으로서 힐러리도 같이 갈수있었다.
여기서 그의 인생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셰르파를 만나게 되는데 그 셰르파는 텐징 노르가이이다.
1.2 그 외 탐험
2 서훈
3 이야깃거리
- 뉴질랜드 5달러 앞면 표지에 올라가있다. 그것도 살아있었던 상태에서. 보통 지폐에는 현재 재위중인 군주(엘리자베스 2세 등)를 제외하면 사망한 위인을 넣는데, 이 관례를 깬 것이다. 실제로, 힐러리의 초상을 지폐에 넣을 때 뉴질랜드 중앙은행이 힐러리에게 양해를 구했다.
- 2013년 오클랜드 전쟁기념 박물관에 있는 에드먼드 힐러리의 시청각자료, 일기, 장비, 사진 등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되었다.
- 명왕성에서 두번째로 높은 산을 힐러리산이라고 명명했다.
- 뉴질랜드에서는 국부와 가까운 사람이라 뉴질랜드 녹색당에서 에드먼드 힐러리의 생일을 공휴일로 하자고 제안한적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