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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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에 대해서는 조선군(일본 제국)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조선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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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강력해보인다. 마법같은거 쓸것같아보인다고 카더라.
조선군의 상징인 좌독기.

말 그대로 조선의 군대. 대한제국이 조선을 이으면서 대한제국군으로 이어졌으나,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 하면서 대한제국군은 해체되었다.

1.1 활약

1.1.1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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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과 마찬가지로 조선군 역시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눠진다. 중앙군은 고려 시대부터 있던 2군 6위에 태조 때 친위부대인 의흥친군위 좌,우위 2위를 더해 3군 10위로 구성된 의흥삼군부로 구성되었다. 각 10위에는 취재라는 시험을 통해 선발된 갑사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지방군은 크게 육진군(육군)과 기선군(수군)으로 나눠진다. 육진군은 각 도에 있는 영과 진에 복무하며 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는 영진군과 돌아가며 서울에서 궁궐을 지키던 시위패 등으로 구성되었다. 기선군은 말 그대로 수군으로 수영에 배치되어 수군절도사의 지휘를 받았다. 여기에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도 있었다.

현직 관료, 학생을 제외한 16세 이상 60세 이하 모든 양인 남자는 현역 군인인 정군이나 정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으로 편성되었다.

이 시기 조선군은 고려 시대부터 있었던 북방 방비 및 왜구 토벌을 계속 이어갔다. 지금의 압록강두만강을 잇는 국경 확립에 기여한 4군 6진 개척, 1396년과 1419년에 있었던 2차례의 대마도 정벌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후로는 국토 방어에 힘쓰며 가끔 예방전쟁 성격을 띠고 여진족 부락을 토벌하는 것 이외에는 대외 확장은 없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 진법을 계승하고 후일 집대성해서 문종 때 오위진법으로 나타난다. 오위진법은 군대를 5개 부태로 나눠 보병과 기병을 균형있게 운용하여 적을 막으면서 각 부대간 상호지원할 수 있게 만든 탄력적인 진법이다. 기병은 창기병 40%, 궁기병 60%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보병은 5가지 병종으로 구성되었다. 방패와 환도로 무장한 팽배수, 소형 총통으로 무장한 총통수, 창으로 무장한 창수, 긴 자루가 달린 외날 칼인 장검으로 무장한 장검수, 활로 무장한 궁수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총통과 팽배수는 무조건 포함되어야 하며 나머지 병종은 상황에 따라 가감하거나 도끼, 철퇴로 대체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구성된 조선군은 4군 6진 개척과 대마도 정벌을 통해 전투력이 검증되었으나 세조 때 의흥삼군부가 오위도총부로 개편이라 쓰고 개악되고 총통위 폐지, 지나친 궁시 위주의 고과, 보법으로 정군 1명당 보인 3명으로 편성된 것이 보인 2명으로 줄어들면서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점차 약화되기 시작한다. 급기야 성종대에 이르러선 대간이 화차가 낡았다고 버리자고 해서 버리거나, 병선들이 썩고 있다는 윤필상의 보고가 들어기도 한다.(...) 특히 보법이 시행되어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자 정군들이 보인이 지어야 할 부역까지 지게 되면서 군사들은 보인에게 받은 비용으로 사람을 사서 대역시키는 방식이 점차 퍼지게 된다. 결국 1541년 중종 36년에 수포제가 시행되어 군역부담자에게 번상가를 포로 일괄 징수해서 그 비용으로 군인을 고용하게 된다. 이후 양인 장정들은 대부분은 1년에 군포를 2번 내는 납포군으로 변환된다.

1.1.2 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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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조선군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고 각지의 산성을 보수하고 이순신등 유능한 장수들을 승진시키는 등 준비를 했다. 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일본군의 규모와 일부 지휘관들의 도주로 인해 초반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활약, 의병들의 봉기와 항쟁, 명의 대군의 참전, 그리고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한 관군의 반격으로 개전 1년 만에 전세가 일본 우세에서 교착상태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심유경의 강화협상으로 흐지부지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칠천량 해전으로 전라도가 일본군에게 유린당하게 된다. 하지만 명량 해전직산 전투에서 패배하고 다시 일본군은 수세에 몰려 왜성에 의지해 방어만 하다 결국 일본으로 철수하게 된다.

