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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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현직 권력자가 암살당한 사상 초유의 사건.[1]

1979년 10월 26일[2] 저녁 7시 40분경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3]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박정희차지철 경호실장 등을 암살한 사건이다. 교과서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표현은 "10.26 사태".

1972년에 시작된 유신체제는 경제적으로 70년대 후반 누적된 성장 드라이브 정책의 후유증과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1인 장기집권에 의한 강압통치,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불화 등, 정치 및 경제적 모순이 반정부 시위로 폭발하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나자,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이 부마민주항쟁의 처리문제로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의 만찬 도중 중앙정보부김재규는, 박정희와 경호 실장 차지철발터 PPK 권총으로 저격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네 가지 설이 있다.

  • 대통령경호실장인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상호견제와 권력투쟁이 극에 달했고, 이러한 암투 속에서 결국 자신이 밀릴 것을 예감한 김재규가 10.26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주변 인물들로부터 나오는 주장이다. 과거 그의 제자였던 이만섭의 관련 증언을 비롯한 증언이 있다. [#1], [#2] 김종필 역시도 차지철과 김재규의 갈등이 10.26 사태의 발단이었으며, 법정에서 김재규가 민주화투사로 둔갑되었다라고 주장했다. [#3] 또한 10.26 사태 직전 김재규는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대위밖에 안 지낸 자식이 장군, 장관 알기를 우습게 여겨! 내가 하는 일을 모조리 사사건건 방해하며 각하께 바르게 보고하지도 않고…” 하고 말했다."라고 하기도 했다. [#4]
  • 박정희가 민주화 세력에 대한 대응책에 대하여 경호 실장 차지철이 내세우던 강경노선 쪽으로 손을 들어 주었고, 이에 기가 산 차지철은 박정희 경호라는 임무를 넘어서서 중앙정보부의 영역까지 손을 대려고 하는 월권행위를 일삼았다. 이에 박정희 측근들이 종종 차지철의 월권을 경계하는 충언을 했지만, 그때마다 박정희는 "차지철이 국회의원을 해 봐서 정치를 잘 안다." 라고 오히려 두둔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입지가 좁아지고 국가 규모의 큰 혼란이 올것을 우려했던 김재규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설
  • 미국의 음모라는 설
  • 김재규가 순간적인 분노를 못 이겨 충동적으로 저지른 우발적 살인이라는 설

당시 김재규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부마항쟁을 전국의 대도시로 뻗어나갈 가능성이 높은 민란으로 파악하여 박정희에게 보고했지만, 박정희와 차지철은 북한 간첩의 개입 내지는 김영삼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불순한 사건으로 호도하고 대형 학살을 예고하는 언행을 했다는 것이다. 김재규의 주장에 따르면 이 때 차지철의 말이 후덜덜하다. 캄보디아는 킬링필드라면서 3백만을 죽였는데, 우리야 1~2백만 죽인다고 해서 뭔 일 있겠습니까?라고..[4] 즉, 부마민주항쟁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될 경우, 군부대를 동원하여 강경진압에 의한 유혈사태가 터질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5] 이러한 주장이 김재규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김재규 역시도 10.26 이후 전국비상계엄령확대를 서둘렀기 때문.[#] 1980년 초 서울의 봄 당시 민주세력들이 "계엄령 해제"를 강력히 요구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김재규가 서둘렀던 계엄령 또한 저항에 직면할 것은 뻔한 일이다.[6] 더욱이 민주공화당 조차도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0.26 직후 김종필민주공화당의 총재로 추대되었는데, JP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던 시절, 청구동 가택수색과 협박까지 당한터라 김재규에게 호의적이기도 어려웠다. [#] 거기다 10.26 이후 JPYS, DJ과 함께 개헌과 민주회복 이행에 공감하고 협조해나갔던 행보로 미루어보았을 때, 김재규의 구상에 따랐을지도 의문이 존재한다. [#1], [#2] 무엇보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한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는데 실패했다면 민주공화당이 김재규를 인정하기는 커녕 그야말로 단죄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실제로 그러했다.

김재규의 주장을 호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김재규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하지만, 어디까지나 김재규는 국가원수를 암살하고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을 기도한 인물인데 그 발언의 사실여부는 물론 그 진정성을 어떻게 믿느냐하는 반론도 존재한다.

법정 진술에서 김재규는 민주화를 언급했으며, 1979년 "자유민주주의"[#]라는 서예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김재규가 그 이전까지 박정희와 그 정권에게 충성적이었던 면모와는 반대되는 행보이기에 실제로 그의 발언이 사실인지 여부는 불명확하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라고 썼다고 민주주의자라고 하는건 너무나도 순진무구한 발상이기도 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북한의 정식명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김재규가 민주화 운동 자체를 지지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민주화 세력에 대해 온건한 대응을 검토하는 수준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부마민주항쟁 항목 참조)

더욱이 김재규가 강경파인 차지철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비칠 따름이지, 그 역시도 어디까지나 독재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수행했고 민주주의와 민주화운동과 동떨어진 인물이어서 뭇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다. [7]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10.26 사건 현장에 있었고 당시 권력의 내막을 알고 있는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은 평소 김재규의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은 강했다고 주장한다. [출처] 또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김학호와 운전담당 사무관 유석문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에 박정희에 대한 김재규의 충성심은 의심받지 않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출처]

그리고 김재규는 10.26사태 이후 전국으로 비상계엄령확대를 서둘렀고[출처], 1980년 신군부가 추진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5.18 민주화운동을 촉발시켰던 것처럼, 전국으로의 계엄령 확대는 전국적인 저항으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 따르면 김재규는 군지휘관들을 중심으로 입법, 사법, 행정권을 총괄하는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육군참모총장이 부위원장을 맡은뒤 계엄군을 장악하여 무력으로 사태를 강제로 정리하고, 정권을 장악할 계획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출처1], [출처2]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유신 정권의 일원들은 물론 신민당과 민주화 세력들 또한 김재규의 계획에 동의했을지도 의문이다. 김영삼이나 김대중 등 야당이 과연 김재규의 계획대로 고분고분 따라주었을지는 대단히 의문점이 크다. 당시 민주계 인사들이나 야당 인사들 역시도 김재규를 비호하거나 두둔한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박정희 암살 사실을 숨기려고 했고, 과연 이런 방식의 권력장악이 국민적 동의를 얻을 수 있었을지 또한 의문이다. 어쨋거나 박정희 사망 이후 국민들의 박정희에 대한 동정과 추모 분위기 등을 감안해본다면 김재규가 암살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지 않는 한 저항에 직면했을 공산이 크다.

어떤 이는 박정희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김재규가 일본 해군 비행연습생 출신임을 들어 종전 30여년만에 재현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의 산물이란 드립을 치기도 했다(...).

아무튼 이 10.26 사건으로 말미암아 유신체제가 붕괴되는 교두보였으며, 한편으로 군부의 사조직 하나회 세력을 업은 전두환 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는 평가가 있는 있다. 또한 이미 김재규 한 개인의 행위로 인해 유신체제가 붕괴된 것은 단견이며 유신체제는 내부권력의 모순과 사회구조적으로 붕괴의 전조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김재규 한 개인의 행위는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는 흐름과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 있다. [출처]

이 사건에 대한 김재규의 전반적인 입장표명은 김재규/항소이유 보충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2 전말

2.1 사건 직전

1979년 10월 26일 아침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26일 아침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전화를 건다. 이날 박정희는 충청남도 당진군(2016년 기준 당진시)에서 열린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완공식에 참석할 계획이었는데, 이 중 당진송신소는 대북방송 송신 기능 때문에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던 건물이었고 중앙정보부의 수장인 자신도 박정희와 같이 완공식(삽교천 포함)에 참석하려고 전화를 건 것이었다. 하지만 차지철은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 중정부장까지 자리를 비우면 어쩔 것이오? 김 부장은 그냥 서울이나 잘 지키고 있으시오"라며 단칼에 끊어버렸다. 그리고 이것이 안 그래도 차지철과의 사이가 최악이었던 김재규를 분노하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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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삽교천에서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와 차지철은 일정대로 삽교천과 당진송신소 완공식에 참석한 뒤 오후 2시 반경에 청와대로 돌아온다. 그리고 오후 4시 경, 박정희는 차지철에게 저녁에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경호실장 등과 젊은 여자들이 참석하는 연회 즉 대행사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통해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줄여서 안가) 측에 대행사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청와대 경호실로부터 대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퇴역 해군 보병대령[8] 박선호는 주방에 연회를 준비하라고 지시한 후 대행사를 도울 여성을 섭외[9]했고, 이 날 섭외된 여성은 당 모델 겸 배우[10]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이었다.

오후 4시 10분 쯤 차지철은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오늘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라고 연락했고, 김재규는 궁정동에 도착한 후 안전가옥 집무실에서 오후 4시 40분 육군참모총장육군대장 정승화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궁정동에서 저녁이나 하면서 조용히 시국 얘기 좀 나누자"며 그를 초대한 뒤, 중정 제2차장보(국내담당) 김정섭을 저녁 6시 30분까지 궁정동 안가로 오도록 했다. 이날 저녁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가 대행사에 호출되었다는 핑계로 연회장 옆의 본관 식당에서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을 같이 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11]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놓았다. 김재규의 살의(殺意)는 이때부터 발동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대통령비서실 실장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김계원의 군 선배인 최영희가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언제 각하가 부르실 지 모르니 (저녁)5시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는데,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이러니 약속을 못합니다" 라며 쓴웃음을 짓고 최영희의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

오후 5시 20분, 비서실장 김계원이 궁정동에 도착했다. 거기서 김재규와 김계원은 안가 앞마당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부마항쟁 때 부산에서 직접 확인한 민심을 얘기하며 "부마항쟁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이다."라고 강하게 부르짖었다. 그리고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차지철이 부마항쟁을 신민당이 개입한 일부 불온세력의 주도로 벌어진 사건이라 호도했기 때문이라고 그를 심하게 비난하며 "이 자식(차지철) 오늘 해치워 버릴까요?" 라는 등 격한 반응을 보였다. 평소 김재규를 친동생처럼 아끼던 김계원은 "나도 중정부장을 해봐서 알지만 김부장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내일 민정수석의 보고 때 차지철의 월권에 대해 각하께 보고하도록 하겠다" 면서 김재규를 달랬다.

  • 김재규와 김계원이 친밀한 관계가 된 사연은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재규가 당시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재직할 때 신임 총장으로 김계원이 취임했고, 그 무렵 마산 시내에서 회식 후에 부대로 복귀하다 김재규의 지프가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김계원은 벼랑 밑에서 중상을 입은 김재규를 직접 업고 올라와 병원으로 후송시켰고, 이 일을 계기로 둘은 호형호제 하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이후 김계원이 예편 후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있다가 잘리고 수 년간 대만 대사로 재직한 후 귀국하여 10대 총선에 출마하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포기하자, 김재규가 그를 김정렴의 후임 비서실장으로 천거했다고 한다. 이 때 김계원은 박정희에게 "저는 (비서)실장 그릇이 못됩니다" 라고 사양할 의사를 보였지만 박정희는 "실장 일은 안해도 돼. 나랑 말동무나 해 주면 좋겠네" 라고 했다 한다. 그만큼 집권 말기의 박정희는 판단력이 흐려져 있었다는 점을 시사할 만한 일화인 것이다.

비슷한 시각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였던 육군 포병대령 박흥주무좀 때문에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어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다고 전해진다(이 구두는 그날 밤 대통령 암살 및 정권 장악 기도라고 하는 쿠데타 이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게 된다.).

