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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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UNESCO Memory of the World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

  • 세계기록유산이란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문화재로, 인류 자자손손 길이길이 보존할 만한 기록물을 대상으로 지정한다.
  • 세계기록유산에는 아주 오래되고 중요한 사실들만 기록한 것들이 등재될 것 같지만, 5.18 기록이나 일본의 야마모토 사쿠베에의 기록처럼 현대의 기록이거나, 개인적인 기록도 훌륭한 가치가 있다면 등재된다. 사실 단순히 세계"기록"유산이 아니라, Memory of World, 즉 세상의 기억이란 이름다운 등재기준이 있다.
  • 2016년부터 일본 외무성세계기록유산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세계의 기억으로 공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1] 중국과 한국에서의 정치 이용이 문제시되고 있으며, 권위있는 세계 유산과 무형 문화 유산과의 혼동 방지를 노리고있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유네스코에서 국가 간의 기록물로 가지고 어느 정도 이용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고 유네스코도 이러한 부문을 인정했고 일본 내에서 유네스코가 개혁해야 한다고 꾸준히 있었다. 하지만 난징대학살 기록 유산 등재 이후 이제와서 내부적으로 공식적으로 잘 써왔던 것에 대한 말을 바꾸는 것은 오히려 기록유산의 위상 깎아내리기와 정치성 띄우기 대한 의구심만 높아진 상황이다. 기사

2 등재과정

유네스코에서 세계 각국들한테 2년에 한번 새로운 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을 받는다. 기한은 한번의 등재과정이 끝나고 끝난 해(홀수 해)의 연말까지. 따라서 자료 제출을 해야하는 실질적인 시한은 대략 6개월 정도이다. 각국이 유네스코에 낼 수 있는 유산은 한번에 최대 2건이다. 등재신청에는 세계기록유산 신청하는 자료(원본, 사본)[2]와 세계기록유산 신청한 자료에 대한 설명, 그 자료를 통해 알아볼 수 있는 역사적 현실, 역사적 영향, 세계기록유산이 등재될 수 있는 당위성 등의 자료를 첨부하여야 한다. 그래서 유네스코에서 신청받은 안건에 대해 짝수 해동안 검토를 벌이면서 각국에 자료가 부족하다거나 한 경우 추가 자료를 요청한다. 이렇게 모인 자료들과 서류보완 지적을 받은 추가 자료들을 취합하여 새로운 홀수 해에 유네스코 총회를 열어 이 총회에서 세계기록유산 등재회의를 한다. 이 등재회의에서 그 나라에서 내놓은 자료들에 대한 기록유산 등재안건을 의결하고 유네스코 총회 의장이 승낙하면 그날부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다. 그리고 새로운 자료를 신청받는 사이클로 운영된다.

3 몇 나라들의 세계기록유산

3.1 대한민국의 세계기록유산

대한민국에는 2015년 기준 모두 13개의 세계기록유산이 있다. 아시아에서 1위, 세계 공동 4위.

다만 이건 단순히 오래되었다고 등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록물이 쓰여진 당시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의미로 도움이 되었거나 후세에 알릴 만한 가치가 있는 기록물들을 전세계가 같이 보호하고자 만든 제도인 만큼, 선조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런 글들을 전하려 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후손으로서 성심성의껏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2007년 이후로 전근대 자료 하나, 근현대사 자료 하나를 묶어서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그 등재 추진의 결과물이 5.18 관련자료와 새마을운동 관련자료,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2건이다.

또한 최근 '일제 강제동원 피해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신청하였다. 최근 일본이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에 조선인 강제징용 시설을 포함한 것을 등재한 후 강제징용을 감추고 왜곡하려는 시도에 대응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또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도 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추진 중이라 한다.

최근 일본과 조선통신사 기록물을 등재추진 한다는 뜻을 밝힌바 있다.

3.1.1 목록

3.2 중국의 세계기록유산

중국에는 모두 10개의 세계기록유산이 있다. 긴 시간과 방대한 스케일의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이 기록유산에 있어서 한국보다 수가 적은 것은 희대의 병크 문화대혁명으로 대부분의 기록자료가 싸그리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4] 그 만행을 겪고도 10개'나' 남았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 지경이다. 파괴된 유산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달리 생각해 보면 모택동과 홍위병들이 진시황제의 몇배로 대륙 스케일 광역 데이터 말소를 시전했으니 안좋은 쪽으로도 굉장하다. 그래서인지 기록유산 10개 중 두 건(황제내경, 본초강목)이 의서다.

