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적

阮籍
(210년 ~ 263년)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사종(嗣宗). 본관은 연주(兗州) 진류군(陳留郡) 울지현(尉氏縣).[1] 완우의 아들, 죽림칠현 중 한 사람.

도량이 크고 남에게 매이기를 싫어했고 예속에 구속되지 않았으며, 상을 당했을 때 평상의 예속을 따르지 않았지만 심신을 훼손하는 것이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연주자사 왕창이 그를 청해 만났지만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는데, 왕창은 그에게 감탄하면서 칭찬했고 자기로서는 완적을 평가할 능력이 없다고 했고 완적이 입으로는 세상사를 논하지 않아 저절로 훌륭해졌다.

태위 장제가 이를 듣고 그를 불렀으며, 완적은 상서랑, 조상의 참군이 되었다가 병을 칭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1년 여후에 조상이 처형되자 완적은 종사중랑이 되었고 조정에서 완적이 명성이 높아 그를 존중했지만 완적은 세상에 난리가 많아 녹을 받기 위해 벼슬하는 것에 불과했으며, 보병교위가 비어있는데다가 미주가 많고 영중에 술을 잘 빚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교위 자리를 구했다가 마침내 술에 취해 세상일을 버렸다.

일찍이 광무에 가서 초한의 전쟁을 하던 곳을 보고 탄식하면서 당시에는 영재가 없어 저런 경박한 아이들이 명성을 얻었다고 했으며, 기분에 따라 홀로 수레를 타고 도로를 경유하지 않으면서 가다가 길이 끊기는 곳에 이르면 한바탕 통곡하고 되돌아왔다. 어릴 적에 소문산에 놀러 다닐 때 그 산에 은자가 있어 이름을 몰랐고 죽실 수 곡에 절구, 절구공이가 있을 뿐이었는데, 완적은 그를 쫓아 태고의 무위지도, 삼황오제의 도의를 논했지만 그 은자는 주의깊게 듣지 않았다.

완적에게 그 은자에게 길게 휘파람 불었고 소리가 청량해 그 은자는 편안하게 웃었으며, 완적이 내려오자 그 은자도 휘파람을 불었고 난세 또는 봉황의 울음소리와 같았다. 이에 완적은 그 은자의 논의에 의지해 마음에 품은 바를 나타냈으며, 그 노래에 이르길

"해는 부주산의 서쪽으로 지고 달은 단연에서 뜨는데, 태양은 가려져 보이지 않고 달빛은 이를 대신 웅패했네. 고원한 것은 잠깐이고 미미한 것도 장차 떠오를지니 부귀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리는 사이인데, 빈천이 어찌 종신토록 지속되겠는가?"

또한 탄식하면서 말했다.

"천지가 나뉘어지고 육합이 열리며 일월성신이 은퇴하는 때에 내가 날아 올라 위로 간들 장차 무슨 포부를 갖겠는가?"

라고 했으며, 완적은 입으로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하지 않고 훌륭했기에 하증처럼 예법을 중시하는 선비들에게 깊이 미움을 받았지만 사마소가 항상 그를 간직했기에 천사를 다 누릴 수 있었다. 같은 죽림칠현중 유영이 술퍼마시고 도가적 삶을 주장하다가 단칼에 파직된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사마소가 총애를 했는지 알 법하다.

사마소는 완적이 지극히 신중하다고 칭찬해 매번 그와 담론할 때마다 그 말이 현묘하고 심원했으며, 한 번도 인물의 선악을 비평한 적이 없었다. 사마소가 진공에 봉해졌다가 사양하고 받지 않자 많은 사람들이 사마소에게 찾아가 정중하게 권유했는데, 정충이 사신을 보내 권전문을 지어달라고 청했다. 이 때 완적은 원준의 집에 있다가 밤새도록 술을 마신 터라 부축해서 일으켰고 완적은 단숨에 목찰에 써내려 갔고 더 이상 손댈 곳이 없어 그대로 필사해 사신에게 줬으며, 당시 사람들은 완적이 쓴 것을 신필이라 했다.

고사성어 백안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 尉氏는 위씨가 아니라 울지라고 읽는다. 오늘날 하남성 개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