저녁 6시경, 박정희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김재규가 맞이하여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운명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이 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이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으로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하였다. 연회 당시 술 이외의 만찬 메뉴는 에 재운 인삼송이버섯 구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도라지나물, 전, 생채, 편육 등으로 의외로 평범했지만 한 상에 30접시 정도가 놓인 호화상이었다. 또한, 이 때 유명해졌던 술로 당시 박정희가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이 (재현 사진에 나와 있다) 놓여있었다.

  • 고건국무총리와 이필재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편집위원은 박정희가 평소 고급 위스키로얄 샬루트도 즐겨 마셨다고 하며, 김연광 조선일보 편집장이 전한 고건 전 총리의 회고록 중에는 박정희는 그 로얄 살루트를 아껴 먹었다는 내용도 있다.
『그날은 朴대통령께서 경호원을 부르더니 「내 침대 머리맡에 양주가 한 병 있는데 가지고 오라」고 해요.
경호원이 가져왔는데 바로 이 「로얄 살루트」야. 朴대통령이 혼자 좋은 술을 마셨다는 게 쑥스러우셨는지 「朴浚圭(박준규·당시 공화당 당의장 서리)가 미국 갔다 오면서 한 병 선물로 사왔어. 잠 안 올 때 한 잔씩 아껴먹었어.」라고 해요.
병을 들어보니 3분의 2쯤이 남아 있었어요. 그 자리에 10명 쯤이 있었는데 한 잔씩 돌았어요.
처음 먹어봤는데 술 맛이 기가 막혀. 다들 「한 잔은 더 마실 수 있겠구나」 군침을 삼켰어요.
그런데 金桂元(김계원) 비서실장이 「각하, 남은 술은 침실에 갖다 두겠습니다」하고, 술병을 빼앗아 경호원에게 건네줬어요.
朴대통령이 「어이」 하고 경호원을 한 번 부르기만 하고, 「술병 여기에 놔둬라」는 말씀을 안 하시는 거야.
얼마나 야속하던지 말이야(웃음). [#]
  • 당시 안가의 요리사였던 이정오는 이날 식사로 비빔밥, 떡만둣국, 칼국수를, 술안주로 잡곡무침, 전복무침, 송이버섯 구이, 장어구이, 불갈비를 준비했고 술은 막걸리위스키 등이 나왔으며 요리 재료는 당일 오후 5시경 중정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과 안가 경비원 방석상, 이광철이 동대문시장 등을 돌며 약 6만원 어치를 구입해 왔다고 진술했다. 막걸리는 박정희 전용 양조장으로 알려진 고양시 능곡 양조장에서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이 평상시처럼 공수해왔지만 그날 사온 막걸리는 김용남과 경호관 김용섭이 나눠 마셨다고 한다.
  • 덧붙여 안가 요리사이던 김일선은 "(박정희는) 콩나물밥을 좋아했고 대가리 뗀 멸치참기름에 볶은 것을 술안주로 즐겨먹었다"라고 회상하였다. (출처: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5년 5월 29일 (일) / 제 96 회, 10.26 궁정동 사람들 참고).
  • 당시 언론에서 말했던 사치스러웠던 연회장은 아직 개장을 하지 못했던 연회장으로 실제 연회와 암살이 벌어진 나관의 시설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창 연회가 진행되는 와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신민당 공작(김영삼을 총재직에서 몰아내고 정운갑을 총재 대행으로 올리려던 정보부의 공작) 어떻게 되었는가" 라고 묻자 김재규는 "당직에서 사표 내겠다던 의원들이 강경하게 돌아서는 바람에 다 틀렸다."라고 답했다. 이에 박정희는 부마항쟁과 김영삼 제명건을 들먹이며 "김영삼을 구속시켜야 했다." 라고 강한 어조로 몰아붙였고 김재규가 "이미 제명당한 김영삼을 구속시키는 건 그를 두 번 죽이는 셈입니다.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셔야지요." 라면서 진언하자 짜증이 난 박정희는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야당 놈들 비리만 쥐고 있으면 다가 아니다. 잡아 들일 놈들은 확실히 잡아 들여야지..." 라며 김재규를 심하게 질책했다. 게다가 옆에서 차지철은 "야당 놈들 중 국회의원 하기 싫은 놈 하나도 없다. 까불면 학생이고 신민당이고 전부 탱크로 싹 깔아뭉개야 한다." 며 맞장구를 치고 혼잣말로 "요새 정보부는 부마사태 처리도 그렇고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비아냥거리면서 김재규를 계속 코너로 몰고 갔다. 이런 살벌한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김계원 비서실장이 김재규에게 위스키칵테일 만드는 방법을 묻기도 하고 오늘 삽교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는 등 화제를 전환하려 했지만 상황을 진전시키기에는 소용이 없었다.

저녁 6시 30분 쯤 신재순과 심수봉이 연회장에 들어오면서 이런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졌지만, 이미 뚜껑이 열린 김재규는 연회장을 나와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식사 중이던 정승화 장군에게 가서 "갑자기 박정희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다. 김 차장보가 국내 정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와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시라. 끝나는 대로 곧 오겠다." 라며 해명을 한 후, 집무실 책장에 숨겨놓은 자신의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김재규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궁정동 안전가옥 마당으로 불러내어 아래와 같이 명령을 내렸다.

김재규: (호주머니의 권총을 보이며)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일이 잘못되면 자네들이나 나나 죽은 목숨이다. 오늘 저녁, 내가(차지철을) 해치우겠다.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들을 처치하라. 지금 본관에 육군 참모총장과 2차장보도 와 있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박선호: 부장님, 각하도 포함됩니까?
김재규: 그래.
박선호: 오늘은 경호원이 일곱 명이나 와 있고 날이 좋지 않습니다. 다른 날을 고르시지요.
김재규: 안 돼, 오늘 해치우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된다. 똑똑한 녀석 세 놈만 골라 나를 지원하라. 다 해치워 버려. 믿을 만한 놈 세 놈 있겠지.
박선호: 예,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장님 30분만 여유를 주십시오.
김재규: 30분은 너무 길다.
박선호: 30분이 필요합니다. 30분 전에는 절대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김재규: 알았다.

그리고 김재규는 박흥주 대령을 향해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라고 중얼거리고는 권총이 든 호주머니를 탁 치면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 대령은 처음엔 크게 놀랐지만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고,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12]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을 암살 조에 합류시켰다.[13]

현장에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은 안가 나동 주방 근처에 세워둔 승용차 내부에 숨어서 연회장에서 총소리가 나길 기다렸다. 한편 박선호는 안가 경호원 대기실에 있던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과 부처장 안재송을 처치할 준비를 했지만, 사실 박선호는 이 둘을 사살하기 보다는 잘 설득하여 어떻게든 죽이지 않고 살려볼 속셈이었다. 정인형은 해병장교 동기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안재송 또한 해병대 후배였으니...

같은 시각 궁정동 안전가옥에는 정인형과 안재송 외의 차지철의 청와대 경호실 소속 수행원으로 김용태 특수차량 운행계장,[14] 박상범 경호계장, 김용섭 경호관이 있었다. 이들은 평소의 관례대로 박정희 경호는 중정 경비원들에게 맡긴 채 나동 주방에서 안가 직원들과 같이 맥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고, 정인형과 안재송은 경호원 대기실에서 별도로 저녁식사를 한 후 AFKN TV 방송을 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 당시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행사가 있으면 박정희 경호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안전가옥 경비원들이 담당하고 청와대 경호원들은 별도 장소에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15] 청와대 경호실 내에서 경호원들이 사실상 무장해제 당하는 안전가옥의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고 이런 안전가옥의 특성이 박정희의 암살을 초래한 한 요인일 수도 있겠다.

2.2 총격

저녁 7시 38분경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재규는, 7시 40분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발터 PPK를 꺼내어 차지철을 향해 이 말을 외치며 제 1발을 발사했다.

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

김재규의 제 1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시켰고, 갑자기 저격당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김 부장, 왜 이래!" 라고 외쳤다. 박정희가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 라며 일갈하자, 김재규는 3~4초쯤 후 엉거주춤 일어선 상태로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에 제 2발을 발사했다. 뒤이어 당황하는 차지철에게 김재규는 제3발을 쏘려 했으나 발터 PPK가 격발 불량을 일으켜 발사되지 않자 밖으로 뛰어나갔고 차지철은 화장실로 피신해 버렸다. 그리고 우측 흉부 관통상을 입은 박정희는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정좌하고 있다가 신재순이 "각하! 괜찮으십니까?" 라며 부축하려 하자, 박정희는 "난 괜찮아..." 라고 중얼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 김재규가 총을 쏘기 직전에 한 발언으로는 두 가지 설이 존재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발언과 2000년대 까지 다수설인 김계원에게 "각하를 똑바로 모시라." 라고 충고한 후 박정희에게 "각하, 차지철 저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라면서 발사했다는 것인데 이 발언은 신재순의 진술에 의거한 것인데 신재순의 버러지 발언은 합동 수사본부 측의 강권으로 거짓 증언한 것임이 최근에 밝혀졌다. ([중앙일보 기사]) 버러지 발언은 김재규의 암살이 정치적 목적이였음을 강조하여 내란죄 적용을 위해서(즉 우발적이거나 개인적 원한에 의한 단순살인이 아니였음을 강조하려고)로 추정된다. 때문에 의자매까지 맺으며 친밀했던 신재순심수봉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김재규의 총소리를 신호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 일행은 주방으로 달려가 식사 중이던 김용태 경호실 운행계장과 김용섭 경호관을 사살했고 그 과정에서 요리사 이정오는 허리에,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은 어깨에 총을 맞는 부상을 입었다. 그 난리 중에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계장 박상범은 허벅지 관통상만 입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총을 맞고 쓰러질 때 주방 조리대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완전히 의식불명이 되어 죽은 것으로 오인되었고, 안가 경비원인 김태원의 확인 사살시 박상범 옆에 안가 직원 김용남이 부상을 입고 누워있어 사격을 포기한 행운도 따랐다.

그리고 박선호는 경호원 대기실에서 마른안주를 먹으며 TV 방송을 보고 있던 정인형과 안재송과 같이 있었는데, 김재규의 총소리를 듣고 정인형과 안재송이 뛰어나가려 하는 것을 박선호가 권총으로 제지하며 "움직이지 마라, 제발 우리 같이 살자!"라고 애원했지만 안재송이 총을 뽑으려 했고,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박선호는 안재송을 사살한 데 이어서 친구인 정인형도 살해하고 말았다.

여담으로 박선호가 경호원들을 사살하자마자 안전가옥 나동 전체의 조명이 나갔는데, 지하 보일러실에서 신문을 읽던 보일러공 강무홍이 총성을 전기 합선으로 착각하고[16] 차단기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밖에서 계속 이어지는 총소리와 고함소리에 합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강무홍은 다시 차단기를 올린 후 보일러실 문을 잠근 채 몸을 숨겼다고 한다. 만약 불이 조금 일찍 꺼졌더라면 박선호는 오히려 정인형과 안재송에게 역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한편 총기고장 때문에 밖으로 나간 김재규는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치하고 나온 박선호의 M36 치프 스페셜[17]리볼버를 넘겨받아 연회장으로 돌아왔고, 화장실에서 나와 경호원을 찾던 차지철은 김재규와 맞닥뜨리자 문 옆의 문갑을 치켜들고 거세게 저항했으나, 김재규는 차지철의 복부에 총을 발사하여 치명상을 입혔다. 차지철을 거꾸러뜨린 김재규는 쓰러져 있는 박정희에게 우측 관자를 향하여 마지막 탄을 발사했고, 이 총알로 인해 박정희는 사망한다.

