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 전투 | ||
날짜 | ||
1894년 음력 10월 23일 ~ 11월 15일 | ||
장소 | ||
조선 충청도 공주 우금치 고개 | ||
교전당사자 | 조선, 일본 제국 | 동학농민군 |
지휘관 | 신정희 허진 이두황 이규태 미나미 모리오 마사이치 | 전봉준 손병희 |
병력 | 조선군 3,200명 일본군 2,000명 | 남접군 1만명 북접군 1만명 |
피해 규모 | ||
결과 | ||
동학농민군의 패배, 동학 농민 운동의 와해 |
1 개요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이 연합해 동학농민군의 주력과 교전, 섬멸한 전투.
2 전투 상황
동학 농민 운동 1차 봉기는 동학농민군이 선전해 전주성을 차지하기까지 했으나, 외국군이 개입하려고 하자 조정과 합의 하에 자진 해산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한양을 점령하고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함과 동시에 자주국 선언을 강요하고 고종의 이름을 빌어 조선의 모든 청군은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함으로 이는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된다. 조선을 집어삼키려 했고 조선을 입맛대로 개혁시키기 위하여 경복궁에 침입하고 남산에 대포를 설치하는 등 갑오개혁이라고 쓰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내정 간섭이라고 읽는 단계에 들어가자, 동학군은 이에 분노해 일본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동학 농민 봉기를 일으킨다.
이 때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의 중심이라 할만한 북접은 전봉준을 부정하였지만[1]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협력을 선언하게 되고 손병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합류하였다. 이렇게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지방의 남접군[2]과 손병희 등이 이끄는 경기 남부, 충청 지방의 북접군이 논산에서 만나 2만에 이르는 대군이 결집되었고 이들은 한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군과 일본군이 연합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준비를 했다. 이때 이 전투의 관군 & 일본군 연합에서 지휘권을 가지고 전투를 주도한 것은 일본군이었다.[3] 농민군은 정부군과 일본 연합군에 대항해 싸웠으나 무기 숙련도가 높은 일본군이 돕는 정부군에게는 화력에서 열세[4]였고, 결국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도 전봉준 장군의 주력 부대가 패배하면서 우금치 전투는 농민군이 대패하고 이 후 각개격파를 당하면서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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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실 처음에는 부정 수준이 아니라 남접군 몰아내겠다고 출병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북접은 난이 정치성을 띄는 걸 경계하였으며 특히 대원군과의 결탁을 탐탁치 않아 하였다. 이걸 막은 것은 남접이 생각보다 잘 싸웠기 때문이지, 일본과의 문제가 벌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 ↑ 사실 남접의 중심은 전봉준이 아니라 충청도의 서장옥이라는 사람이다. 허나 이 시점에서 서장옥은 그저 전봉준의 부관 수준이 되어버렸다.
- ↑ 이 때 일본군은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과 자체 개발한 무라타 소총을 썼고 관군 역시 레밍턴과 스나이더 등을 썼다.
- ↑ 일단 개인화기의 수준 차이, 보유 수량 차이도 컸지만, 일본군에게는 야포와 개틀링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관총이 어떤 역할을 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포병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안다면 동학농민군의 운명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