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八線
1 한국
6.25 전쟁 당시 삼팔선을 넘는 국군과 미군. |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은 직후부터 6.25 전쟁 때까지 남북의 경계선 역할을 한 위도 선.
1.1 유래
사실 러일전쟁 직전에 처음에는 일본이 제정 러시아(로마노프 왕조)에게 조선을 38도로 갈라먹자고 한 것이 유래였다. 동방의 작은 섬나라 정도로 일본을 생각하던 러시아는 당연히 무시. 일본은 제1차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미국과 영국을 등에 업었다. 이번엔 위기의식을 느낀 러시아 쪽에서 39도선으로 재분할을 제의했으나 기세등등해진 일본은 걍 무시. 그리고(...)
1.2 실제
실제 경계선이 된 것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본토 진공에 따른 병력 손실을 우려한 미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루어진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가 원인이었다.
38선의 기원을 설명하는데에 몇 가지 이론이 있다. 첫번째는 준비부족설이다. 예상과 달리 만주에 100만명이 넘는 일본 관동군은 일주일 만에 모래성처럼 무너졌고 이에 따른 소련군의 급격한 남하에 놀란 미국이 한반도의 반이라도 먹기 위해서 부랴부랴 설정했다는 얘기다. 당장 8월 15일의 히로히토 덴노의 항복 때 미군은 아직 오키나와에 있었다.
이에 반대로 사전계획설이 있다. 전쟁부 작전국 3대 국장이었던 존 헐 중장이 1949년 전직 미 군사실 직원 해리스 대령과 전화통화를 한 녹취록이다. 녹취록에서 헐 중장은 “38선은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마련됐다”며 “우리 전략가들은 3개의 주요 항구를 주목했으며, 그 가운데 2개의 항구(인천과 부산)는 우리 지역에 포함해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38선을 따라서가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38선 획정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1945년 8월 11일 새벽이 아니라 7월 25일 무렵 이미 착안됐다는 얘기다. #
한편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의 참모였던 로우니의 회고록 《운명의 1도(度)》에 따르면, 일본의 공식 항복(1945년 9월 2일) 직전 조지 마셜 장군이 참모들에게 남북 분단선 설정안을 건의토록 제의했을 때 딘 러스크 대령 등 영관급 장교들은 북위 39도선을 주장했으나, 그들의 상관이었던 에이브 링컨 장군이 예일대 지리학과 교수인 스파이크만이 1944년 저술한 '평화의 지리학'을 인용하면서 38도선을 주장[1] 했다고 한다.# 참고로 북위 39도선은 평양과 원산을 관통한다.[2][3]
어쨌든 경계선으로서의 삼팔선은 6.25 전쟁으로 사라지고 휴전선이 대신하게 된다. 또한 애초에는 단순한 군사적 분리선에 불과했기 때문에 미군이나 소련군이나 삼팔선 자체를 완전히 틀어막지는 않았고 주요 도로에 검문소 정도를 만들고 팻말을 설치한 정도로 경비했다. 그래서 삼팔선이 성립된 후에도 한동안 통행이 자유로웠던 시기가 있었으나, 이는 남한과 북한에 독자적인 정부가 수립되면서 점점 통행이 힘들게 되었다.
1.3 삼팔선이 경유한 지역
서해 - 황해도 옹진군 - 해주만 - 연백군 - 경기도 개풍군 - 개성시 - 장단군 - 연천군 - 포천시 - 강원도 화천군 - 춘천시 - 양구군 - 인제군 - 양양군 - 동해
1.4 현황
파일:Attachment/38th sign.jpg |
팻말. |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 경계선으로 대충 만들어진 까닭에 지형이나 행정경계, 교통로 등과 전혀 연관이 없으므로 아래와 같은 문제점이 발생한다.
- 고립된 지역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황해도 서남단의 옹진반도는 한국 땅이지만 옹진반도에서 개성 쪽으로 향하는 유일한 육상로인 해주는 북한 땅이라서 육로 교통이 차단된 섬 아닌 섬이 되었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라서 해주의 경우 바다로 통하는 입구 지역이 한국령이 되었기 때문에 무늬만 항구인 도시가 되어버렸다.
- 단일한 행정구역이 2개로 나뉜다.