2.3 후속 조치

10.26 사건은 계획적이라고 보기에는 우발적이었고, 준비가 엉성했다고 보기에는 치밀했다.
ㅡ백동림, 당시 합동수사본부 수사 1국장
박정희 암살을 벌인 김재규는 복도에서 공포에 떨고 있던 김계원에게 "나는 한다면 한다.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해주시오." 라고 언질한 후, 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먹고 있던 정승화 총장을 차에 태워 김정섭 차장보와 같이 안가를 빠져 나왔다. 김재규와 정승화, 박흥주, 그리고 운전사 유석문까지 4명이 탄 차 안에서 김재규는 "각하가 돌아가셨다"며 엄지손가락을 밑으로 내리는 제스쳐를 취했고[18], 정승화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이내 안정을 찾고 남산의 중정으로 갈지 용산 육군본부[19]로 갈지 우왕좌왕 하던 김재규에게 병력동원 차원에서 육군본부로 가는 것이 좋다고 권유했다. 이 의견에 박흥주도 찬성했고 김재규는 정승화의 의견을 받아들여 육본으로 차를 돌렸다.

그러나 이날 김재규의 판단은 최대 최악의 실책이었다고 아직도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자신의 거점인 중앙정보부로 가서 사건 수습과 뒷공작을 하는 것이 김재규로서는 최선책이었다. 차지철과 박정희가 죽고 없는 시점에서 제 3의 실권자인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에게 대놓고 반대할 인사도 없고 박정희 암살사건에 간첩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대공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정보부가 조사를 전담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우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차지철이 박정희를 쐈기 때문에 내가 차지철을 사살했다.'고 둘러대는 것도 가능했다. 사건의 목격자 중 생존자라고 해봐야 김재규 자신의 정보부 요원들을 제외하면[20] 김계원과 신재순, 심수봉이 고작인데 김계원은 명목상 비서실장이긴 하지만 권력 싸움에선 김재규에게 한참 밀렸고 신재순과 심수봉은 일개 대학생 내지는 가수인지라 입막음 하는 것 정도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특히 당시에는 죽은 차지철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더라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상황이었다. 차지철 문서에도 나오듯이 차지철은 평소 심각한 월권 행위에 박정희를 제외한 고위층, 심지어 김계원이나 김재규를 비롯한 장성 출신들에 대해 오만 불손한 태도를 일삼았고, 권력 문제에도 마구 개입하며 김재규 뿐 아니라 차지철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실례로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수상이 방한하여 박정희와 일부 고위 인사들과 함께 골프를 치러 갔는데, 라운딩이 끝난 후 백두진 유신정우회 의장이 먼저 클럽 하우스의 샤워실로 들어간 뒤 시간이 지체되자 차지철이 샤워실 문을 두들기며 "왜 이렇게 늦는 거요. 각하 기다리시는데 빨리 나오시오. 이 늙은이가 뭘 이리 우물대는가. 늙으면 빨리 죽어야지..." 라며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김재규에게 박정희가 죽었다는 얘기를 접한 정승화는 처음엔 차지철이 암살한 것으로 생각했고, 그가 청와대 경호실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까지 시도한다고 생각하여 당시 수경사령관인 전성각 육군 소장에게 명령을 내려 수경사 병력을 장악하고 청와대를 원거리에서 포위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출처: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21] 그리고 이날 긴급 소집령을 받고 육군본부로 온 김치열 법무장관의 경우, 박정희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차지철)그 놈의 새끼가 기고만장하며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 라며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분통을 터뜨렸고, 대부분의 고위급 인사들도 김 법무장관과 같은 인식을 가질 정도였다. 정부 고위 인사들의 차지철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즉 김재규가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차지철에게 대통령 암살 혐의를 뒤집어 씌울 명분이 있다 못해 넘치는 상황이었다. 차지철이 평범한 인물이어도 중앙정보부의 공작 능력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이렇게 평소 명분을 알아서 쌓아줬으니......

이처럼 김재규는 사건을 조작할 만한 능력도, 명분도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생각에서 인지 자신의 본거지인 중앙정보부도, 간첩사건 등으로 인맥이 있었을 법한 검찰청이나 치안본부도 아닌, 자신과 가장 연관성이 없고 어쩌면 자신의 라이벌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육군본부로 향했다. 김재규 본인도 군 장성 출신이지만 중앙정보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군부와의 인맥은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니었고, 평소 박정희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군부가 섣불리 김재규를 지지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동승했던 정승화 총장은 훗날 하나회 반란군이 김재규와의 연관 점을 찾을 수가 없어서 내란죄가 아니라 내란방조죄라는 이상한 법으로 겨우 엮을 정도로(물론 민주화 이후에는 무죄로 판결) 김재규나 적어도 이번 암살사건과는 연관이 적은 사람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가 육본으로 간 것은 '나 잡아잡수' 하고 맨몸으로 호랑이 굴에 뛰어든 셈이었다.

이 때문에 김진명의 소설 '한반도'(이후 10.26으로 개작)처럼 수많은 음모론을 낳았고 반대로 김재규가 박정희 암살이 치밀히 계획된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일을 저질렀다는 주장도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당시 김재규가 매우 당황하고 행동을 서두른 증거 중의 하나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정승화가 있던 안가 본관으로 뛰어가면서 구두도 제대로 못 신었고, 이 때문에 김재규는 육본에 도착해서 박흥주 대령의 구두를 빌려 신어야 했다. 박흥주는 김재규에게 구두를 빌려준 후 운전수 유석문의 구두를 빌려 신었다.

김재규와 정승화가 육군본부 정문에 도착했을 때 해프닝이 하나 있었는데, 정승화 장군이 자신이 (육군참모)총장이라고 밝히자 육본 위병소의 헌병은 "총장님? 어느 대학 총장님이십니까?" 하며 정승화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게 당시 정승화는 옷차림이 군복이 아닌 사복 정장이었고, 타고 온 차도 자신의 관용차량이 아니라 김재규의 차였다. 이후 다른 장교가 정승화의 신분을 알아채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박정희 암살 사건이라는 중대한 상황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어서 10.26을 다루는 매체에선 이 에피소드 또한 넣는 편. 이 에피소드는 정승화의 회고록에도 나오는 실제 이야기이다.

육본 대회의실에서 열린 긴급 국무회의에서 김재규는 박정희가 죽었다는 사실은 숨기고 "각하가 지금 유고 상태이다. 이 사실을 최소 48시간 동안 보안에 붙이고 빨리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 김일성이 알면 큰일난다."라고 길길이 뛰었지만, 법무장관 김치열이 "이런 중대한 사태를 이유 없이 48시간이나 보안으로 숨길 수 없다. 미국에도 이 사실은 알려야 한다."며 반박했고, 뒤늦게 육본에 도착한 고향 선배인 부총리 신현확이 "밑도 끝도 없이 계엄령이 말이 되느냐. 어떻게 된 일인지 전말을 밝히라!"며 버럭 하는 통에 김재규는 깨갱한 채 버로우 해버렸다. 박정희의 면전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던 강직한 성격의 신현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현확이 육본에 도착하기 전, 다른 장관들은 김재규의 기세에 밀려 전전긍긍 하고 있던 상태였다.

한편, 박정희는 이미 사망한 상태로 김계원에 의해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실려 갔고, 당직 군의관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대통령 주치의인 병원장이던 공군 군의준장 김병수 장군이 시체를 검안하는 과정에서 하복부의 피부병 자국[22]에 의해 시체가 바로 박정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운전사 유성옥과 안가 경비원 서영준이 총으로 위협하는 와중에 보안사 참모장인 육군 준장 우국일 장군의 전화를 받은 김병수 장군은 아래와 같이 대통령이 죽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우국일: 지금 그쪽 상황이 많이 곤란하지요? 대략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으니 제 질문에 예, 아니오 로만 답하시오.
김병수: 예.
우국일: 죽었습니까?
김병수: 예.
우국일: (경호)실장입니까?
김병수: 아니, 그런 거 없습니다(옆의 경비원을 의식하여 일부러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국일: 코드 원 입니까?
김병수: 예.
우국일: ...알겠소,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이에 박정희가 죽었다는 사실을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가장 먼저 포착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김재규는 박정희를 누가 죽였는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정승화 장군이나 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 대부분이 위에서 언급 하였듯이 범인을 차지철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암살과정과 국군서울지구병원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지켜본 김계원이 육본에 와서 김재규가 범인이란 사실을 정승화 장군에게 알렸고, 정승화 장군의 명령을 받은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은 보안처 2과장(군사정보과장) 오일랑 보병 중령으로 하여금 김재규를 체포시키고 동행자였던 박흥주 대령까지 도주하면서 쿠데타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더불어 박선호와 박흥주대령을 위시한 암살조도 그 다음 날 전부 체포되어 김재규와 함께 보안사 분실로 연행되었다.

서빙고의 보안사 분실로 끌려온 김재규를 처음엔 군과의 밀약을 통한 쿠데타 시도일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수사관들이 쉽사리 심문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전직 보안사령관으로서의 전관예우로 다들 "부장님 부장님" 하며 쩔쩔맸다고 한다. 김재규를 체포하여 호송해 온 육군 헌병수사관 신동기 준위도 한 달 전 중앙정보부 부설 정보학교에서 6개월 과정 정보교육 수료 시 성적 우수자로 부장인 김재규에게 직접 표창을 받았고, 김재규를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 분실로 호송하는 과정에서 정도 들었는지라,[23] 김재규를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박정희 사살이 김재규의 단독범행 임이 밝혀지면서 안면몰수 하고 강력하게 수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은 신동기 준위는 김재규에 대해 바로 폭행과 고문을 동반한 심문에 돌입했다.

심문 도중 김재규는 신동기 준위의 주먹에 맞아 눈 밑에 피멍이 들기도 했는데 위 현장검증 사진을 보면 김재규의 오른쪽 눈 밑에 거무스름한 상처가 눈에 띈다. 그러므로 당시 김재규의 수사를 담당했던 이학봉 육군 보병대령이 "김재규를 고문하지 않았다"라고 한 증언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재규의 탄원서에 의하면 군용 전화기 전선을 발가락에 묶어 전화기를 돌리는 전기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이 때 지병인 간경변으로 인해 간 기능이 거의 마비된 김재규는 고문으로 인한 내출혈이 멎지 않으며 초죽음이 되었고, 당황한 신동기 준위의 보고를 받은 전두환이 일단 고문을 중단시키고 김병수 장군을 불러 김재규에게 응급치료를 하게 하였다.

여담으로 10.26 사건으로 압송된 김재규가 수사를 당한 곳은 보안서 서빙고 분실이었는데, 이곳은 김재규 자신이 보안사령관 시절 만든 곳이었다.

2.4 결과

이 사건의 전말은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된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수사 보고에 의해 10월 28일 세간에 알려졌다. 그 후 재판을 통해 주모자인 김재규, 그리고 암살에 참여한 박선호와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안가 경비원으로 이날 피해자들에게 M16 소총으로 확인사살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 전원과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에게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가 떨어졌고(80도306), 1980년 5월 24일 이전에 총살된 박흥주[24]와 감형된 김계원[25]을 제외한 5명은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국내외에서 김재규의 구명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으나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김재규의 말대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총탄은 철옹성 같던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의 공백기를 잽싸게 파고든 자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그는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내란음모죄 혐의를 씌워 체포하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최규하를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육군본부에 갔다는 사실을 약점으로 잡아 허수아비로 만든 이후, 1980년 5월의 5.17 내란과 그 다음날부터 벌어진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을 거치면서 결국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 권력의 꼭짓점에 서는 데 성공하며 또 다른 군사정권이 집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듯 전두환이 12.12 부터 5.18을 거쳐 대통령에 오르기까지의 약 9개월간의 시간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 라고 일컫는다.