전쟁 중에 일본군이 가진 조총의 위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 조선은 조총을 도입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1593년에 조총을 모방 생산하는데 성공한다. 여기에 김충선같은 항왜들의 도움을 받아 조총 제작 기술이 발달하여 임란 이후에는 조총이 보병의 주력 무기로 정착하게 된다. 또한 명군이 불랑기포로 많은 활약을 선보이자 임란 이후로 불랑기포가 주력 화포로 많이 쓰이게 된다. 기존 총통들도 꾸준히 개선해서 사용한 것은 덤.

기존 군제가 효용성이 없다는 판단을 가진 조선은 1593년 새로운 중앙군으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를 토대로 조총을 쓰는 포수, 도검으로 무장한 살수, 활로 무장한 사수로 구성된 삼수병 체제로 전환한다. 지방군 역시 1594년에 속오군 체제로 개편되어 기존의 진관체제를 대신하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군은 정묘호란병자호란에서 청군에 또 다시 패하였다. 조선은 이괄의 난으로 아작난 평안도 북방군을 대신해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을 신설해 중앙군을 보강하고, 국경에서 한양까지 산성을 쌓아 청군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청군은 수도만을 노리고 요새를 우회하고 속공으로 나왔다. 여기에 지나친 조총수 위주의 보병 편제로 인해 청군 기병을 저지할 수단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다.

이를 보완하고자 조선군은 전거와 기병, 보병을 함께 운용하는 거기보전을 도입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산이 많은 한반도의 특성 상 전거를 운용하기에는 제약이 많았고 거기보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전거와 군마를 대량으로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살수가 사용하는 무기중에서 기병을 상대하는데 적절치 않다고 판단된 장창을 빼고 구창과 협도곤을 추가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후 숙종때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금위영을 신설하면서 오군영체제가 완성되고, 수도인 한양 도성과 위성도시들을 지키게 된다.

왜란과 호란 이후부터 조선군은 조총수가 태반인 보병과 활과 편곤으로 무장한 기병, 불랑기포와 기존 총통을 다루는 포병전력으로 구성된다. 화포를 만드는데 쓰이는 구리와 화약을 만드는데 필수인 유황 부족으로 조선군이 사용한 화약 무기는 동시대 유럽의 군대가 사용한 것보다 어느 정도 뒤쳐진 것은 사실이다. 구리나 유황을 거의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진산 근방에 대량으로 채굴되기 시작해서 겨우 자급자족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 숙종때다. 그나마 전술은 동시대 유럽에서 쓰던 선형진과 유사한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과장된 감이 있는데 18세기 전반까지 조선이나 서양이나 화포제작법에는 토모를 사용했고 토모는 습기가 차고 무엇보다 규격화로 제작하기 어려웠다. 대원군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토모의 습기는 화포를 성능을 떨어뜨렸다. 그러던 중 그리보발이 대포 주조틀의 표면을 깍아내는 '천공기술'를 사용하면서 규격화되게 되었고 무엇보다 1750년대에 '강선'이 등장하면서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강선'이 개발되었음에도 1780년에도 활강포를 생산한 걸 보면 불랑기포처럼 불완정했던 것 같다.

한편 바다를 지키던 수군은 강화도 통어영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통제영으로 나눠지게 된다.

어찌되었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효종 때를 지나며 조선의 방위체계는 정조때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1.1.3 말기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조선의 방위체계도 무너지기 시작한다. 가뜩이나 오랜 평화로 군대를 크게 유지할 필요성도 없었기에 조선군의 군사력은 약화되어 서구의 이양선들이 해안에 나타나도 이에 대항할 배 한척조차 없게 된다. 그나마 대원군이 집권하여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고 서구식 포가를 도입하고 신병기 개발에 노력하고 오군영을 다시 보강하면서 약간이나마 나아진다.

