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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5일부터 6월 26일 이틀 동안 옹진반도에서 대한민국 국군과 조선인민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38선이 그어진 후 옹진반도는 대한민국의 영토였으나 육로로는 들어갈 수 없어 해상으로만 진입이 가능했고, 당시 전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세가 시작되어 지원도 힘들었기에 지연전을 벌이다 인천으로 후퇴한 전투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전쟁기념관 옹진지구 전투 참조.
2 당시 상황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옹진반도는 38도선의 존재로 육로로는 진입이 불가능했기에 당시 한국군으로써는 이곳에 지원을 해주기가 힘들었다. 이를 노린 북한은 계속 소규모의 병력을 투입해 옹진반도의 고지들을 공격하였고, 이때문에 이곳을 방어하는 한국군과 옹진반도 주민들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6월 25일 북한이 대대적인 침공에 나서면서 이곳에도 수 많은 병력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3 부대 배치 상황
- 한국군
총 병력 3,600여 명
- 북한군
- 38경비 제3여단 - 소장 최현
- 6사단 제14연대 - 대좌 한일해
- 제203 전차여단 휘하 1개 전차중대
총 병력 15,000여 명, T-34 전차 10여 대 저 놈들이 총만 쏘다 탱크 끌고온다!
4 개전
4.1 전투 상황
6월 25일 새벽 4시 38선의 모든 전선에서 북한군의 총 공세가 시작되었고, 옹진반도 역시 공세가 시작되었다. 당시 국군 17연대는 45km에 달하는 긴 전선에 단 한개 연대만으로 고수하고 있었으며, 당시 한국군의 작전계획상 적의 대규모 공세로 인해 전면적인 공격을 받을 경우 지연전을 전개하다가 해군 LST 2척을 통해 철수하게 되어있었다.[3][4] 북한군 38경비 제3여단은 한국군 1대대,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14연대는 3대대를 향해 대규모 공세를 펼쳤고, 개전 2시간 만에 1대대장이 전사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백인엽 연대장은 예비대인 2대대를 즉각 투입하여 1대대를 지원, 지연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적의 공세에 후퇴하는 도중 3대대와 통신이 끊겨 버리고 전선이 좌, 우로 양단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게 된 3대대는 강령으로 후퇴하였다가 4문의 대전차포를 사용, 측면을 노려 적 전차 3대와 장갑차 2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세웠다.
4.2 철수 작전
대규모로 몰려오는 적과 맞서 적 전차 격파를 비롯하여 적을 일시 격퇴시키는 전과를 세웠으나 17연대의 뒤에는 바다가 점점 다가왔고, 병력 증원은 힘들었으므로 철수 작전을 개시한다.
4.2.1 3대대
26일 11시 옹진반도 우측의 3대대를 비롯한 연대 병력을 부포항의 해군 LST에 태운 백인엽 대령은 당시 박정호 포병 대대장과 엄호사격을 한 뒤 포 장비를 바다에 버린 후 죄책감으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대대장의 설득으로 무마되었고, 주변에서 구한 어선으로 연평도로 탈출, 해군에 의해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4.2.2 1, 2대대
1, 2대대도 역시 강령에 집결하여 부포항을 통해 철수할 예정이었으나 이미 전선은 북한군에 의해 양단되어 있었으며, 계획에도 없던 사관항에서 집결하였고, 역시 대부분의 장비를 유기, 파손시킨 뒤 기관선, 목선 등을 동원하여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5 뒷이야기
당시 옹진반도의 17연대에는 제 7 포병대대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철수 작전 중 대부분의 화포를 유기, 소각시켜 많은 수를 상실하였다. 아까워라 당시 한국군에게 포병 전력은 매우 귀중한 자원이었는데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철수 작전으로 인해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이 포병대대를 빠르게 철수시켰거나 다른 전선에 배치했으면 적에게 더 출혈을 강요할 수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