간혹 중국이 우리나라보다 오래되었는데 우리나라가 왜 훨 더 많냐. 의미 없다, 권위가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세계기록유산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 생각이다. 물론 모두가 다 알듯이 중국이 보유한 역사적 사료와 문헌들은 한국보다 훨씬 방대하고 다양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거나, 이를테면 사마천의 '사기'를 세계기록유산에 등록한다든가 하는 것은 어렵다. 세계기록유산은 그 기록 내용의 정보적 가치 외에도 기록물의 실물 자료로서 가치를 중요시한다. 즉 허준이 발간한 당시 판본으로서 '동의보감', 이순신 장군이 직접 붓으로 써내린 친필 문집으로서 '난중일기'이기 때문에 가치있는 셈이다. '사기'가 아무리 역사서로서 중요하다 해도 사마천이 직접 쓴 사기 혹은 한왕조 시절의 사기가 지금 남아있는 건 아니다. 이 논리는 성경이든 코란이든 사서삼경이든 다 마찬가지. 내용상 매우 가치 있는 문헌이어서 후세에 무수한 사본들이 남아 전해내려오는 것과 세계기록유산인 것과는 상관이 없다. 다시 말해, 세계기록유산은 기록의 내용이 아닌 기록물 자체의 가치와 보존에 치중한다.

애초에 유네스코 측도 한번에 후다닥 등재할수 있는것도 아니고 확실한 검증 후에 등재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나은 물건, 혹은 보물을 등재하는게 아니라, 미래로 전할 가지가 있는 기록을 등재하는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상도 아닌지라 등재 여부에 권위나 의미를 논하는것은 본 제도의 의미를 착각한 지적이다. 게다가 중국쪽이 중의학 기록물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해 하다가 동의보감 등재 이후 허겁지겁 중의학 서적 등재에 나섰으며 2011년 본초강목과 황제내경을 등재한 이유도 있다. 참고로 중국이 동의보감에 대항하여 등록한 황제내경과 본초강목도 상당히 무리수였다고 할 수 있는데, 동의보감과 달리 원전(초판)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문헌들이기 때문이다.[5]

2014년에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을 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였으나, 2015년 심사에서 등재되지 못하였다. 같이 올라간 난징대학살 기록물과 대비되는데, 등재되지 못한 이유가 재미 있다. 유네스코는 '위안부 문제는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므로 해당국들과 같이 공동신청을 하는 것을 유네스코 규정으로 장려한다'고 밝혔다. 즉, 위안부 기록물 그 자체의 적절성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 한편 우리나라 역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과 일제 강제동원 피해 기록물을 등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얼쑤

난징대학살 기록물의 등재에 대해 일본 측에서는 관방장관까지 나서서 펄펄 뛰며 선택적 자료 공개에 대해 항의했으며 비밀심사는 안된다는 주장을 했다. 결국 '모든 자료를 자세히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기회를 달라'는 건데, 이건 범죄자가 자신이 저지른 범죄을 스스로 재평가 하겠다는 말이나 똑같은 얼토당토 않은 주장이자 뻔뻔한 억지다.[6] 당연히 이런 일뻔뻔에 중국과 유네스코가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 건 당연한 것이고.

3.2.1 목록

  • 중국 전통 음악 녹음 자료 - 1997
  • 청 왕조 내각 문서 - 1999
  • 고대 나시(納西)족 둥바(東巴) 문헌 필사본 [Ancient Naxi Dongba Literature Manuscripts] - 2003
  • 청 왕조 금방(金榜) - 2005
  • 청 왕조의 양시 레이(样式 雷) 기록물 - 2007
  • 본초강목 <本草纲目> - 2011
  • 황제내경 <黄帝内经> - 2011
  • 원 후기의 티베트 관련 문서 - 2013
  • 화교 관련 자료 - 2013
  • 난징대학살 기록물 - 2015

3.3 일본의 세계기록유산

일본에는 현재 모두 5개의 세계기록유산이 있다.

