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 「왕상등전(王祥等傳)」 | |||
왕상 | 정충 | 하증 | 석포 |
何曾
(199 ~ 278)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관료. 자는 영고(潁考). 하기의 아들.
진국 양하 사람으로 본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우면서 정숙해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 색을 탐하지 않았다고 하며, 노년이 되자 아내와 서로 볼 때 의관을 바로 해 손님처럼 대했다고 한다. 하증은 남쪽, 아내는 북쪽을 바라보고 두 번을 절해 술을 다 마시면 방을 나갔는데, 한 해에 이렇게 하는 것이 불과 2, 3번 뿐이었다고 하며, 부현이 순의와 합쳐 증삼과 민자건처럼 효성이 있다면서 군자의 근본이 있다고 칭찬했다.
조예가 즉위하자 전한의 선제의 예를 들어서 농업 진흥의 중요성을 건의했으며,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할 때 사마의에게 부관을 붙이라고 상소했지만 조예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상이 정권을 잡자 사마의가 병에 걸렸다고 했는데, 하증도 이에 맞추어 병에 걸렸다고 했다.
249년에 사마씨를 도와 조상 일파와 싸웠으며, 조방을 황제로 옹립하는 모의를 하증이 맡았고 사예교위가 되었다. 완적이 모친의 상중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사마소의 연회에 참석해 술을 마시면서 고기를 먹자 예법을 무시하는 행동이라면서 사마소에게 일러바쳤지만 완적이 쇠약해져 있다면서 오히려 사마소가 나무랐다고 한다.
255년에 관구검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관구검의 아내는 순씨였는데, 남편이 반역자이면 아내가 연좌되기에 친척 관계에 있는 순욱, 사마사 등이 돕자고 했다. 순씨는 참형될 뻔 했다가 사마씨 정권의 실세였던 순의의 친족임이 감안되어 이미 죽은 관구전과 이혼하는 형식으로 죄를 면했는데, 순씨가 자신의 딸인 관구지도 살리기 위해 하증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하증은 순욱, 사마사의 뜻을 받들어 여자가 시집을 가게 되면 친정집의 일에 연루되지 않게 법령을 고치자고 건의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져 관구지의 목숨을 건지게 했다.
273년에 사도가 되었다가 276년 8월 21일에 태부가 되었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 매일 식사에 돈을 1만전이나 썼지만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고 투정했다. 유의 등이 수 차례 하증이 사치스러워 정도를 잃었다고 탄핵했지만 사마염은 그가 중신이라 책임을 묻지 않았으며, 278년 9월에 태재가 되었다가 낭릉공의 작위를 지내면서 12월 13일에 죽었다.
도관종사 유향도 하증을 탄핵하자 유향을 자기 부서로 선발했다가 항상 작은 일로 유향을 처벌했다. 밖으로는 관대했지만 속으로는 남을 시기했으며, 당시에 사마염의 권력에 버금가는 사공 가충에게 들러붙었다. 가충이 술을 마시면서 유순과 언쟁을 하자 가충의 편을 들면서 유순을 깎아내려 정직한 사람들에게 비난받았다.
시호는 효공(孝公)으로 진수는 하증에 대해 오만하고 사치해 천하에 이름이 있었지만 만약 시호를 주는 규정을 엄격하게 따른다면 명성과 실제가 부합되지 않으며, 품행이 방탕한 것을 추(醜)라 하므로 그에게는 추무공(醜繆公)이라는 시호를 줘야 한다고 혹평했다.
서예가로써는 고초서에 뛰어나 당시 사람들이 보배로 여겼다고 하며, 일설에는 초서를 잘 써 매우 멋이 있으면서도 꾸밈없이 수수했지만 고상한 것이 적었다고 한다. 당나라의 장회관이 하증의 글씨에 대해 공자의 말을 빌렸는데, 본질이 문채보다 뛰어나면 거칠다고 했으니 이것을 일컫는다고 했다.
그의 아들로는 하숭(何嵩), 하소(何邵), 하기(何機), 하선(何羨) 등이 있으며, 하소는 중서령을 지냈고 결국 하씨들은 사치를 부려서 영가 말년에 멸족되었다.
2 미디어 믹스
삼국지 9 일러스트 |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36/27/70/78. 배반 말고는 이렇다 할 병법도 없다. 후반부에는 이런 문관도 감지덕지 쓰게 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