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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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2월 18일 ~ 2013년 12월 14일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교육자이다.

2 생애

1923년 2월 18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형이 백선엽이다. 약송소학교와 숭실고보를 거쳐, 일본 메이지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일본육군항공학교에 입교하여, 일본육군 항공소위로 종전을 맞았다.[1]

광복 이후 고향인 평안남도로 귀향하여, 평양에서 국내파 민족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의 경호대장으로 근무했다. 군경력자라지만 겨우 전직 소위한테 좀 과분한 직책인 것 같다(...) 그러나 소군정에 의해 조만식의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이어 감금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역시 비서로 근무했던 형 백선엽[2]과 함께 월남했다. 월남 직후인 1946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육군 장교로 임관한다.

월남 이전 조만식의 경호대장을 한 이력 탓인지, 창군 초기 이승만의 눈에 띄게 되어 경호를 맡게 되었다. 이런 인연 덕분에 쾌속 승진을 한다.[3] 이 대통령이 백인엽에게 "형도 군인인가?"라고 물어 볼 정도로, 대통령은 백인엽을 먼저 알고 이후에야 백선엽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백선엽은 일선부대와 육군본부를 오가던 '흔한 젊은 장교 1' 정도의 이미지였고, 백인엽은 이승만의 바로 곁에서 경호를 서던 인물이었으니.

앞선 주석의 설명처럼 건군기의 빠른 진급 탓에 1948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한국전쟁 직전에 그가 근무한 곳은 당시 38선으로 고립된 최전방인 옹진반도였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옹진지구 전투에서 17연대장으로 북한군과 맞섰다. 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국장, 제1훈련소장, 제6보병사단장 등을 지내고 1952년 11월 소장으로 진급했다. 제9보병사단장, 제2훈련소장 등을 지낸 뒤 1955년 9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제1군단장과 제6군단장을 지냈으며,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을 마지막으로 1960년 예편했다.

이후에 선인재단을 세워 교육자로 활동했다.[4] 그러나 재단을 통한 온갖 비리로 허구헌날 구속되는 것이 일상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나는 정권이 새로 바뀔때마다 늘 비리 척결이라며 잡혀간다라고 자조적으로 인터뷰할 지경. 형 백선엽을 여러 번 인터뷰하고 칭송하던 월간조선도 백인엽의 선인재단 운영 및 비리를 수 차례에 걸쳐 고발할 지경이었다.

2013년 12월 14일에 90세로 뒤졌다별세했다.

3 행적

3.1 한국전쟁

덕장형인 형과 달리, 저돌적인 맹장형으로 능력 자체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편이었다. 개전 당시 옹진지구 전투에서 독립 제17연대를 지휘했다. 탱크를 몰고 들어온 적군과 3대 1에 가까운 병력 열세 속에, 후방은 바다라는 지형적 악조건에서 사투를 벌였다. 결국 수세에 몰리자 ,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5] 그 와중에도 부대를 무사히 퇴각시켜[6] 이후 반격의 토대가 되었다. 낙동강 전투와 인천상륙작전에서의 용맹만큼은 유명했다. 또한 형 백선엽이 쓴 <<실록 지리산>>에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데, 전쟁 이전에 여순반란 당시 토벌대로 발령받았으며, 상당히 유능했던 지휘관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그가 오랫동안 지휘했던 17연대는 북한군과 잦은 교전으로 실전경험이 풍부해, 부대 자체는 정예부대로 이름높았다. 오죽하면 부대 최하급자의 계급이 하사였다고 하니...

그러나 죽을때까지 욕먹고 심각하게 봐야할 것이 있으니 바로 권력남용과 즉결처분. 장교로서의 특권의식과, 생명경시 사상이 유달리 심해 병사들을 썼다 버리는 보급품으로 여겼다. 겨우 2년도 복무안한 소위가 일본군 악폐습은 철저히 공부한 듯 어느 트럭이 그의 차를 추월하자, 쫒아가서 감히 이등병이 장군의 차를 추월했다고 트럭을 운전한 통신병을 직접 쏴 죽여 곁에 있던 부하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또 자기 차를 운전하던 운전병이 실수로 차 시동을 꺼뜨렸다고 쏴죽여버리기도 했다. 이런식으로 부하들을 쏴죽이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워낙 유명한 사건인데 다른 책에는 차마 실명을 거론 안하고 창군원로 중에 그런 놈도 있다(...)는 식으로 나오는데, 이무호의 <어느 졸병이 겪은 한국전쟁>에는 추월했다고 같은 한국군을 쏴죽인 바로 그 인간의 이름 석 자가 바로 백인엽이라고 폭로해 버렸다. 또한 그외에도 계속 즉결처분을 저질러 부하들한테 살인 장군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그중 한 건은 직접 목격 했다고 한다. 아예 그의 별명이 즉결처분의 제왕이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얘기도 있으니 말 다했다. 이러다보니 부하들에게 증오를 받았고, 군에서도 미친 놈이라고 비난이 많았다. 오죽하면 백인엽이 부하를 하도 많이 쏴죽이니, 보다못한 상부에서 즉결처분을 금지하고 앞으로 처벌을 하려면 재판을 열라고 군법까지 바꾸었다. 이후로 백인엽도 재판까지 가자면 귀찮아서인지 줄였다고 하지만 이 인간 때문에 군법이 고쳐질 정도였으니 얼마나 악랄했는지 알만하다.

연대장 시절, 대령 계급에 장군차량에만 부착하는 성판을 자체 제작해 달고다니다가 형 백선엽에게 크게 혼이 난 뒤에야 떼어냈다. 김석원 장군의 후임으로 1사단장이 되었을 땐 일도 안하다가, 후임 송요찬에게 인수인계도 안해주고 홀연히 떠나버려 송요찬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한국전쟁 당시 대전교도소에서 예비검속으로 수감자 1800명을 학살하고, 1000명을 트럭으로 실어 외부에서 추가로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책임자가 바로 17연대장인 백인엽 대령이다.