불과 200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에는 세계기록유산이 하나도 없었다. 건축물 상당수를 세계 유산으로 등록한 것에 비해 기록 유산은 거의 없는 수준으로 기록유산 면에서는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좋지 않은 수준이다. 이는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일본은 '국가 기록물' 즉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만들어낸 기록물[7]이 빈약한 나라이기 때문이다.[8]
또한 이는 일본의 역사왜곡과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 주장하는 내용 중 주변 국가들과 충돌하는 내용이 상당한데 이건 뭐 일본서기부터도, 기록물을 공개하면 세계적인 학자들의 판단이 들어가게 되므로 자신들이 유도하던 대로의 해석을 유지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일단 식민지 지배를 통해서 관련 국가들의 수탈로 많은 유물들을 강탈해 갔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만약 일본이 식민지 수탈 기록이나, 일왕가 기록 등을 유산등재 했을 경우, 관련 물품들의 목록이 다 그대로 드러나게 될 것이므로 일부러 감추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이주민 간행물이나 식민지 자료 등 세계사적으로 별로 의미가 없는 작은 것들까지도 등재해두고 있는 나라들을 통해 과연 일본에서 기록물을 올릴 만한게 없었는가에 대해서 반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져 질 수 없다 생각했는지 2011년에 이르러 드디어 등재가 시작되었다. 등재된 기록물은 야마모토 사쿠베에(山本作兵衛)의 기록물. 야마모토 사쿠베에는 20세기 초의 광부로, 세세한 그림과 함께 광부들의 일상을 치밀하게 기록했다. 사쿠베의 경우나 광주 민주화 운동이 등재된 것처럼, 꼭 옛 것이야만 등재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아래에 나오듯이 영화나 창작물도, 개인의 기록도 등재될 수 있다. 2013년에는 헤이안 시대의 세도 권력가였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일기인 『미도간파쿠키(御堂関白記)』[9]다테 마사무네유럽의 선교사를 통해 스페인 국왕과 로마 교황에게 파견한 사절과 관련된 문서들인 『케이쵸견구사절관계자료(慶長遣欧使節関係資料)』가 등재되었다. 2015년에도 2건이 새로 등재되어 총 5건이 되었다.

2013년일본에서는 카미카제와 관련한 자료 333점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기사 이 중에는 카미카제 특공대원들의 유서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스스로 반성하자는 의미라면 참 좋겠지만 2013년 현재 일본의 우경화 추세를 감안한다면 카미카제 기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해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피하기는 힘들다. 일단 2015년에 등재되는 것을 목표로 자료 수집 및 등재 신청 보고서 작성 등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국제회의로 넘어가기도 전에 유네스코 일본 위원회에서 부결시켰다. 일본 관점에서 기술된 자료밖에 없기 때문에 형평성이 없다는 것이 사유. 등재를 추진한 가고시마 측에선 2년뒤에 다시 도전하겠다고.기사 하지마 좀

2016년부터 일본 외무성세계기록유산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세계의 기억으로 공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10] 중국과 한국에서의 정치 이용이 문제시되고 있으며, 권위있는 세계 유산과 무형 문화 유산과의 혼동 방지를 노리고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난징대학살 기록 유산 등재 이후 이제와서 내부적으로 공식적으로 잘 써왔던 것에 대한 말을 바꾸는 것은 오히려 기록유산의 위상 깎아내리기와 정치성 띄우기 대한 의구심만 높아진 상황이다. 기사

3.3.1 목록

  • 야마모토 사쿠베에 컬렉션 697점 - 2011
  • 『미도칸파쿠키(御堂関白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원본 친필 일기 자필본 14권, 필사본 12권 - 2013
  • ‘게이초켄오시세쓰(慶長遣欧使節)’의 유럽 방문 관련 자료(일본·스페인 공동 등재) 3점 - 2013
1613년 일본 센다이(仙台) 번주가 스페인에 파견한 일본의 사절단. 7년 동안의 여행을 마친 사절단이 귀국할 때 일본에 가지고 온 3가지 물건, 즉 게이초켄오시세쓰를 이끌었던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六右衛門常長, 1570~1621)의 ‘로마시 공민증서’, ‘쓰네나가의 초상화’, ‘교황 바오로 5세의 초상화’ 3개와 스페인의 기록보관소 두 곳에 보관되어 있는 사절단과 관련된 94점의 문헌 자료이다. 게이초켄오시세쓰가 유럽으로 출발한 직후 일본에서 실시된 이른바 ‘쇄국(鎖國) 정책’ 때문에 이후에는 유사한 다른 사절단이 더 이상 파견되지 않았고, 이후 일본은 250년 동안 기독교를 금지했기 때문에 유럽에서 가져온 위의 세 점의 유물을 제외한 나머지 유럽 문화자료들은 모두 불타버렸다. 때문에 이 자료는 ‘대항해시대’ 동안 이루어진 동서양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 도지 하쿠고 분쇼(東寺百合文書) - 2015
일본의 국보로 나라 시대 부터 에도 시대 까지 1000여년간 교토의 도지에 모아놓은 2만 4천 67통, 약 8만 페이지[11]의 고문서. 원래 각종 다른 상자와 가방에 담겨져 있었으나 에도 시대 카가 번의 번주 마에다 쓰나노리(前田綱紀)가 1685년에 오동나무 상자 100합을 제작, 거기에 모두 정리 후 수납했다고 해서 백합문서라고 한다. 메이지 시대에 확인해보니 93합이 남아있었고 그 중 한 상자는 기록과는 달리 전나무 상자에 담겨져 있었다. 1886년 메이지 정부의 대일본편년사(大日本編年史) 편찬사업에 쓰인 후 방치되어 있다가 1900년대 후반 교토 부립 종합 자료관으로 옮겨지면서 다시 빛을 보았다. 이때 그 동안에도 소홀히 다루지 않고 관리해왔던 5000통의 문서를 중심으로 목록의 개작 및 정리 사업을 실시하여 1980년에 도지백합문서 목록 전 5권이 발간되었고 1997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내용은 도지의 영지였던 야마시로 국(山城国)의 上久世荘과 下久世荘, 와카사 국(若狭国)의 太良荘, 하리마 국(播磨国)의 矢野荘, 탄바 국(丹波国)의 大山荘, 히고 국(肥後国)의 鹿子木荘 등 여러 장원들의 경영에 대한 경내의 회의록이다. 일본 봉건 영주들의 대사원의 운영 실태를 보여주는 자료다.
  • 마이즈루(舞鶴, 교토에 있는 도시)로의 생환(舞鶴への生還) - 2015
관동군 시베리아 포로 기록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던 일본군 포로의 기록 570점 #, ##