삼팔선은 자연지물 (하천, 산, 호수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지나가기 때문에 하나의 면(面)이나 리(里)가 삼팔선에 의해 분리되어 미국과 소련의 군정 당국 간에 마을의 관할권을 두고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심지어 어느 쪽에 귀속될지를 놓고 주민들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져 충돌이 발생하는 일도 많았다.
이것만 해도 큰일인데 행정구역이 나누어지는 것도 불균등하게 나누어지므로 사태가 더 커졌다. 당장 개성시의 경우 시가지는 한국령인데 바로 윗산인 송악산은 북한령이다. 또한 필수적으로 같이 운용해야 하는 시설이 양분된다. 황해도 연백군과 옹진군에서는 농토는 남쪽에, 저수지는 북쪽에 있어서 농사를 지을 때마다 농사용 물 문제로 다툼이 잦았다.
이 때문에 해주의 옹당포같이 아주 작은 땅만 38선 이남에 있는 경우에는 북한측이 해주를 모두 지배하기로 합의하고, 바다만 한국에 소속되도록 미군정과 소련군정이 협의한 사례가 존재한다. 그리고 아예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5년 ~ 1946년사이 미국과 소련 군정 당국은 삼팔선 이남의 황해도(옹진, 연백)는 북한으로, 삼팔선 이북의 경기도(개성, 장단, 개풍, 연천)는 남한으로 완전 귀속시키고 강원도의 경우는 군(郡) 경계선을 따라 남북으로 재분할하자는 의견을 두고 진지하게 논의하기도 하였다.[4] 결국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않으려고 맞서던 양국의 회담 결렬로 무산되었다.
- 방어선을 구축하기 곤란하다.
이는 특히 한국이 심했는데 북한의 경우에는 삼팔선 인근에 고지대를 형성한 곳이 많아서 쉽게 방어진지 가설이 가능했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북한의 고지가 쉽게 관측할 수 있는 산비탈이나 평지에 방어선을 만들어야 하니 유사시 방어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 덤으로 앞서 언급한 옹진, 연백, 개성 지역은 조금만 밀려도 바로 바다나 강이 나오기 때문에 자연적인 배수진이라서 유사시 일단 포기하는 지역으로 선정되기까지 한다.
이런 이유와 함께 북한은 이미 김일성이 주도해서 남침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조선인민군의 장비와 숫자를 크게 늘린 반면에 한국의 경우에는 이승만 등의 근거 없는 북진 연설[5] 등에 기겁을 한 미국이 원래 약속한 장비와 물자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중장비는 거의 없었으므로 한국군의 수와 질이 모두 떨어진다는 것도 작용했으므로 삼팔선 자체는 엄중한 경계가 펼쳐지지 않았다.
즉, 삼팔선에는 주요 도로에만 검문소 비슷한 경계진지를 만들어놓고 삼팔선을 지키는 주력병력은 약간 후퇴한 전술적 요지에 주진지를 만들어서 경비했다는 것이다. 덤으로 조선인민군은 따로 삼팔선 경비부대를 창설할 정도로 병력과 장비가 풍부해서 일단 삼팔선 북쪽에 주진지가 없는 곳이 거의 없었던 데 반해 한국군은 앞서 말한 대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기 때문에 방어가 불능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은 경찰이 담당하거나 아예 방어를 포기했다. 그래서 개전 초반에 북한군이 깊숙히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원도에서는 남북의 경계가 38선보다 북쪽에 있기 때문에 남한 강원도에서는 38선을 쉽게 넘어다닐 수 있으며 도로에는 38선 안내 표지판이 있다.
1.5 휴전선과의 차이
휴전선과 38선의 비교.
흔히 38선을 휴전선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분명히 다른 것이다.
휴전선은 1953년 휴전회담 이후에 설정된 선으로 38선과 비교해보면 개성을 포함한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연백평야, 해주 이남의 옹진반도 부분은 북한이 좀 더 남하하였고 거꾸로 철원, 속초, 설악산 등을 포함한 강원도 지역은 대한민국이 북진했다. 때문에 혹자는 태극기의 태극 모양이 되었다고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전략적 요지와 평지는 북한이 더 많이 먹었고 남한은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전술적 요지와 영토 자체를 더 많이 먹은 셈이다. 영토를 많이 먹었다지만 그런데도 남한이 북한보다 면적이 작다는 게 함정. 게다가 남한 입장에서는 수도 서울특별시가 38선 때보다 오히려 북한에 좀 더 가까워졌다!