이러한 노력덕택에 병인양요신미양요에서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등으로 조선 경제를 파탄내면서 다시 강화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재정이 사라지게 되고 고종 친정 이후 군에 대한 지원이 끊기면서 그 결과 운요호 사건 때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무너진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조선군도 변화를 맞는다. 우선 삼군부를 철폐하고 통리기무아문 아래 군무사를 설치하고 오군영 병사 중 정예병 80명을 선발해 별기군으로 편성한다. 1881년에는 오군영을 통폐합해 궁중호위를 맡는 무위영과 수도방위를 맡은 장어영으로 개편한다. 또한 서양의 신무기를 도입하고 보급하는데 노력한다. 하지만 임오군란 크리로 주춤되고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면서 별기군은 해산된다. 그리고 청군이 조선에 진주하면서 중앙군은 청의 훈련을 받은 신식군대로 변모한다. 지방군 역시 신식 군대화가 진행되어 강화도를 지키는 친군심영, 평안도를 지키는 친군서영, 경상도를 지키는 친군남영, 경기 연해를 지키는 기연해방영이 설치된다.

신무기 도입이 꾸준히 이뤄져 개틀링 기관총, 12파운드 청동포, 마우저 소총 등 다양한 신무기들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기술력과 재정이 부족해서 근대식 신무기를 자체적으로 대량 생산할 체계를 꾸리지 못하고, 무기를 너무 다양하게 도입해서 운용하는데 차질을 빚는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중앙군으로 시위대가, 지방군으로 훈련대가 설치되어 근대식 군대로 재편된다. 하지만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일본의 입김이 미치는 훈련대가 해산되고 중앙군인 친위대와 지방군인 진위대로 개편된다. 을미사변으로 의병봉기가 빈발해지자 병력규모가 증강되어 중앙군은 4400명으로, 지방군은 3031명으로 편성된다.겨우? 꼬라지가 완전히 트레비존드 제국판박이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조선군은 대한제국군이 된다. 자세한 것은 대한제국군을 참고할 것.

1.2 군사 과학기술

대규모 전투로 나라가 혼란했던 조선 초기의 북방 영토 개척 시기, 왜구 격퇴 시기 및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기술적인 발전이 있었다. 주로 중국에서 들여온 화포를 개량하는 방식으로 전쟁 중 발전하였으나 평화기에는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계속 그자리를 머물렀다는 한계도 있다.

신기전(神機箭)은 여말선초 등장한 주화를 개량한 것으로, 1448년(세종 30년) 만들어진 로켓 개념의 무기이다.[2] 개발에만 그치지 않고 신기전을 실전배치 및 운용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은 일부 독자적인 과학적 기술의 발달이 있었으며 로켓 형식의 무기를 운용할 줄 알았다. 신기전을 발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화차는 신기전기(神機箭機)로 불렸고 지금도 설계도가 남아 있다.

신기전은 고려시대 최무선에 의해 발명된 로켓병기인 주화(走火)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병기도설〉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함께 비장의 무기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기전은 화약의 사용량이 너무 크고 명중률이 떨어져 실효성은 떨어졌다고 한다. 신기전은 크기와 형태에 따라 대신기전(大神機箭),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 중신기전(中神機箭), 소신기전(小神機箭)으로 나뉜다.

대신기전은 길이 5.6m, 사거리 2km, 최대 3km. 공격용 발화통을 장착한 무기이다. 1448년 세종 때 만들어졌다고 하며 90개가 제조되어 의주성에서 사용되었다. 화약은 약 3kg으로 조총 1000회 발사 분량이다. 목표 지점에 다다르면 폭발물이 자동으로 터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한번에 1발씩만 발사할 수 있다.

