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카츠

오다 노부카츠라는 이름을 쓴 사람은 전국시대에 두 명이 존재한다.

1 織田信勝

1536?~1557
오다 노부히데의 삼남,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 자세한 것은 오다 노부유키 항목 참조.

2 織田信雄

1558~1630

2.1 생애

오다 노부나가의 2남. 형 오다 노부타다와는 어머니가 같다.

본래 이세 지역 키타바타케 가문[1]의 데릴사위로 입적하여 키타바타케 토모토요라 이름했고, 가독을 상속받은 후에는 키타바타케 노부오키라는 이름을 쓰며 오다 가문의 장수로 활동했다. 양조부 키타바타케 토모노리[2]를 포함해 기타바타케 가문의 유력자들을 모략을 써 몰살시켰으나 그럼에도 기타바타케 성을 유지해 왔다. 이후 이가 정벌을 감행했는데, 처참한 실패를 맛보아서 아버지인 노부나가가 격노한 나머지 '또 지면 연을 끊어버리겠다'라고 쓴 서찰을 보내기도 했다(...)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에는 키요스 회의에서 오다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후보에 올랐다가 결국 후보가 바뀐다. 혼노지의 변 당시 죽은 형 오다 노부타다의 아들인 조카 산보시(이후 이름은 오다 히데노부. 하시바 히데요시측 후보)가 자신 대신 후보에 올랐고, 결국 오다 노부타카(시바타 카츠이에측 후보)를 할복시키고 후계자로 지명된다. 한편 자신은 부친 생전에 받은 이세·이가 외에 오와리를 상속받아 약 100만석 규모의 영지를 할당받았다. 이후 이름을 오다 노부카츠[3]로 고쳐 오다 가문을 내세웠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해 히데요시에 대항하는 전선을 구축했으며, 1584년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유리한 전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단으로 히데요시측과 강화를 맺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투를 방해하는 크나큰 실책을 저지른다. 이에야스측은 히데요시와 싸울 유일한 명분이 오다 가문의 후계자를 자칭하는 노부카츠였기 때문에 그 노부카츠가 무단으로 강화를 선언하자 싸워볼만한 상황에서 싸울 수가 없어진 것이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 진 후 정면대결 대신 노부카츠만을 집중 공략한 것이 주요했다.

이런 실책들로 인해 결국 반 히데요시 세력은 히데요시를 막을 방법이 없어졌고, 노부카츠는 히데요시의 반 부하 상태로 전락해버렸다.
이후 1590년 히데요시에게 개긴 호조 우지마사와 호조 가문을 정벌한 오다와라 전투 후에는 구 호조 가문의 영지로 전봉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30만 석의 구 영지로의 전봉[4]을 명령받았지만 노부카츠는 고향인 오와리가 좋다고 거절 했고, 이것이 구실이 되어 모든 영지를 몰수당해 완전히 몰락하고 유배되어버렸다. 히데요시에게 반항해서 날려먹은 영지가 할아버지 때부터 피땀 흘려 얻은 오와리를 포함해서 100만석 규모다.... 밑에 쓰여진 루이스 프로이스 말대로 정말 지능이 모자른 놈인것 같다....

이 후로는 출가해서 오다 조신(常信)이라는 이름으로 개명. 유배지를 전전.
1592년 히데요시의 오토기슈[5]가 되어 야마토 국의 만 7천석을 받는다. 노(일본)가 특기였고, 다도에도 일가견이 있는 문화인이었다.
히데요시 사망 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서군 편을 들었다고 오해받고 전 영토를 몰수당한다.
1614년, 오사카 전투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요토미 측의 총대장으로 추대를 받았는데, 거절. 토쿠가와 측에 붙었다. 일설에 의하면 오사카 성의 정보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 공을 인정받아서, 5만 석의 영지를 수여받고 다이묘로 복귀. 오다 가문에서 유일하게 다이묘로 살아남은 인물이다.
이 후 쿄토에서 은거. 1630년 73살의 나이로 영면.
여담으로 일본 남성 스케이트 선수 오다 노부나리가 이 오다 노부카츠의 후손임을 주장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오다 노부나리 항목 참조.