여담이지만 6.25 전쟁 직전에 개성 지방에서는 "1950년은 단기 4283년인데 4283을 거꾸로 하면 38243×8=24여서 무슨 세븐갤이냐 이 해에 38선이 이사간다" 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4/2+8-3=7이니까 세븐갤을 털자 이런 복잡한 괴소문이 자연스레 생겼다기보단 아마도 북괴 정권의 프로파간다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북한의 6.25전쟁 떡밥
2 아메리카
포르투갈이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 지배권을 놓고 에스파냐와 분쟁을 했을 때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 아래 서경 38도선의 동쪽을 지배할 권리를 얻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38선의 동쪽이라는 곳이 코딱지만 했기 때문에 기준선을 서경 46도 36분까지 밀어냈다. 그로 인하여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땅이 되었다! 항목 참고.
3 신조어
"38세가 정년퇴직의 선" 혹은 "38세까지 회사를 다니면 선방"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38세까지 회사를 다닌 남자는 당연히 사회적 지위가 더 높으므로 그보다 어린 남자들보다 더 큰 연애 권력을 갖고 있다.
3.1 비슷한 뜻
- 십장생 : 십대 때 부터 장차 백수가 되진 않을까 생각한다
- 이태백 : 이십대 태반이 백수
- 사오정 : 45세면 정년퇴직
- 오륙도 : 56세까지 회사 다니면 도둑놈
- 육이오 : 62세까지 회사 다니면 오적
- ↑ 심지어 그 평화의 지리학에 나오는 38도선은 한반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위대한 인물과 사상과 발명의 대부분이 38도선 이북에서 이루어진다는(...) 내용이다.
- ↑ 특히 평양의 경우 북위 39도선이 도시 중심부를 정확히 관통한다.(북위 38도선이 도시를 관통했던 개성도 도심 뒷산인 송악산을 관통했지 시내 자체를 둘로 나누진 않았다. 참고로 원산은 아슬아슬하게 39도선 이북이다.) 이 경우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를 포함해, 평양 도심의 1/4이 남한령이 된다. 다만 남한령 평양 시내가 39도선과 대동강 사이에 갇혀 사실상 고립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북위 39도선이 분단선이 되었을 경우에는 대동강을 따라서 경계조정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계조정이 되지 않더라도 방어상의 어려움 때문에 남한에서 남한령 평양 시민들을 대동강 이남으로 이주, 대동강 이북 지역을 비무장 지대화 시켜 평양급의 대도시가 유령 도시가 되는 아스트랄한 상황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본격 한국의 베를린 - ↑ 뉴욕과 비슷한 위도인 북위 40도를 기준으로 했다면 평안도의 80%, 함경남도의 40%가 남한에 속하게 된다. 함흥은 아슬아슬하게 40도선 이남, 신의주는 아슬아슬하게 40도선 이북이다. 북위 40도선이 기준이 됐다면, 쓸만한 황해도와 평안도의 평야 지대와 평양, 진남포, 해주, 사리원, 원산, 함흥 등의 알짜배기 도시(공장들 또한 도시에 있으니 공업지대도 남한이 가져간다)들은 모조리 남한이 가져가고 그나마 가져가는 신의주는 항구와 서해 바다를 이어주는 압록강 하구가 남한 관할인지라 항구로서의 기능은 사실상 고자 상태가 되어(실제로 6.25 전쟁 이전의 해주가 그랬다) 결국 북한이 가지는 건 척박한 개마고원과 함경도의 동해안밖에 없다(...) 그리고 북한은 반 고자 상태가 되어(땅을 뺏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 해도 인구와 공업지대의 대부분이 남한에 있으니 전쟁을 일으킬 능력 조차 없다!)소련에게 모든걸 의존하는 위성국 신세로 살다가 동구권 붕괴 시 남한에 흡수당하는 형태로 멸망했을 것이다.
- ↑ 화천, 홍천, 평창, 삼척, 정선, 원주, 춘천, 횡성, 강릉, 울진, 영월은 이남으로, 통천, 평강, 철원, 고성, 인제, 회양, 이천, 김화, 양구, 양양은 이북으로 분할하는 안이었다.
- ↑ 신성모 국방장관이 외친 "전쟁이 벌어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등. 오히려 이런 대책없는 강경론은 북이 중국과 소련에 군사원조를 받아내는 근거로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