산화 신기전은 길이5.3m. 사거리 2.4km, 최대 3.4km. 공격용 발화통을 장착한 무기로 대신기전보다 길이만 짧은 것뿐이지 사거리나 폭파범위는 다르지 않다. 다만 탄두에 철편(쇠파편 조각)이 내장 되어 있어 살상능력이 더욱 강력해진 무기이다.세계 최초의 2단 로켓이다.1단이 다 소모되면 지화가 점화되어 600미터를 더 날아갈 수 있다. 한번에 1발씩만 발사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비격진천뢰라는 폭발시간을 조절하여 내부의 철조각으로 주위에 피해를 주는 포탄도 개발하였다. 주로 인마 살상용으로 사용되었으며 바위에도 파편이 박힐 정도로 강력한 성능이라고 한다.

1.3 주요 장비

조선시대의 무기 (1392~1895) 참조.

1.4 유명한 군인

1.5 주요 전쟁

1.6 대중 매체

임진록 2에서는 당연히 등장한다. 주인공 세력 답게 어느 하나 딱히 튀는건 없는 그냥저냥한 무난한 진영. 자세한 설명은 임진록 2/조선 유닛 항목 참고.

1.7 기타

다른 나라 군대와 달리 부사관에 해당되는 계층이 조선군에 없었다. 그나마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던 갑사가 부사관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세조가 오위도총부를 만들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사실상 없게 되었다. 말단 부대를 통제하고 지휘할 부사관이 없으니 전투 시 장군이나 장교가 전사하거나 사기가 조금이라도 꺾이면 일선부대가 순식간에 와해되는 건 당연지사. 초급 군관이 있지만[3] 무관을 많이 뽑지 않다보니 말단 부대를 다 통제하기엔 수가 부족했다. 부사관이 군대의 허리나 마찬가지인 점을 고려하면 조선군의 가장 큰 약점이라 할 수 있다.

문치주의도 있지만 군대를 통제하기 위해 문신들이 지휘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일이 많았다. 감사-병사가 이중으로 군대를 지휘하는 등 군사 제도 자체에 문신의 개입이 허용된 탓이 크다. 감사가 해당 도의 병사와 수사를 겸임하는 것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어 있었다.[4] 군사 지식이 전무한 문신들의 지휘권이 높다보니 무신들이 이러지도 못하고 결국 패배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곤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임진강 전투. 뭐 그래도 과거에 500년 내내 무과도 있었으니 고려때에 비하면 무에 대한 대접이 많이 좋아진것이다. 게다가 이런 사례는 조선만 있는게 아니라 고려와 중국도 이랬다.

1.8 미디어

제작비 여파 때문인지 미디어에 나오는 조선군은 죄다 근무복 평복. 때론 그냥 포졸복 차림으로 나오는 게 허다하다. 고증이 그만큼 엉망인데 여러 무기로 무장한 조선군은 죽어라 당파만 들거나 화살을 든 정도로만 나오는 게 드라마나 영화,애니메이션,만화에서 허다하다. 하지만 기록이나 여러 자료를 봐도 위에 나온 이미지처럼 조선군도 갑옷을 입고 싸웠다. 임진왜란 당시, 선교사로서 조선에 온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군은 검은 갑옷차림이 많다라고 적었는데 위에 나온 갑사 갑옷을 말한 듯 하다.

1.9 참조항목

2 조선 주둔 일본군

항목참조.
  1. 조선전쟁사 분석서 '조선전쟁 생중계'의 삽화를 담당한 분의 그림. 조선 전기의 찰갑을 비롯한 군졸의 일반적인 무장 상태가 잘 고증되어 있으나, 알다싶이 조총은 임진왜란 이후인 조선 중기부터 사용되었다.(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조선은 왜란 이전부터 조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조총 항목 참조.) 물론 찰갑은 조선 중기에도 여전히 쓰였다.
  2. 다연장이 아닌 일반 로켓 개념의 무기는 1232년 중국의 비화창(飛火槍)이 최초이다.
  3. 현대의 소대장이라 할 수 있는 기총이나 중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초관
  4.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충주에서 신립의 기병대가 무너지자 전라도 군사들이 한양을 지키기 위해 북상했는데, 전라감사가 이들을 이끌고 전라병사는 그냥 임지에 남아있었다... 결과는 용인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