3.4 기타 세계기록유산

4 등재 추진 중인 기록유산

4.1 한국

4.2 일본

  • 퉁저우 사건 자료 #, ##
  • 독일군 포로 수용소 자료 #, ##
  • 카미카제 유서 자료, '일본의 쉰들러' 외교관 스기하라 지우네(杉原千畝) 관련 자료, 한반도계 문화 유래 고대 비석 '고즈케산피(上野三碑) #

4.3 중국

5 관련 문서

  1. 일본에서는 세계의 기억이라는 직역해서 쓰기도 한다.
  2. 원본은 심사가 끝난 후 돌려주고, 사본은 유네스코에서 증거보존함. 팔만대장경같은 경우는 직접 들고 갔다가 오기에는 답이 없을 정도라 아예 유네스코 실사단이 한국에 상주하면서 심사를 했다.
  3. 해인사 장경판고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4. 다행이 그전에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도망가면서 자금성에 있던 각종 문화유산들을 싸그리 다 챙겨갔다. 챙겨가지 못했다면 그 유물들마저 아주 박살나버렸을것이다. 대만 고궁박물원은 매년 전시물이 교체되는데, 중복된 적이 한번도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을 챙겨갔다. 특히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만한 송, 원대의 고서 수백 종은 물론, 청대 공문서 38만 건이 고궁박물원 수장고에서 잠자고 있다. 대륙 입장에선 엄청나게 안습한 상황이다. 문자 그대로 핵심은 다 털렸거나 파괴당했고 찌꺼기만 남은게 현 중국 기록 및 문화유산의 상태. 물론 그러고도 중국 대륙에는 들고갈 수 없는 A급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역시 대륙의 기상.
  5. 예컨대 '황제내경'을 보더라도, 신화적 인물인 황제의 집필 참여(?) 여부는 따지지 않더라도 당나라 왕빙의 주석본 원본이 남았다든가 하는 것도 아니라, '실물 자료'적 가치는 거의 없다.
  6. 말이 좋아 바로잡는 거지 사실상 검열하겠다는 거다.
  7. 예를 들어 정사
  8. 물론 근대화이전 -에도시대까지- 의 이야기다
  9. 정작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평생 간파쿠(관백)에 오른 적이 없다. 이 제목은 후세에 붙여진 제목.
  10. 일본에서는 세계의 기억이라는 직역해서 쓰기도 한다.
  11. 통이란 대개 독립된 편지나 문서 또는 증서를 셀 때 쓰는 단위다. 2014년에 교토 부립 종합 자료관에서 24,067통의 문서를 모두 이미지화해서 웹으로 공개했는데 칼럼 형식의 해설문와 가타카나를 사용한 고문서를 읽는 방법 등을 첨가해 총 8만페이지가 나왔다. 1통당 대략 3페이지 내지 4페이지 짜리 문서다.
  12. 얼핏 보기에는 그냥 손만 많이 그려져 있는 바위에 불과하지만 선사시대의 미술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자원이다.
  13. 오스만제국 이전인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터키 이스탄불의 칸딜리 관측소에서 편찬한 지진, 자연재해, 천문현상, 점성술, 농사력 등 기상현상에 대해 기록한 581권 1339점의 문서들로 2001년에 등재되었으며 현재 이스탄불 보아지치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이 시대 이슬람 천문학과 과학기술에 대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