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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면직(吳冕稙, 1894. 6. 15. ~ 1938. 5. 16.)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한인무정부주의자 상하이연맹을 조직하였고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군 특무대에서 비서로 활동하다가 맹혈단(猛血團)을 조직하는 등 상하이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2 초기 생애 및 활동
1894년 6월 15일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 양산학교 중학부를 중퇴하고, 경성측량강습소에 들어가 3개월 간 수학하였다. 그 후 측량기사 견습활동을 하다가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의 나이 25살 때의 일이다. 1920년에는 진남포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조선일보 안악지국 기자와 동아일보 안악지국 기자로서 활동하였다.
3 해외 망명
1921년 홍완기[1]라는 독립운동가가 황해도 은율에 잠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면직은 그를 찾아가 지원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 후 홍완기는 체포되고,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된 오면직은 인천과 신의주 등으로 도피생활을 하다가, 1921년 단동과 봉천을 거쳐 상해로 망명하게 되고, 김구를 만난다. 1922년에는 김구의 지시에 따라 임시정부 자금의 횡령 의혹을 받고 있던 김립을 암살하기도 한다. 1922년 10월 한국노병회가 결성되자 김구와 조상섭의 권유로 이에 가입하고, 한국노병회의 파견원으로 하난성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풍옥상이 경영하던 육군병공창 좌도부에 들어갔다. 이후 1929년 다시 상해로 돌아온다.
4 의열투쟁활동과 순국
상해로 돌아온 오면직은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점차 아나키즘을 수용하기 시작한다.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부 및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하며, 아나키스트들의 의열투쟁 활동에도 적극 참가한다.
1932년 4월 초에는 백정기, 이용준, 류자명 등과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에 폭탄 투척을 계획했으나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협의해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하게 됐다. 1933년에는 백정기, 원심창, 정화암, 이강훈 등과 함께 상해 육삼정 연회에 참석한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을 준비했다. 이 때 백정기와 이강훈이 암살을 실행하기로 하였지만 거사 직전 체포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1933년 5월에는 밀정 이종홍을, 7월에는 밀정 옥관빈을 사살한다.
1934년 12월 남경에서 조직된 한국독립특무대에서 대장 김구의 비서로 활동한다. 그러나 오면직은 1936년 1월 무렵 김구와 결별하고, 이후 그는 김동우와 함께 상하이로 가서 아나키스트들과 합류하였다. 1936년 2월에는 '맹혈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한다. 맹혈단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별동대로서,오면직은 재정부장으로서 그의 주요임무는 상하이에 살고 있는 한국인 자산가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일이었다. 오면직은 상하이에 있던 한국인 자산가들에게 자금을 제공해줄 것을 강요하다가, 3월 5일 중국 경찰을 앞세운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체포 과정에서 일본 경찰과 중국 경찰 수명이 부상당하였다.
이후 오면직은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과 수감생활을 했으며, 1938년 5월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