그러나 약자에게만 강하고 강자에겐 어지간히 약했던 모양이다. 한국전쟁 당시 비학산 전투에서, 한신(국군) 장군은 1연대장이었고 백인엽은 사단장이었다. 그런데 용전분투하며 치고 올라가던 1연대에, 영문을 알 수 없게 포병의 화력지원이 정지되었다. 그 덕분에 기세좋게 올라가던 1연대의 진격이 돈좌되었다. 알고보니 백인엽이 오랫동안 맡아온 바로 그 17연대도 같은 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화력지원이 1연대로 쏠려 있자 17연대로 돌려버린 것이었다(...). 포병관측소에서 사태의 전모를 파악한 한신 장군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곧장 사단본부로 쳐들어갔다. 당시 사단본부에는 이형근 장군의 동생인 이상근 대령이 참모장으로 있었는데, 만류하는 참모장을 던져버리고(...) 사단장실에 박차고 들어가 권총을 뽑아들고 매우 강력하게 항의했다. 즉, 연대장이 사단장실로 쳐들어가 권총을 뽑아들며 사단장에 따져든 것이다(...). 예하 연대장의 불같은 항의에 사단장 백인엽은 매우 당황하여 아무 말도 못하며 안절부절했다. 사태는 한신 장군이 던져버렸던 사단 참모장과, 한신 장군을 좇아온 1연대 작전주임이 간신히 뜯어말려 끝났다고 한다.

3.2 선인재단

형만한 아우 없다지만 이건 정도가 좀 심한 인물로 자신의 이름과 백선엽 장군의 이름을 따 선인재단을 만들었는데, 동양 최대의 사학 재단이었다. 1990년 당시 효열국민학교, 인화여중, 선화여중, 선인중, 인화여고, 선화여상, 선인고, 운봉공고, 운산기공, 항도실고, 인천전문대, 인천대학교가 있었다. 그 외에도 몇몇 학교가 더 있었다고 한다. 속칭 마징가제트. 체육관 주변(구글어스로 북위 37도 28분 17초 동경 126도 39분 21초 주위)의 학교들 거의 전부가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재단 운영이 개막장오브 막장이어서, 인천지역 고교 평준화 이전 선인고등학교는 (인문계임에도 불구하고) 수준 이하의 학생들만 득실대었다. 그 악평은 평준화 이후에도 지속되는 선인재단의 운영 속에서 여전히 이어졌으나, 공립고등학교가 된 이후에는 수준이 완전히 달라져서 신흥명문고가 되었다. 오죽 개막장이었으면 그저 이름에 한 글자만 들어간 형 백선엽 장군까지 도매금으로 욕을 먹을 지경이었다(...) 아무튼 막장 선인재단의 전설은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도봉산'으로 불리던 악명높은 항도, 운봉, 운산 라인은 수십년이 지난 현재도 악명이 자자하다.

결국 인천대학교와 선인고등학교 모두 막장의 극을 달리는 운영 끝에 1994년 인천직할시에 흡수되었다. 인천대학교는 국립대가 되었고 나머지 학교는 공립학교가 되어서 지금은 선인재단 따위는 없다. 사실 월간조선에서 백인엽을 취재한 이유도 바로 이런 학내분규의 해결때문에 기획했다. 그렇지만 인천 사람들에게 선인재단이라는 단어는 남아있다. 그것도 아주 안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다. 저 동네 근처의 고등학교를 저 시절에 나왔거나 또는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백선엽'과 '백인엽'은 똑같은 존재다.

오죽하면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백인엽은 나는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한번씩 감옥에 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무슨 민주투사같은 건 아니고,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사회기강 정리차원에서 꼭 혼내줄 정도로 유명했다는 이야기.

백인엽의 막장행각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보도한 언론매체가 바로 월간조선. 그것도 북한 핵개발 문제로 시끄러울 때라서 나름 북한에 대한 비판이 매서운 시기였다. 그 월간조선이 그럼에도 백인엽의 막장행각을 상세하게 보도할 정도로 운영을 얼마나 개차반으로 했는지 당시에도 비난을 무수히 받았는지 알 수 있다.
  1. 해방 당시 20대 초반에 불과한 나이와 소위 계급을 볼 때,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은 채 편안하게(...) 종전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2. 조만식의 비서가 백선엽 한 명이었던 것은 아니고, 조만식의 비서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로 유명한 선우진 역시 유일한 비서인 것처럼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여러 비서진 가운데 한 사람이 선우진이다. 백범 암살 전후의 정황을 언론에 적극적으로 증언했고, 남북연석회의에 백범의 차남 김신과 함께 동행한 유이한 인물이기에 그런 오해가 있다.
  3. 다만 건군초기 국군 이전 군 경력이 고작 위관급이었던 인물들이, 국군에선 쾌속 승진을 했다. 딱히 백인엽이 무공이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일례로 김신 장군은 38세에 공군참모총장에 올랐는데, 당시로선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30대 장군이 넘쳐나던 시대였으므로...
  4. 형 백선엽과 자신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 만든 재단이다.
  5. 당시 17연대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권총으로 자결하려는 백인엽을 둔기로 가격하여(...) 기절시킨 다음 후송시켜버렸다고 한다. 흠좀무(...)
  6. 38선과 바다에 막힌 지리적 악조건 덕분에, 교전상황이 아닌 전면전 상황에선 애초 17연대의 작전계획은 지연전을 벌이며 병력을 보존한 채 후퇴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