이 죽음을 두고 박정희 지지자들에겐 박정희의 죽음으로 인해 대한민국 발전의 맥이 끊겼다는 인식을 심어주며 이른바 박정희 신화가 생기게 되었고 반대로 당시 운동권 진영의 사람들은 박정희가 이승만, 전두환처럼 시민 혁명으로 물러나야 했는데 하면서 안타깝다고 여기는 의견이 생겼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의견이 갈리는데 진보진영이라고 해도 모두가 시민혁명의 성공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26]박정희의 권력욕과 유신체제의 경직성, 폭압성 등을 고려할 때 시민혁명으로 박정희를 하야 시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아무튼 10.26 사건의 의미와 평가에 대한 논란은 대한민국이 지금도 심한 좌우 갈등으로 골머리를 앓게 되는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막 삽을 떴던 대대적인 서해안 무역벨트 사업, 가로림만 계획이 좌절되었다. 박정희는 충청 해안을 중심으로 대규모 중화학 공단과 무역항 사업을 현 공주시로의 수도이전을 전제로 추진하였는데 10.26 사건 직전 고인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던 삽교천 행사 또한 이 일환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정권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수도 이전 계획도 영영 중단되었으며,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도 중단되었다.


3 원인

3.1 사회

왜 10.26이 발생하였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존재하지만 고려대학교 임혁백 교수의 논문 '박정희에 대한 정치학적 평가'를 토대로 10.26사태의 발생원인과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설명해보기로 한다.

현재 10.26사태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김재규의 개인적 쿠데타라는 견해, 미국의 사주에 의해 발생했다는 견해가 세간에서 많이 떠돈다. 미국의 사주라는 견해는 공산진영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한반도의 비정상적 상황을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떨어진다. 또 김재규가 미국의 사주를 받았다는 뚜렷한 정황 역시 나타나고 있지 않다. 한편 김재규의 개인적 쿠데타라는 견해는 위에서 언급한 김재규의 우발적 행동이라는 설과 최근에 김종필의 회고록에서 제기된 김재규가 분노조절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설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10.26 사태가 김재규의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우발적 행동으로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이전에 국내정치와 국외정치의 상황을 고려하여야 한다.

국내적으로 박정희 정권은 79년에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1차 석유파동과 달리[27] 2차 석유파동은 국내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고 1차 석유파동 때와 달리 이를 타개할만한 뚜렷한 전략도 국가가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 거기다가 박정희 정권은 세계경제가 어려워 수출이 줄어든 상황에서 재벌이 감당해야할 비용과 손실을 중산층과 노동자 그리고 서민에게 전가하려는 시도를 하였다(대표적인 것이 부가가치세 도입). 그렇기에 노동자, 서민의 반발이 심해졌고 이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감소로 이어졌다.

정치적으로도 78년 총선에서 김영삼의 신민당이 집권여당을 총 득표수에서 이기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이는 김영삼으로 하여금 박정희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는 YH여공 사건에서 신민당이 YH여공들과 연계하여 박정희 정권에 '감히' 반기를 들도록 만들었다. 또한 부마항쟁에서 대규모 민중이 박정희 정권에 반기를 든 사건 역시 정치적으로 박정희를 곤란스럽게 만들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에서 카터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미국과의 불화가 심해지고 있었다. 카터 행정부는 인권이라는 기치아래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의 인권상황을 개선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박정희 정권이 로비스트 박동선을 이용해 이런 상황을 무마하고자 하였는데 오히려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 철수를 계획하게 하여 박정희정권에 대한 대외적 정당성이 감소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내적, 대외적 상황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김재규와 같은 박정희 정권의 2인자들은 '혹시'하는 불순한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아무리 분노조절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라고 하더라도 크로캅이나 타이슨 앞에서 분노를 표출하기는 어렵다(...). 박정희가 정권 초기나 70년대 초와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면 아무리 김재규라 하더라도 그의 분노를 함부로 표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79년의 상황은 김재규가 분노를 조절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유신정권 말기의 강권통치 역시 오히려 박정희 정권을 몰락에 빠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대개 통치자들은 강권통치를 통해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강권 통치는 통치의 마지막 수단이어야 하지 그것이 일상화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 일상화를 넘어 극에 달릴 때 역사상 많은 독재자들은 곧 물러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강권통치에 반발하는 세력이 등장할 경우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10.26을 단순히 김재규의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는 것은 10.26이 가진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다. 역사를 바꾸는 한 개인의 행동은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 요인에만 의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은 그 행동이 나타나기까지 많은 정치적, 사회적 요소가 영향을 미쳤다. 10.26은 박정희 정권의 몰락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임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유신 후반기의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취약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볼 수 있다.

3.2 개인

'동반자'였던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것은 언뜻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특히 피격 직후 김재규가 자신의 근거지인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본으로 달려간 것을 볼 때 이 사건을 우발적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워낙 다른 증언도 상반되기 때문에 단순 우발적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많다. 야사이지만 차지철이 부마항쟁을 탱크로 쓸어버리겠다고 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하지 마라" 한마디만 했다면 죽이지 않았을 거라 한다.

본인(김재규)이 부산사태(부마민주항쟁)직후 부산을 다녀오면서 바로 청와대로 들어가 박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린 일이 있읍니다. 김계원 실장과 차지철 실장과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읍니다. 부산사태는 체제반항과 정책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항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및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아니하면 안되겠더라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더니 박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부산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 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읍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읍니다.
김재규. 79고군형항제550호(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후) 항소이유보충서
  • 민주화에 대한 요구
어디까지나 김재규 본인의 주장으로 김재규는 재판과정에서 항상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는 박정희 정권에 염증을 느껴서 독재 종식을 위해서 박정희를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이전에 바로 부마항쟁이 일어나서 김재규가 사건의 진상을 파해치러 부산, 마산지역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큰 충격을 받고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이 정권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설이다.

실제 김재규는 71년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국민에게 약속하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 역시도 김재규 개인의 주장이다. 김재규 자신도 유세현장에서 자신이 건의했던 내용을 말하면서 박정희를 믿었다고. 그러나 약속을 어기고 유신헌법이 선포되었고, 김재규는 부하들 앞에서 박정희가 다 망쳤다고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정을 드러냈다고 한다. 유신이 선포된 이후, 당시 3군단 연대작전 오순춘 참모는 김재규 군단장이 실제 박정희를 연금하려 모의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3군단에 순시하러 왔을 때 박정희를 연금하여 하야 성명을 내도록 강제하려 준비했다는 것. 또,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은 유신 정권체제에서 김재규 정보부장과 대화를 하면서 박정희를 환자에까지 비유를 하는 표현에 놀랐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청와대에 들어와서 박정희에게 조언해달라고 하면서 유신체제를 바꾸는 제3의 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재규가 차지철 등과 같은 강경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비칠 따름이지, 그가 지금까지 보인 행보는 어디까지나 독재정권의 하수인의 역할이며 그가 과연 민주화에 친연성이 있는 인물인지는 의문이 있다. 또한 김재규를 찬양하는 해석은 도리어 민주화운동의 흐름을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를 운운하는 것도 결국 김재규가 자신이 벌인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김재규를 다룬 재판이 전두환의 압력을 받아 제대로 진행하지 못 하였음을 감안하면 김재규의 목적은 명확하게 규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 김재규의 목적이 무엇이었냐와 별개로 김재규의 목적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규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가 받은 재판으로 목적이 명백히 규명되었다고 한다면 숱한 사법살인도 옹호될 것이다. [28] 이것외에도 김재규의 집안에서 '자유 민주', '대의' 등을 적은 붓글씨가 발견되기도 했으며 이를 근거로 그가 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는 견해가 있지만, 부정하는 견해도 많기 때문에 지속적인 논쟁이 진행중이다.


  • 권력 다툼
김재규와 차지철 사이의 권력투쟁과 갈등 속에서 10.26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주변인사들에 의해서 주로 증언되고 있고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 등에서도 이러한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역시도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킨 것은 차지철과의 갈등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김재규는 자기보다 새파랗게 젊고 군대 계급도 낮은 차지철에게 면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수모를 당했고 이에 대해서 격분했고 이것이 10.26의 발단이 되었다는 주변인물들의 증언이 있다. [출처] 김재규가 교사 시절 아끼던 제자였고 가깝게 지냈던 이만섭 국회의장 역시도 그의 회고록이나 방송 출연을 하면서 김재규와 차지철의 관계에서 발단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출처]
특히 유신 정권 시절에는 중앙정보부, 대통령경호실, 국군보안사령부 간에 상호 견제와 갈등이 상존하고 있었다. [출처] 김재규의 지위는 언듯 탄탄한 듯이 보였지만,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의 대두로 위협받고 박정희의 신임을 잃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부마민주항쟁의 수습과정에서 갈등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당시 김재규의 진술에서 김재규 자신은 온건대응을 주장했지만 차지철은 300만을 들먹이며 강경진압을 주장하면서 김재규를 깠고, 박정희도 이에 동의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대립과 반목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왔었다. 더군다나 이 무렵에 차지철계로 분류되고 있던 김치열 법무부장관이 차기 중앙정보부장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정희가 야당문제와 부마항쟁 등에 대한 미흡한 대처에 대해서 김재규를 책망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재규 본인도 파워게임에서 밀릴 것이라는 직감하게 되고 10.26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출처]
  • 미국의 사주
당시 박정희와 미국의 독재자 킬러 지미 카터 대통령의 관계가 좋지 못했으므로, 미국이 김재규를 사주해서 박정희를 제거하려 했다는 설. 어르신들 중에 이 설을 진지하게 여기는 분들이 제법 있다. 특히 이 시기에 군문에 몸담았던 사람(간부), 군과 관계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설을 정설로 여기고 있다.[남재희 전 장관의 증언]

그렇지만 이 주장도 당시 미국 상황을 보면 이런 초대형 사건을 계획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는 상황이였다. 불과 4년전에 쿠데타로 휘청거리던 남 베트남이 완전히 공산화가 되어버렸고, 중동의 최대 친미정권이었던 이란팔레비 왕조가 79년 초 혁명으로 무너졌고, 여름에는 훗날 이란-콘트라 사건의 배경 중 하나가 된 니카라과가 공산화되었다. 그리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으로 CIA가 대단히 바쁠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암살은 뒷수습도 뒷수습이며, 암살로 인한 독재권력의 공백은 쿠데타의 완벽한 배경이 될 수 있고 이런 혼란상황은 베트남 공화국의 재현과 한반도 공산화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위험한 선택이였다. 그리고 이런 제의를 위해선 대통령 암살 이후의 계획 또한 제공되어야하는데 쿠데타 이후의 행적이 일관성과 계획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담으로 김진명의 소설 '1026'도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이 박정희의 자주국방을 견제하기 위해 김재규를 시켜 박정희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김진명 소설이 늘 그렇듯이, 애초 미국이 박정희의 '자주국방'을 부담스러워할 만한 이유도 없고, 미국이 완전한 악역 수준으로 한국을 견제하려 했다고 보여지지 않기에 이러한 견해는 설득력이 낮다. 이 경우는 박정희가 미국을 무시하고 핵을 개발하려고 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김재규를 사주하여 박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김진명의 불쏘시개와는 관계 없는 이야기.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말에서, 사실 '야수(Brute)'가 아니라 '브루투스[29]'라고 써놓고 미국이 대본을 준 건데 김재규 일당이 해석을 잘못해서 브루투스의 심정이 졸지에 야수의 심정으로 바뀐 거라는 그럴싸한 농담도 있다. 어디까지나 농담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말자.