2.2 평가

아직 충분히 불씨를 되살릴 만 했던 아버지의 위업[6]을 1대에 고스란히 말아먹었기 때문에 호부견자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을 정도로 그 평가는 극히 나쁘다. 조카, 동생을 질투해서 상속권을 다투는가 하면 힘이 막강한 중신을 셋이나 처형해버리거나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이길 수 있는 싸움을 갑자기 방기하고 무단으로 단독강화를 맺어버리는 등 거의 트롤링에 가까운 하드쓰로잉의 기록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아버지 노부나가의 위업 중 가장 찬란한 것이라고 평가받았던 아즈치 성아케치 미츠히데측이 접수했었는데, 야마자키 전투후 미츠히데군이 괴멸하자 성을 지키던 아케치 히데미츠가 불태우지 않고 조용히 철군하여 남아있었다. 문제는 노부카츠가 이걸 거저 접수해 놓고도 아무 이유도 없이 불태워버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 이 사건을 기록한 루이스 프로이스는 아예 매우 한심하다는 어조로 그가 "지능이 정상인보다 딸린다"라고 기록했다(...)

2.3 창작물에서

대망과 만화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역시 명불허전 하드쓰로잉을 보여준다. 아즈치 성을 불태워버리고 충성스런 중신들을 어이없이 의심해서 몰살하는가 하면,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곳을 버리고 뒤로 물러나버려서 명목상 동등한 위치에서 작전을 논의하는 동맹군인 이에야스가 사사건건 뒷목을 쥐게 만든다.

효게모노에서는 여드름투성이로 등장. 특별히 저능아로 나오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된 아즈치 성 소각 사건은 센노 리큐가 미츠히데가 성에 들어온 후 흰색으로 성을 칠한 것이 노부나가의 정신을 모독했다고 말한 데 설득당한 것으로 각색되었지만, 실제로는 극 설정상 히데요시와 결탁한 리큐가 노부나가의 취향대로 화려하게 지어진 아즈치 성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그리 한 것이었다.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이 게임의 제목인 주인공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능력치가 폐급이다.

f_4mb2.jpg
mp4_kitabatake.gif

슈팅게임 바사라 2에서는 키타바타케 노부카츠라는 이름으로 등장. 보스 직전에 등장하는 중간보스로 거대 철갑선을 몰고 나온다.

전국무쌍 4에서는 클론 무장으로 나와 무.가.치 등 아버지의 말을 따라하지만, 찌질한 톤으로 말을 해서 웃기면서도 한심한 모습을 모여주었다.
  1. 당시에는 세력이 줄었지만 무라카미 겐지의 후예이자 쿠게(公家)중 한 가문이었다. 노부나가가 아들을 데릴사위로 보낸것도 키타바타케 가문의 혈통과 명성을 노린 것.
  2. 츠카하라 보쿠덴의 제자로 뛰어난 검호이기도 했던 사람.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함께 보쿠덴의 비기 히토츠노타치를 물려받았다고 전해진다.
  3. 처음에는 信勝이라는 표기를 썼는데 묘하게도 아버지에게 모반을 일으켜 죽은 숙부와 같은 글자다. 후에 信雄으로 고친다.
  4. 영지 변경
  5. 이런저런 사항에 상담을 해 주면서 주변에서 주군을 보좌하는 역할이긴 하나 히데요시에겐 그저 잡답이나 나누는 말상대일 뿐. 히데요시는 아라키 무라시게, 아시카가 요시아키, 야마나 토요쿠니, 호소카와 아키모토 등 몰락한 무장 혹은 명문가 출신들을 모아 일종의 콜렉션을 만들어서 심심하면 불러서 차를 마시면서 잡담을 나눴다고(...)
  6. 가문 내에서 평가가 좋지 않았긴 하지만, 그 때문에 키요스 회의에서 밀려난 상황에서조차도 노부카츠의 영지는 100만석에 육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