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源哲
1928 ~
1 소개
대한민국의 관료. 김정렴 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과 더불어 박정희 시대를 대표하는 '기술관료'(techno-crat). 그리고 한국 밀덕후들의 성인
2 일생
1928년 황해도에서 출생하여 광복되던 1945년 경성공업전문대학(현재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업과에 입학했다. 6.25 전쟁 기간에는 공군기술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했고, 1957년 소령으로 전역했다.
이후 최초의 국산 자동차인 시발 발음 주의 자동차에서 공장장으로 재직하다가 5.16 군사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회 조사과장으로 기용되었고, 1개월 후 상공부(현재의 통상자원부) 화학과장으로 옮겼다. 제3공화국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절부터 경제 정책의 실무 분야에서 활약했다.
그의 진가는 1972년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재직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건설 정책에서 핵심적 비중을 차지했던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의 건설 계획을 총괄적으로 입안, 추진하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율곡사업으로 명명된 각종 방위력 증강 계획, 번개사업으로 알려진 국산무기 개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 땅에 밀덕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충청남도 연기군의 '장기' 지구에 임시 행정수도를 건설하는 일명 '백지계획'을 작성하였고,[1] 신행정수도 건설기획단의 단장이 될 예정이었으나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2] 설상가상으로 새로이 집권한 신군부의 제5공화국로부터 부정축재자로 몰려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이후 12년 동안 자택에서 칩거해야만 했다.
이후 1992년 기아경제연구소 고문으로 활동했고, 다수의 저서와 언론 기고를 통해 박정희 시대 경제건설과 방위산업, 자주국방 정책에 대한 비화들을 알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저작들은 오늘날까지 박정희 시대의 연구에서 유용한 참고 자료로 인용되고 있다.
"한국형 경제모델"이라는 이름의 홈페이지에서도 관련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다. 2012년 이후 업데이트가 안되고 있는 것이 흠이지만, 그의 저서를 읽어볼 시간이 없는 경우 가볍게 살펴보기에는 적합할 듯.
본 항목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과학과 기술> 2009년 11월호의 내용에서 대부분을 인용했음을 밝힘
3 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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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ㅏ, 청와대요. 안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