  • 민주화+미국의 사주
3번(민주화)이 2번(미국)과 결합한 가설도 있다. 일단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이기만 하면, 그 다음은 미국이 어떻게든 알아서 자기를 도와줄 거라고 추측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미국이 명시적으로 김재규를 사주한 것은 아니지만, 뭔가 책임을 져줄 것처럼 잘못된 싸인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 김재규가 싸인을 잘못 읽었거나. 이 이론은 암살 이전의 치밀한 계획 + 암살 이후의 우왕좌왕을 설명해주는 가설이다.

실제 김재규는 1979년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과는 정기적으로 만났으며, 대부분의 대화내용은 한국의 인권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공개된 비밀문서에 따르면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이 10.26의 주모자가 김재규라는 것을 몰랐기에 글라이스틴이 박정희 암살을 권유하거나 지시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글라이스틴이 아무 생각없이 한 말을 김재규가 암살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원래 외교적 수사라는게 그런 식이니까.


  • 미국의 묵인
미국의 영향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은 '암살 묵인'과 '사후 추인'을 구두 승인했을 가능성이다. 김재규의 공작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가정해보자면, "박정희는 암살되고, 새롭게 민주 정부가 구성된다."는 결론이 나게 된다. 여기서 미국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이 박정희 암살과 민주화를 일종의 "반역죄"로 보고 승인을 하지 않을 것인가, 일종의 "혁명"으로 보고 승인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즉, 김재규의 암살로 만들어질 "새로운 민주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을 수 있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쟁점이다.
현실적으로 일국의 국가 지도자를 암살하는 것은 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정치적 부담이 큰 일이다.뭐 대놓고 쳐들어가서 체포도 한 적 있지만. 그러나 김재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암살 사건을 저지른 다음,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민주화를 하고, 미국은 사후에 승인을 하는 형식이라면 정치적 부담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의 신변은 미국에서 미국의 압력에 따라 민주화 정부에서 단순살인죄'에 대한 '사면' 혹은 미국이나 제3국으로 '망명'하는 형식으로 '신변 보장'을 할 수도 있다.


  • 정권 반대 세력 관리방식에 대한 대한 이견
3과 1(권력 다툼)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정권 반대 세력 관리방식을 놓고 박정희, 차지철과 상당한 의견차이를 보이고 있었고 이것이 암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유신의 심장인 중앙정보부의 수장이었지만 실제 부마항쟁 이후 김재규는 정권이 전복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인 경상도에서 이러한 항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박정희 정권의 통치전략이 더이상 먹혀들지 않기 시작했다는 징후로 해석되기도 한다.[30] 이를 관리하는 방식에 있어 박정희와 차지철의 강경일변도 노선에 상당히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김영삼 체포 등의 야당 탄압, 민주화 요구 묵살 등에 대해서 김재규가 다소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 그러나 박정희와 차지철은 끝까지 강경일변도의 진압을 주장하였고,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라고 100만 명 정도 못 죽일 것 머있겠냐"는 정신나간 소리를 했다고 김재규는 법정에서 진술했다. 정리하자면 김재규가 민주화를 원했다기보다는, 당시 정권 반대 세력들에 대한 관리방식을 가지고 충돌이 일어나 이것이 암살까지 갔다는 의견이다. 자신들의 정권 반대 세력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는 좌-우를 막론하고 국가통제가 강한 국가의 권력층에서 늘 논쟁거리다. 이 논쟁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만, 상기된 바와 같이 대중적 저항의 격화와 강경탄압, 그 탄압으로 인한 더 큰 규모의 저항이 반복되면서 당시의 박정희 정권이 독재정권의 전형적인 말기적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31] 추론의 영역이지만 박정희 정권의 핵심인물이었던 김재규가 이 상황에서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을 가능성은 있다.


  • 분노에 의한 우발적 암살
전제는 3, 내용은 변형인 4와 거의 비슷하다. 박정희와의 자리에서 김재규가 부마항쟁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온건한 대응을 주장했는데 차지철이 김재규의 말에 대해 비꼬는 투로 비난했다.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한 소리를 할 당시 차지철이 이때 전차로 밀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만화 박정희에 등장하는 것으로서 차지철이 부마항쟁에 대해 캄보디아폴포트처럼 싹 쓸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김재규는 차지철보다 나이도 많고 군경력에서 비교도 안되게 우위에 있던 사람인데 보잘것없던 차지철이 자신을 무시하기에 순간적 분노에서 차지철을 쏘고, 박정희도 뒤이어 쏘았을 거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차지철은 특전사 창설 멤버로 육군 중령으로 진급 후 바로 전역했지만 김재규는 박정희와 육사 동기였고[32] 실제 3군단장까지 했던 3성장군 출신이다. 흔히들 김재규를 4성장군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워낙 권력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보니 사실 김재규는 예비역 중장이다. 의외로 10.26 당시 동석자중 한 명이었던 김계원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육군 대장 출신이다. 당시 참석했던 인물의 병역 사항을 살펴보면, 박정희는 대장 예편, 김계원도 대장 예편, 김재규는 중장 예편, 차지철은 중령 예편이다. 별들의 향연 그만큼 차지철과 계급차가 컸다.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는 저격 이후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않아 박흥주의 신발을 빌려 신는 등 김재규의 대응이 무척 우왕좌왕했다는 점. 특히 자신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로 향하지 않고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는 육군본부로 갔다는 사실은 도저히 저격이 계획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현재로서는 세 번째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과 연계되어서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가설. 하지만 이미 술자리 이전부터, 심복들에게 "오늘밤 거사하겠다."라고 말하고, 대통령 암살 이후에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단 것을 보면 단순 우발적 암살이라고 보기엔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


  • 중앙정보부 부장이라는 위치의 위험성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정치공작에서 최전선을 담당했으며, 역대 중정부장은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다. 하지만 박정희가 장기 집권하고 있는 한 중정부장의 막강한 권력도 시한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거대한 위치가 중정부장 개인의 일신에는 위험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김종필, 이후락, 김형욱 등 권력을 휘두르던 중정부장들은 최종적으로 박정희의 견제를 받아 몰락하는 수순을 받았다. 특히 김형욱의 말로는 후임인 김재규가 보낸 중정요원들에게 암살당하는 비참한 최후였다. 김형욱의 죽음을 보고 김재규가 자신 역시 단지 박정희의 소모품일 뿐, 언젠가는 실각 당하거나 처참한 말로를 맞을 것이라는 생각에 위기감을 가지게 되어 박정희 정권에 회의를 느끼게 했다는 분석이다.

거기다 3선 개헌을 거쳐 유신헌법 체계가 되자 박정희는 이론적으로 종신집권이 가능해졌고,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하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박정희는 정권 내내 누군가가 '후계자'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조차도 극도로 싫어할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였다.


  • 장준하 밀약설
한편 [장준하와의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런 밀약설 중에는 시인 김지하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 사이에도 쿠데타에 대한 의논이 있엇으며, 성공할 경우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국회의원의 1/3 이상을 자기쪽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즉, 실제로 시행 가능성을 전제로 둔 밀약이었다는 것. 이 밀약설을 주장한 사람은 김지하 본인이다. 밀약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론에 불과하지만 평소에 장준하와 김재규가 어느정도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장준하 선생의 아들인 장호권에 의하면 장준하 선생 사후 김재규가 여러 모로 유족들을 도와줬다고 하며,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 며칠 전 김재규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다만 김재규의 행동이 장준하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주변 인물들의 증언외에는 확실한 증거가 부족한 상태이다.


  • 김영삼 지지설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 당수 김영삼을 지원하기 위해서라는 설. 김재규와 김영삼 두 사람은 금녕(金寧) 김씨 문중의 종친이었고, 이 점에서 야당 지도자임에도 김영삼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으며 도리어 그가 박정희 대신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지하여 10.26을 저질렀다는 주장. 다만 이는 관련자의 증언, 물적 증거가 전혀 없는 개연성,추측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그다지 진지하게 고려할 내용은 아닌 듯하다. 그래도 다음에 나올 건강이상설보다는 그럴듯해 보임


  • 건강설
중앙일보김진 논설위원은 발기 부전(...)을 비롯한 건강 문제가 하나의 원인이라고 근거 없는 주장을 했다.[링크] 아니 이게 무슨소리야! 내가 발기부전이라니 실제로 김재규는 간경변을 앓고 있었고 10.26 당시엔 중정부장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때의 간 기능 장애로 극심한 발기부전을 앓게 되어(...)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생겼고(...), 이것이 10.26 같은 암살을 저지른 한가지 먼 원인이 되었다는 것.(...) 그저 당시 김재규의 정신적 혼란에 대한 먼 원인을 추측한 것일뿐 큰 의미는 부여하지 말자. [해당 칼럼에 대한 비판]
이 외에도 여러가지 주장들이 존재하며, 위의 추측 중 여러 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매우 많다. 그만큼 김재규의 암살은 이해하기 어려운 뜻밖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과 차지철에 대한 적개심 등 여러가지 복잡한 심리가 뒤죽박죽 짬뽕 극대화되어서 저지른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암살이나 이후의 판단미스도 이해는 간다. 예를 들어, 유신체제를 지속하는 박정희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선임자 김형욱 부장의 암살을 지켜본뒤 불안감을 키우던 김재규가 부마항쟁 현장을 방문하고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 대통령 암살을 계획하기 시작했으나, 차지철의 도를 지나친 무례한 행동에 욱하는 바람에 "궁정동 안가에서 중정 직원들만으로 현장을 제압할 수 있는 지금이 기회"라는 판단을 굳히고는 아직 미완이었던 계획을 급하게 앞당겨 실행한 것이라고도 추측할 수 있다. 이후 김재규의 혼란스러운 행동은 아무리 계획된 암살이었더라도 자신이 수십년 충심으로 따르던 박정희를 막상 자기 손으로 암살하고 나자 김재규 스스로도 충격과 공황상태에 빠져 정승화가 하자는대로 육본에 따라가는 등 판단미스를 거듭한 것일수도 있다.


3.3 최순실 게이트 관련 재조명

사실은 최태민이 사건의 원인이다?

당시 김재규가 항소했을 시 밝힐 동기가 다시 재조명을 받고 있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삼은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民情首席) 박승규 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읍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여,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 놓은 일이 있었읍니다. 중정본부에서 한 조사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당시 김재규 변호사를 맡은 안동일 변호사는 10.26 관련 책을 썼었는데 신동아와 인터뷰를 했고 그게 2005년 12월호에 실렸다. 당시 김재규가 최태민을 주목했다는 점을 역시 증언하고 있다.

