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펑

카이펑
개봉(開封)
Kāifē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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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도시. 허난 성(하남성)에 소재하고 있는 매우 역사적인 도시이다. 중국이 지정한 8대 역사도시 중의 하나이다. 북송의 수도였다.

2 역사

BC 364년 전국시대위나라(魏)의 수도였고, 당시 이름은 대량(大梁)이었다.[1] 황하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시내에 많은 운하를 파서 교통과 물류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장점은 단점도 되는데, 평원에 위치해있고 사방이 평야이기 때문에 외부침략에 매우 취약했다. 뿐만 아니라 홍수수공에도 매우 약했다.

진나라의 통일 전쟁 중에 위나라의 완강한 저항에 노한 진시황의 명령에 따라 이곳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그리하여 한동안 이후 한나라후한, 위진남북조시대의 수백년 동안 이곳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의 주요 고대 도시중에서 삼국지에 나오지 않는 거의 유일한 도시가 된다. 후한과 삼국시대에는 진류(陳留)군[2] 관할이었고, 오늘날의 카이펑 지역은 당시에는 진류군 준의(浚儀)현에 속했다.

개봉의 중흥은 수나라때 만들어진 대운하가 널리 사용되는 당나라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이때 대운하가 흐르는 수운의 중심으로서 상업도시로 성장한다. 이 운하는 산동성까지 흘렀다. 재건된 이름은 변(汴)이라고 했고, 당나라가 망한 이후 5대10국시대가 시작되자 중원에 위치한 여러 대국[3]의 수도가 되었다가 결국 후주의 뒤를 이은 송나라의 수도가 된다.

송나라 시대는 개봉보다는 동경(東京)이나 변경(汴京)이라고 주로 불렸다. 금나라 시기에도 이 이름으로 많이 불린듯. 그러니까 포청천이 드라마에서 개봉부라고 하는 것은 사실 고증오류다. 북송의 엄청난 경제력으로 이곳은 매우 번화했으며, 상업도시답게 여러가지 사건이 많았기 때문에 포청천 전설이 나올 수 있었다. 11세기가 최고의 리즈시절이었으며, 북방민족의 내습을 대비하여 삼중벽을 장비하고 있었고 당시 인구는 40만에서 100만 정도로 추정받고 있다.[4]

그러나 이렇게 삼중벽으로 방비하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평야에 위치했기 때문에 북방민족의 침략에 취약했다. 1127년 금나라(여진족)의 침입으로 이곳은 함락되었고, 황제가 포로로 잡혀가는 정강의 변이 일어나 금나라의 영역이 된다. 이때부터 이곳은 쇠락하기 시작했으나 그래도 금나라 제2도시 노릇을 한다. (금나라의 수도는 현재 북경인 중도中都) 이후 남송과 몽골이 침략하여 금나라가 털리자, 금나라는 금선종 때 이곳을 수도로 삼게 된다. 그러다가 금이 무너지고 남송이 옛수도를 되찾는가 싶더니 다시 몽골 제국에 털린다. 이때 몽골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후 명나라때 다시 재건되는가 싶더니 이자성의 반란때 명나라군의 수공으로 시내가 수몰되었다. 이 때문에 다시 깡촌으로 변했다. 청나라 시대 강희제가 이곳의 재건을 명하였지만, 홍수에 취약하여 여러차례 수몰이 일어나 더이상 발전하기가 힘들었다.

3 기타

이곳까지 유대교도가 흘러들어서 카이펑의 유대교도도 유명하다.

현재는 4백만 인구가 거주하는 중국에서는 중규모 도시이지만, 과거의 영화를 잇지 못한채 중국에서 못사는 편이다.[5] 가장 최근에 역사적으로 이 도시가 언급된 일로는 문화대혁명 시절 국가주석이었던 류사오치마오쩌둥에 의해 숙청되어 귀양 왔다가 홍위병 의사의 치료거부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1. 위나라의 원래 수도는 위나라의 서쪽에 있던 안읍(安邑)이었으나(남쪽으로 흐르던 황하가 위수와 합쳐져 동쪽으로 향하는 그 꼭지점 부근에 있었다.) 위혜왕 대에 이르러 진나라와의 지속된 전쟁에서 패퇴하면서 수도 안읍의 방위가 위태로워지자 동쪽의 대량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안읍은 진나라가 하동군을 설치했다.
  2.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의 초기 조조 세력의 거점인 그 진류 맞다.
  3. 후당 제외, 후당의 수도는 낙양이었다.
  4.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연구자에 따라 추정치의 편차가 크다.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코르도바,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와 함께 당대 최대의 도시로 꼽히고 있다.
  5. 사실 기후변화때문에 당나라 시대까지 번영를 뽐냈던 시안, 뤄양을 비롯한 여러 고대도시들이 지금 다 안습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