그는 김재규가 우발범이거나 패륜아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체제 회복에 나선 확신범 내지 양심범일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김재규를 몇 번 접견하면서 우발범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사람의 진정성이 느껴지잖아요. 꾸며서 말하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데, 전혀 그런 게 없었어요. 김재규는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10·26 혁명을 일으킨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어요.”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재규는 큰영애인 박근혜가 관련된 구국여성봉사단의 부정과 행패를 보고 분개했다고 해요. 이런 일들이 ‘대통령이나 박근혜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조사를 시켰다는 겁니다. 조사결과 로비나 이권 개입 등 여러 가지 비행이 드러나자 박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했는데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런 일까지 하느냐’면서 몹시 불쾌해 했다고 해요. 박정희는 영부인 육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자식들을 애지중지하고 철저히 감싸고 돌았다고 해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만 해도 그래요. 당시 항간에서 말이 많던 최태민이 총재,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구국여성봉사단의 문제점을 보고한 후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됐습니다. 박정희가 최태민의 실권을 뺏는답시고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꾼 거지요. 김재규는 자기가 괜히 조사를 해서 오히려 ‘개악(改惡)’이 됐다면서 뒷조사한 걸 후회했대요.
신동아 2005년 12월 [#]

2005년 11월 8일, 중앙일보의 경제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는 10.26 현장에 있었던 핵심관계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인 김계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을 취재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사건의 원인이 된 차지철과의 갈등은 최태민의 처리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게 이제.... 차지철하고 김재규가 최태민(1994년 사망. 전 육영재단 고문이사) 때문에 많이 싸웠습니다. 최태민 아시죠? 다른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두 사람이 싸운 것 나중에 보면 최태민 때문이다. 차지철이 최태민을 앞세우고 박근혜 양을 너무 업고 다니니까. 그러면 김재규가 ‘그러지 마라. 그러면 안된다’ 그러거든? 근혜양은 어머니는 없고 외로운 그런 때인데.... 근혜양은 자기가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해야 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왜 자꾸 나서서 그러느냐, 이런 소리가 나오니까 이 소리가 최태민을 통해 많이 들어가거든요. 최태민이 근혜양 앞에서 자꾸 알랑거리면서. 그러니까 근혜양을 어렵게 만든 놈이 다 최태민이야! 그래서 저놈을 때려 잡아라, 그래 가지고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친 일이 있죠.”

김씨는 또 목사라는 최태민의 정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내가 어느 교회의 목사인지 알아본 적도 있어요. (알아보니)최태민이라는 목사가 없어요. 교파가 불명이라고 해요. 최대민씨를 큰 영애에게 누가 소개했는지 하는 것도 세간의 화제였어요. 그후에 증언이 나온 것이 있습니다만 나이가 많은 고등계 형사 출신이라는 얘기도 있었고...”

김씨의 증언에 따르면 박근혜가 최태민과 밀착하면서 이러저러한 문제가 발생하자 김재규가 박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하고 박 대통령은 최태민을 불러다 야단을 쳐서 박근혜 주변에서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조처를 취했다. 이후 최태민의 청와대 출입이 금지됐다. 일단락된 듯 햇던 최태민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박근혜가 여전히 그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근혜양은 이에 중앙정보부에서 모함해 그런 거다, 최태민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주 선량한 사람인데 왜 정보부에서 모략을 해 자기 아버지 생각을 흐려 놓느냐고 하면서 오해가 생겼어요”라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중간생략)

사태가 악화되자 이 시점을 전후해서 박 대통령은 김재규, 박근혜, 최태민 3인을 청와대 집무실로 불러 직접 3자 대질심문을 벌였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박,최 두 사람의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김 부장에게 다시는 그런 사실무근 보고를 올리지 말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는 김 부장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박 대통령은 심복인 김 부장을 버린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박근혜를 옹호했던 차지철 경호실장을 싸고돌기 시작했다. 차지철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강화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박 대통령의 후광을 입은 차지철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노골적으로 견제했다. 차지철은 심지어 김재규의 청와대 출입조차도 막았다. 두 사람간의 불화가 회복불능의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김계원 전 실장은 이렇게 증언했다.

“그 구국여성봉사단인가 뭔가 집회를 청와대에서 합니다. 그런데 그 모임 멤버가 한 200명 된다고 들었는데 재벌들이 그 모임 멤버가 되는 것을 굉장히 크 영광으로 생각해요. 청와대에서 그 모임을 한번 하면 말이야, 재벌들이 큰 뭐나 된 것처럼 으스대고 이런 판이거든. 그걸 정보부엣 다 보거든. 문제가 된다 이거지. 그런데 (청와대)출입증은 경호실에서 발행하거든. 그러니까 또 싸움이 문제가 되고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지요. 김재규는 못하게 하고 차지철은 왜 막느냐 하고. 그래서 차지철은 김재규가 청와대 들어오는 것까지 막거든. 대통령한테 보고할까봐.”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청와대를 출입할 수 없는 수모를 겪게 된 것이다. 김계원씨는 김재규가 대통령에게 긴급 보고해야 하는 상황이 되도 청와대에 들어올 수가 없을 정도로 차지철의 김재규 견제가 극에 달해 김재규가 자신을 만나러 오는 편법을 써서 간신히 청와대를 출입했다고 전했다. 욱하는 성격의 김재규가 느꼈을 인간적인 모멸감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이런 수모를 외면했던 박 대통령에 대해 가졌을 배신감의 강도가 어떠했는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김재규가 궁정동 만찬에서 박 대통령과 차지철에 대한 무차별 난사는 그의 맺힌 응어리가 폭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최태민이란 자가 대통령 딸인 박근혜를 위시하여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내용이 중앙정보부에 들어왔고, 이에 따라 김재규는 조사를 통해 박정희에게 보고했으나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김재규는 사안이 중하다고 판단해 최태민을 처벌해야 한다는 식으로 재차 건의했고, 이에 따라 박정희는 최태민을 직접 불러 김재규와 같이 심문을 시작한다. 문제는 이 조사에 박근혜가 동행했었다는 것이고, 박근혜는 최태민 관련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박정희는 이러한 박근혜의 태도만 보고 최태민을 처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김재규를 강하게 질책해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차지철 역시 최태민과 박근혜를 감싸고 돌았고, 박정희는 이때부터 차지철을 더 신임하였다고 하며 차지철의 위세가 엄청났다고 한다. 게다가 이렇게 커진 차지철의 위세는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의 청와대 출입까지 막았고, 대통령에게 긴급 보고해야 하는 상황이 되도 청와대에 들어올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김재규는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인 김계원을 만나러 오는 것처럼 하여 간신히 청와대를 출입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차지철의 행동으로 인해 김재규는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꼈고, 이런 것을 외면한 박정희에 대해서도 큰 배신감이 들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 주장은 일반적인 추론이 아니라, 당시 사건 전후를 잘 아는 대통령비서실장이 증언한 것임을 주목할 만하다.

더욱이 김계원 비서실장의 주장만이 아니라, 최태민을 증오하다시피한 김재규의 태도가 사건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게 한다.[#]

1979년 11월의 합수본부기록에도 김재규의 증오가 드러난다. 다음은 기록에 나타난 정보부 수사 파트 K국장의 진술.


<김부장은 '최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고 증오를 표시했다. 새마음봉사단의 부총재(총재 박근혜)인 사이비 목사 최가 사기 횡령 등 비위 사실로 퇴임한 후에도 계속 막후에서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각 기업체 사장들을 운영위원으로 선임하고 성금을 뜯어내는 등 새마음운동 취지를 흐리게 해서 계속 동향을 감시하라는 김부장의 지시를 받았다. 79년 내사 결과 최의 이권 개입, 여자봉사단원과의 추문 등 비위사실을 탐지하여 김재규부장에게 보고한 바 그렇게 말했다.>
동아일보, 1992.08.29. 남산의 부장들 (107) 10.26의 서막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그리고최태민의 대한구국선교단 창설은 박정희 지시란 증언이 등장했다![#]

최태민 부분은 과거부터 증언과 기사를 통해 조금씩 제기되어 오기는 했지만, 문제는 최태민과 관련된 내용 자체가 그동안 찌라시 취급을 받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 2016년에 들어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재조명되고 있다.

김재규의 이런 판단을 했다는 내용은 최순실 게이트 관련 보도에 자주 여러 언급되고 있다.

  • 헤럴드경제, 2016-10-26 13:02, 37년전 김재규 “박근혜-최태민 관계, 박정희에 건의해도 소용없었다” [#]
  • SBS CNBC, 2016-10-26 11:27, [직설] 현대판 수렴청정…최태민·최순실, 그들은 누구인가 [#]
  • 한겨레, 2016-10-26 17:35, 1979년 박정희와 2016년 박근혜…부녀 대통령의 10월26일 [#]


4 계획

전후 정황을 살펴볼 때, 적어도 김재규가 특정 인물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은 분명하다. 자신이 궁정동 안가에 권총을 들고 가고, 수행원들에게도 관련 지시를 내려둔 점, 선배이기도 한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사건 직후 "난 한다면 한다."고 말했던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다만 본래 김재규의 대통령 암살 계획은 박정희가 아닌 차지철만을 겨냥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건 직전 김재규가 김계원에게 "형님, 오늘 이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라고 말했던 바 있다. 물론 이 자식은 차지철을 지칭한 것. 그리고 사건 당일 연회장에서 박정희가 지나칠 정도로 차지철을 두둔하고, 김재규 자신을 질책하자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박정희에게 까지 총탄을 날린 것으로 보인다.

정리하자면 김재규에게는 차지철을 죽일 계획만 있었을 뿐, 박정희까지 겨냥한 국가원수 암살과 그 이후의 신정부 수립 등의 내용은 당초 계획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차지철을 죽인 것은 계획적 이었지만, 박정희를 죽인 것은 우발적" 이었다는 것. 이는 박정희, 차지철의 피살 이후 김재규가 저질렀던 일련의 치밀하지 못한 행동을 설명하는 데 충분한 배경 요인이 된다. 후의 재판에서도 김재규는 박정희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함구했고, 인간적 타락상이 공개되는 것을 한사코 저지했다. 그는 재판 시작부터 사망까지 박정희를 지칭할 때는 꼭 “각하께서는 … 하셨습니다”라고 최상의 경의를 표했고[#], 자신은 박정희의 묘소에 묘막을 짓고, 시묘하면서 여생을 바치겠다고 했다. 그는 박정희를 은인으로[#] 말했으며, 변호사가 박정희의 부도덕성을 보이기 위해 공범으로 기소된 박선호의 증언 발언에서 술접대에 관한 언급을 유도했으나 이를 막았다.[#] 김재규와 가까운 관계었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박정희의 전화가 오면 일어나 차려 자세로 전화를 받거나, "각하 명령이면 어디든 가야한다"고 말하는 등 생전 김재규의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김재규의 박정희와 그 정권에 대한 충성적인 면모는 재판에서 자신이 진술한 민주화나 독재를 끝내기 위해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며 박정희를 공격하는 발언과는 모순되는 것이다.[33][34]

다만 김재규는 법정 최후 변론에서 "박대통령은 많은 국민이 희생되더라도 그만둘 사람이 아닙니다. 본인이 이를 알기 때문에 유신의 지주 역할을 담당한 사림이지만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뒤돌아서서 그 원천을 두드려 부순 것입니다"로 진술하며 사전에 계획하고 있었다는 의도를 표했다. [#] [#]

그러나 차지철이 아무리 2인자라고는 하지만 권력의 최고 핵심은 누가 뭐라 해도 박정희였다. 당장 계획대로 차지철을 죽였다고 하더라도 바로 눈앞에 있는 김재규를 박정희가 처리하는 일은 과거 중정의 수장 김형욱이나, 숙적 김대중의 경우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김재규 말고도 보안사령부의 전두환이나, 윤필용 사건으로 실각했지만 현역 국회의원이던 이후락 등 후계자는 넘치고 넘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63살, 이승만처럼 후계자에 대해 조급증을 낼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차지철 살해 후 "박정희 암살도 계획"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박정희는 차지철에 대해서 우호적이었고 반대로 김재규에 대해서는 갈수록 '일을 너무 물러터지게 한다'라며 압박했다. 대통령 암살 직전 자신의 동조자들이 '각하도 포함됩니까?'라고 묻자 '물론이다'라고 답했으며, 자신의 옛 제자였던 이만섭에게도 넌지시 이를 암시하는 말을 남겼다.

김재규의 여동생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김재규는 10.26 이전에 둘째 남동생에게 '박정희를 죽이겠다'면서 거사 후엔 박정희의 무덤 앞에서 권총으로 자살하겠다는 말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일본에선 10.26사건을 주군에 대한 가이샤쿠 의식으로 해석하는 해석도 나왔다. 물론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말자.

5 관련 인물

5.1 가해자

  •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가해자.
  • 박선호 - 중앙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 가해자.
  • 박흥주 -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 포병대령, 가해자.
  • 이기주 -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조장, 가해자.
  • 유성옥 -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운전기사, 가해자.
  • 김태원 -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원, 가해자.[35]
  • 이 외 중정 안가 경비원 유석술이 증거 인멸(사건에 사용된 총기를 안가 정원에 매장)혐의로 체포되었다.

살인 가해자 6명은 모두 사형이 집행되었고, 증거 인멸에 가담한 유석술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5.2 사망자

- 김재규의 저격에 우측 흉부 관통상과 후두부 총상으로 사망.
- 김재규의 저격에 우측 손목 관통상과 복부 총상을 입은 후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 당함.
  • 정인형 - 대통령 경호실 경호처장,
- 박선호의 저격에 목 관통상으로 사망.
  • 안재송 - 대통령 경호실 경호부처장,
- 박선호의 저격에 흉부 총상으로 사망.
-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의 저격에 의해 사망.
  • 김용태 - 대통령 경호실 특수차량운행계장,
-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의 저격에 의해 사망.


5.3 생존자

  • 김계원 - 대통령 비서실장, 사건 목격자.
  • 심수봉 - 가수, 사건 목격자.
  • 신재순 - 모델, 사건 목격자.
  • 박상범 - 대통령 경호실 경호계장, 사건 피해자.[36]
  • 이정오 - 중앙정보부 안가 요리사, 사건 피해자. 별관 식당에서 대통령 경호원들과 식사중 안가 경비원의 소총 사격에 허리 총상을 입고 후송.
  • 김용남 - 중앙정보부 안가 식당 차량 운전사, 사건 피해자. 별관 식당에서 대통령 경호원들과 식사중 안가 경비원의 총격에 어깨 총상을 입고 후송.

5.4 후속 조치

  • 정승화 - 육군참모총장, 박정희 사망 후 계엄사령관.
  • 최규하 - 국무총리, 박정희 유고 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비상국무회의 주관.
  • 김정섭 -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사건 당일 김재규의 지시로 정승화 장군을 김재규 대신 영접했고, 직후 김재규가 암살범임을 안 뒤 보안사와 협조해 중정 내 자신들의 직원들을 동원, 안가에 남아있던 김재규의 부하들을 체포하고 만약을 대비해 안가 내 탄약고를 처리[37]하는 등 뒷수습을 맡았다.
  • 전두환 -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10.26 사건 수사 지휘자. 해당 년도 12월에 12.12 군사반란을 주도했다.


6 여담

이 사건의 생생한 목격자였던 심수봉은 전두환이 스스로 일컬어 대통령이 되면서 무려 2년 동안이나 가수 활동을 정지당해야 했고, 신재순 또한 더 이상 한국에서는 살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

사건 현장인 궁정동 안가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1993년 철거되어 시민공원인 무궁화동산으로 바뀌었다.

공교롭게도 딱 7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가 일어났었다.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저격 사건이 같은 날 일어난 점 때문에 호사가들 사이에선 이런저런 말이 많은 편이다.

현재 MBC에서 매년 12월 31일에 열리는 MBC 가요대제전의 전신은 '10대 가수 가요제'였는데 원래는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다가 이 사건 때문에 무기한 연기되어 12월 31일에 열리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여담으로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1979년 10월 20일 신묘한 통찰력으로 박정희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말도 안되는 선전을 하고 있다.

디시인사이드국내야구 갤러리, 주식 갤러리 등에서는 탕탕절, 관통절 등으로 칭한다. 주갤에서는 김재규의 묘까지 찾아가는 사람도 있다.

김재규가 사건 직전에 박정희에게 말했다는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는 2015년 쯤부터는 일종의 고인드립화 되었다.

대전광역시홍선기는 10.26 사건 당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아산군수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유래없는 대통령 저격 사건이라 불길한 징조도 있었다고.삽교천 방조제 준공 치사를 박정희가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으나 참석자들의 말에 따르면,여느 때와 달리 힘이 없어보였고[* [1979년 10월 28일 자 동아일보],준공비 제막식에서는 헝겊이 벗겨지지 않아 경호원들이 낑낑거리며 헝겊을 내렸으며[38],행사를 마치고 전용 헬기를 타고 도고온천으로 갔을 땐 사슴이 헬기 착륙소리에 놀라 뇌진탕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최순실 게이트로 나라가 뒤집어진 상황속에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네이버 검색어순위 3위에 오르고 10.26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나고 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 전 대통렁은 10월 26일 사망하였고, 그 딸 박근혜 대통령은 같은 날 정치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았다. 무슨 영화냐?(...) 이렇게 기막힐수가...

7 어록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YH 사건 당시 연설[39].
그분이 그렇게 빨리 허무하게 돌아가실 줄은 몰랐어. 인생도 허무하고 정치도 무상한 거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10.26 소식을 전해 들은 직후.
하나님도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박정희대통령을 조문하면서
김영삼 총재는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인데, 이를 함부로 국회에서 정치적 의도로 제명해서는 안 된다.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게 되면 각하께서 불행해질 것이다.
ㅡ 전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 당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당시.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심장을 쏘았다. 나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리 한 것이었다. 아무런 야심도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
ㅡ김재규 중앙정보부
민주주의쿠데타암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이뤄야 진정한 민주주의입니다.
김대중 당시 민민연합 공동의장, 10.26 직후 인터뷰 당시.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사형장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인간 박정희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8 사진


사건 이후 현장 검증에서 김재규김계원(왼쪽에 묶여있는 안경 낀 인물)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모습.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가수 심수봉(왼쪽 모자 눌러쓴 여성)과 신재순(오른쪽).


10.26과 관련된 인물들. 박정희를 중심으로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재규, 오른쪽 끝이 차지철이다. 사진은 10.26 사건 4년 전 사방공사 시찰 때의 모습이다. 사진에 나와 있는 좌우 두 인물의 위치가 박정희의 왼팔과 오른팔의 위치와 같다는 점이 흥미롭다. - 사진 출처 : 뉴스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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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전모를 브리핑 하는 당시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육군 소장.

9 창작물

박근형이 극강의 김재규 포스를 보여주었다. 역대 최강의 포스를 자랑하는 김재규로 차지철을 쏠 때에 "이 새끼 너 건방져!"는 가히 명대사로서 차지철(이대근 역)과의 말싸움과 그 싸움이 끝나고는 "이 개새끼!"라고 뇌까린 적도 있다. 박정희를 저격하기 전 집무실에서 빈 총의 방아쇠를 당기며 일본어로 '코로시마스(殺します, 죽여 버리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릴 때의 포스는 압도적이다. 10.26 사건을 다룬 영상 매체에서 김재규가 '코로시마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4공의 해당 장면에서는 자막은 '고로시마스'라고 뜨는데 김재규 역을 맡은 박근형의 대사는 "코로스(殺す, 죽인다)"였다. 존댓말과 반말의 차이. 그 장면에선 아이러니하게 박정희의 사진이 배경으로 보이면서 총을 겨누니 가히 긴장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명장면(근데 이거 영화 택시 드라이버 표절 냄새가 나긴 한다). 박정희 저격 후 체포되고 난 다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후 등장이 없다가, 5.18 이후 4공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차지철과 말싸움을 주고받으면서 개그 캐릭터화가 되실 뻔하였으나 배우의 포스로 그나마 무게를 잡았다.다만 육군본부 앞에서 보초병이 정승화를 알아보지 못해 "어느 대학 총장님이신지?" 라고 묻는 부분은 없다.
사극에서 정도전 전문배우로 유명했던 김흥기가 김재규 역을 맡았다. 제4공화국과 같은 시기에 방영되어 드라마는 신통치 않았고 4공에 묻힌 감도 있다. 배우가 배우인지라 연기력 자체는 훌륭했지만 워낙 4공에서의 박근형 포스가 막강했던지라 그에 비하면 살짝 역부족. 그런데 드라마 초반에는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가 후반부에 착용한다. 이 드라마 19화와 마지막화 20화는 김재규의 일생이 중심이다.
김재규와 10.26 사건을 주제로 한 블랙 코미디 영화. 백윤식이 김재규 역을 맡았는데, 특유의 능글맞은 이미지가 김재규 역에 잘 녹아들었다. 이런 류의 풍자 코미디가 드문 한국에서는 괜찮은 편에 속하는 수작이다. 다만 조롱과 희화에 중점을 둔 나머지 영화 속 청와대 사람들을 묘사 할 때 고증은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박정희와 관련자를 풍자하는 부분에서 역사사실과 다른 경우도 있다. 자세한건 항목을 참고 바란다.
김재규:야, 임마 차실장.
차지철:어?
김재규:만 명?
차지철:만 명.
김재규:너 하나 죽으면 돼.(탕!)
차지철:어얽!
박정희:뭐꼬?
김재규:나야.(탕!)
(꺄아아악)(철컥)
차지철:잠시만! 잠시만! 잠시만! 으아앍!다아앍!(불꺼짐)
김재규:불켜어ㅇㄺ!
이 작품도 또한 명품 역사 드라마. 여기서도 김재규가 포스 있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김재규 역을 맡은 김형일이 실제 김재규와 외모,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다만 연기는 너무 점잖아보이는 감도 있다. 최규하 대통령의 장신, 외모까지 닮은 근데 목소리가 너무 중후하다(...) 또한 어느 국밥집에서 박정희의 유고를 다룬 뉴스가 보도되자 "잘 죽었다! 독재자!"라고 하는 사람과 "각하께서는 나라의 아버지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라는 사람이 싸움이 붙는 장면 또한 백미. 별것 아닌 장면 같지만 이는 오늘날까지도 극명하게 엇갈리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간단명료하게 보여준 장면이다. 참고로 항목 맨 위의 10.26 사건에 대한 여러 인물들의 평 가운데 백동림 당시 합동수사본부 수사 1국장이 한 말을 이 드라마에서는 이학봉이 하는 것으로 나온다.
  • 그 외 제3공화국(MBC)와 삼김시대(SBS)에선 김동현(코리아게이트에선 장태완)이 김재규 역을 맡았고, 다큐멘터리 극장 등의 KBS 작품에서는 백찬기가 연기한 바 있다.
  • 10.26 사태를 다룬 소설로 김진명의 '한반도'가 있다. 10.26 사태의 CIA 개입설을 다룬 이 소설은 최근 1026으로 개작되어 재출간되었다.
  • 송강호 주연의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서도 나온다. 다만 이 작품은 실제 역사와 많이 다른 부분이 있다. 예로 경호 실장은 1974년 육영수 저격 이후 박종규에서 차지철로 바뀌었으나 여기서는 차지철이 모티브인 인물이 그냥 5.16 이후 그대로 경호실장이다. 애당초 풍자 영화에 가까우니 역사적 고증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 웹툰 제 0시 : 대통령을 죽여라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하다가 뜬금없이 다른 전개로 흘러간다. 26년보다 자극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보니 댓글 상황은 개판. 게다가 원래 사건과는 다르게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전 중앙정보부장을 암살했다는 식으로 더 저평가를 내리려고 작가가 노력하는 바람에 은유라고 보기에 너무 직설적으로 비방하는 내용이 되어 버렸다.
  • 윗동네에서는 당연히 왜곡되어 다뤄지고 있는데, 남한 출신의 고위층 월북자의 전기를 다룬 민족과 운명 세 번째 시리즈 홍영자 편에서 그려지고 있다(다른 월북자와 달리 홍영자는 가상인물이다). 여기서는 궁정동 비밀요정에서 여자들을 데리고 니나노를 벌이던 중 박정희가 김재규를 김영삼 구속 건으로 질책하고 차지철이 신민당 놈들 탱크로 어쩌고 라고 떠들자, 김재규가 비서실장에게 "각하를 똑바로 모시라"고 한 뒤에 "각하, 저런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되겠습니까" 라 하고 차지철의 팔뚝을 쏴버렸다. 박정희가 삿대질을 하며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이러느냐. 그만두지 못해" 라고 외치자 김재규는 비웃음을 흘리며 "야, 박정희" 라고 일갈하며 발사했고, 박정희는 테이블보를 붙잡고 술상을 와장창 무너뜨리며 쓰러졌다. 이후 중정 요원들이 경호원들을 처치한 후 김재규는 의전과장의 총을 빌려 차지철을 쏜 뒤에 네 발의 확인 사살로 박정희의 숨통을 끊었다. 몇 가지 왜곡된 장면(ex. 경호원들이 군복 차림에 거의 한개 소대 병력임,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만 따로 불러 쿠데타를 지시한 것과 달리 안가 요원을 전부 불러놓고 모의한 점, 김재규가 김계원에게 반말을 하는 점 등등)을 빼면 위에서 언급한 다수설에 근거하는 내용이다.
  • 박정희/전두환 시대를 그린 미국의 불쏘시개 소설 파문[40]에서는 말 그대로 마약을 동원한 환락파티 끝에 김재규가 몇 달 전부터 준비한 총과 기생들의 독침에 의해서 벌어진다. 박정희는 원래대로 총, 차지철은 기생과 검열삭제하다가 독침에 찔려죽는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은 독실한 불교도인 박정희가 핵개발을 하고 미국과 단교하고 기독교를 불법화할 계획을 세운 것을 알게 된 미국에서 꾸민 일이였고 이미 기생 대장 이손지[41]와 짠 갑툭튀한 전두환이 그걸 낼름 했다는 이야기. 어느 정도냐면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자마자 전두환이 공수부대 병력을 끌고 안가에 들이닥친다. 소설 마지막에는 미국에서 전두환도 그렇게 처리할 준비를 하지만 전두환은 이미 눈치 챘다는 걸 암시한다. 당연히 내용이 내용인지라 8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출판 후 한국에서 일월서각을 통해 번역판이 나왔을 때 사장부터 여직원까지 모두 보안사에 끌려갔다. 그래서 80년대 해적판에서는 하나같이 파르크 대통령, 큐우 부장, 츙크[42] 장군 등으로 표기되었다.
  • 팬텀 하록의 만화 포천에서 프롤로그에 70년 간격으로 같은 날 벌어진 하얼빈 의거와 교차해서 등장한다.
  1. 정부수립 이후뿐만이 아니라 한국사를 통째로 되돌아봐도 1인자가 암살당한 사건(그것도 임기 중의 1인자)은 모본왕의 암살과 1374년 공민왕 시해사건 등 손에 꼽을 정도이다.
  2. 공교롭게도 이 날은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민족적 통쾌함을 일으킨 역사적 의거가 일어난지 70주년이 되던 해였다.
  3. 한때 백의사의 단장 염동진이 살았던 곳으로, 10.26 이후 철거되었다.
  4. 참고로 차지철은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죽어갈 때, 혼자 살아 보겠다고 화장실로 도망갔던 경호실장이다.
  5. 그리고 서울에도 계엄령과 군투입을 실행하려고 했다는 증거가 나와 그럴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
  6.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에 내걸었던 요구들 가운데 하나도 "계엄령 해제"에 관한 것이었다. [#]
  7. 대표적인 좌파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역시도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진보적 사회운동가 백기완도 “당시는 박정희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한 민중항쟁이 거셌고, 박정희 내부 권력의 모순이 더 격화되어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조그마한 사건일 뿐이며 민주화운동의 본체, 기본적인 흐름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출처]
  8. 해병대사령부 해체 이후 대한민국 해병대원들은 모두 서류상 해군 상륙병과 인원들로 분류됐다.
  9. 섭외를 청와대가 아닌 중앙정보부에서 맡은 이유는 차지철이 일을 중앙정보부에 떠넘겼기 때문이다. 경호실에 쓸데도 없는 포병까지 배속시키려고 시도할 정도로 경호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을 듯하면 업무와 권한을 닥치고 엮어서 가져가던 차지철로서는 좀 의외의 행동인데, 선술했듯이 그가 김재규를 철저히 기죽여서 자기 밑에 뒀다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0. 당시에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여대생으로 묘사된다.
  11. 이 권총은 김재규가 육군대학 부총장이던 1960년, 당시 총장 이성가 장군에게 선물받은 것으로 예편 후 주소 관할지의 성북경찰서에 맡겨 놓았다가 중정부장 취임 후인 1977년 반환받아 집무실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12. 예비역 해병 하사 출신. 평소 박선호의 신임이 깊었다.
  13. 참고로 유성옥은 육군 중사 출신으로 제대 후 중정 운전사로 취직했다가 박선호의 도움으로 1급 근무지인 안전가옥로 배치되었으며, 그는 그해 11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14. 평소 박정희의 관용차량은 이타관(박정희의 사단장 시절 운전병)이 몰았지만 대, 소 행사 때는 비공식 행사용 차량인 도요타 크라운 슈퍼살롱을 운행했기 때문에 이날은 김용태가 슈퍼살롱 운전을 맡았다.
  15. 드라마 제4공화국 에서 경호실 내부 회의 중에 "청와대 경호원들의 영향이 안가에선 무력화 된다. 조치가 필요하다"라는 건의가 있었는데 차지철이 "김재규 부장 정도야 내 파워로 꽉 누르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장면이 있었다.
  16. 갑자기 합선되면 펑 하는 폭발음이 난다.
  17. 남아있는 증거사진을 보면 확실히 이 총이다. 아이러니한건 육영수도 문세광에게 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
  18. 이때 얼마나 서둘렀는지 김재규는 구두도 제대로 신지 않고 별관까지 뛰어온 상태였다.
  19. 1989년까지 육군본부는 용산구 삼각지에 있었다.
  20. 물론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박상범, 이정오 등의 생존자가 있었지만 이 시점에선 부상을 입고 무력화한 상태인데다 일개 경호원/안가 직원이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설혹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도 정보부 요원들이 감금하는 등의 방법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21. 이후 12.12 쿠데타를 일으킨 반란군 세력은 정승화에게 혐의를 씌우면서 이 명령은 정승화가 김재규와 함께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22. 드라마 제4공화국 에서는 티니아벨시콜레 라고 불렀지만, 정확히는 곰팡이성 피부병인 전풍(癜風, Tinea Versicolor)이었다.
  23. 조갑제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로 가던 김재규를 태운 호송차가 잠수교에서 전복 사고를 일으켰는데, 차가 뒤집어질 때 기절한 신동기가 정신을 차려보니 김재규가 엉덩이로 신동기의 머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고. 김재규가 미안하다며 비켜주자 김재규가 도주하지 못하게 바지춤을 잡고 있던 신동기는 "부장님 어디 도망가시면 안돼요" 라며 손을 놓았고 김재규도 "내가 어딜 도망가나. 빨리 (전복된)차나 세우시오" 라면서 조용히 호송에 응했다고 한다.
  24. 박흥주는 다른 이들과 달리 육군 대령으로 현역 군인이었기 때문에 군사법원의 단심제가 적용되어 가장 빨리 사형됐다.
  25. 1982년 형집행 정지로 석방
  26. 시민혁명과 이로 인한 (하야를 포함하는)정권 타도에 대해 나쁘게 말해 순진한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다.
  27. 이 때는 한국 내 재벌기업이 중동 건설시장을 개척하며 1970년대 중반 경제 호황의 기반을 만들었다.
  28. 각주 5에 대표적인 좌파 역사학자인 한홍구의 김재규 평가가 나왔지만 한홍구는 2013년에 자신의 주장을 매우 크게 바꾸었다. 한홍구의 주장에 따르면 "비록 김재규가 민주주의를 회복하지 못 했어도 윤보선의 말을 인용하여 김재규가 민주화에 기여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주장하다 못 해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한 날이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날과 같음이 우연이겠냐면서 그를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의 마지막 인간이라 한 다음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이처럼 한홍구의 평가가 엄청나게 달라졌다. 한홍구가 평가를 바꾼 까닭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김재규 재평가가 2013년에 나왔음이 의미심장하다.
  29. 이름은 물론 Brutus이지만 '브루투스, 너마저!'하는 라틴어 문장에서는 호격어미인 'Brute, et tu!'라고 쓰기 때문에 브루투스의 라틴어 이름을 Brute로 잘못 알고있는 경우가 있다.
  30. 이미 부마항쟁 1년전인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이런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유신독재정권의 압도적인 관권, 금권을 등에 업은 집권 민주공화당이 제1야당 신민당에 지역구 득표율에서 오히려 뒤진 것이다. 당시 공화당은 31.7%, 신민당은 32.8%로 그 격차는 불과 1.1%였지만 민주화를 내세운 제1야당의 득표율이 집권당을 넘어선건 헌정사상 최초였다. 여기에 제3당인 민주통일당의 득표율 7.4%를 감안하면 10대 총선은 사실상 집권당의 참패였다. 지역구 당선자는 공화당이 68명으로 신민당의 61명보다 많긴 하지만 차이가 크진 않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신정우회가 없다면 국회에서 공화당과 신민당은 사실상 박빙상태였다.
  31. 경우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무장항쟁이 발생하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리비아 혁명 비슷한 상황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32. 박정희는 훗날 육사가 되는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생이었고 김재규도 이곳 2기생이었다.
  33. 다만 이러한 언급을 단지 모순되었다고만 볼 수 없는 것이, 태조 이성계는 고려말 위화도 회군 때 자신과 오래 함께 싸워온 전우이자 선배인 최영 장군을 체포하면서 "제 본심은 아니었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잘 가시오."라면서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이처럼 김재규도 정황상 공인으로서의 박정희를 시해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으면서도 산업화를 이끈 국가지도자이자 자신의 고향선배, 은인인 자연인으로서의 박정희는 충분히 존경했을 수 있다.
  34. 하지만 또다른 견해로는 일단 대통령을 암살한 범죄자로 찍힌 이상 자신이 살해한 박대통령의 치부를 까발리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게될수도 있어 그냥 자신의 소신만 이야기했다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국민적으로 지탄받는 살인자가 내가 저새끼 얼마나 나쁜놈인지 까발릴까? 저놈이 이래이래해서 내가 정당하게 죽인거야! 라고 한다면....대충 감이 오는가?
  35. 본래 이 날은 비번이었으나,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근무하러 나왔다가 이 사건에 휘말렸다.
  36. 여담으로 이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박상범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에도 계속 경호실에서 근무했고, 김영삼 정권 출범 때 경호실장으로 임명되어 최초의 민간인 출신 경호실장이 되었다. 박상범은 육영수 저격 사건 때 직접 총을 들고 뛰쳐나왔던 경호원 중의 한 명이었고,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때도 경호원으로 있다가 살아남았다.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얽힌 인물.
  37. 일설에 따르면 1개 사단 평시 재고분의 소총 탄약을 전부 그 자리에서 실탄사격해 소모시켰다고 한다(...).
  38. 조갑제 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39. 10.26 사태가 일어나기 약 두 달 전이다
  40. 툼스톤의 비밀, 파문, 10.26과 기생 이손지 등등의 여러 버전으로 국내 출간되었다.
  41. 아버지가 민주화 인사였다가 고문당해 사망하고 이 여자도 연좌제에 걸려서 체포되었다가 중정에 의해 기쁨조로 키워졌단다...
  42. 혹은 이중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