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폭격

元山爆擊

1 함경남도(북한 기준으로는 강원도)의 도시 원산시에 대한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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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경에 촬영한 사진, 아직 시가지나 건물들이 온전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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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의 사진, 그래도 굴뚝과 건물들은 아직 남아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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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의 원산지역 항공사진, 시가지는 흔적도 없고 크레이터만 숭숭...

원산시6.25 전쟁 기간 중(시작부터 끝까지) 실제로 미합중국 공군으로부터 틈만 나면 이라기 보다는 맨날 공습을 당한 북한의 대표적인 항구 및 교통요지, 전략 요충지로 동해안의 중요한 항구며, 함경도 방향에서 내려오는 물자를 평양이나 휴전선 방면으로 나누어 보내는 갈림길 및 이를 뒷받침하는 철도교통의 요지, 게다가 전쟁발발 전까지는 중화학공업까지 발전한 도시였다. 전후에는 폭격으로 인해 평양직할시와 함께 폐허가 된 도시로 가장 상징적인 곳이었다. 참고로 평양은 한국전쟁 휴전시 멀쩡한 건물이 딱 2채뿐이었다. 말그대로 어느 분의 취향대로 석기시대로 돌아갔다.(...)

게다가 오로지 공군의 폭격만이었던 평양과는 달리, 원산은 항구도시라는 특성이 겹쳐서 미합중국 해군함재기 폭격과 전함, 순양함, 구축함함포 사격에 원산 부근의 섬을 장악한 도서방어부대의 공격까지 추가되어 쏟아진 화력의 크기는 더 컸으며, 단지 원산에서 파괴될 시설이 완전히 사라져서 더 이상 의미있는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1951년 초 이후에는 원산에서 숙박하거나 낮잠을 자는 것은 끔살과 동의어가 되었다. 따라서 용무가 있는 사람은 틈을 보아 잽싸게 원산에 들어갔다가 황급히 나와야 목숨을 건질 확률이 높았다고 한다. 결국 종전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원산과 그 주변은 크레이터 천지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존재하는 원산시의 모든 건물들은 다 1953년 이후에 건설된 건물들이다.

사실 당시 북한군에게 해군력이나 공군력이 있었더라면 원산폭격을 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의 북한군은 100% 육군[1] 밖에 없었던 데다가 그나마도 방공체계 자체가 아예 전무했는지라 이 때문에 공중폭격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해서 원산이 이 지경이 나도록 폭격을 당한 것이다.

참고로 원산에 대한 폭격은 1953년 7월 27일 오후 9시 58분에 종료된다. 휴전이 실제적으로 시행되는 시각이 오후 10시였다(...)

이후 1968년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나포당하자 보복 타격으로 원산에 대한 재폭격이 검토되기도 했었다. 당시는 냉전이 극도로 치달은 시기였기 때문에 까딱했으면 진짜 실현됐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물론 실시되었다면 우리는 여기에 없을 수도 있다

2 가혹행위

원산폭격(가혹행위) 문서로.
  1. 물론 공산군도 공군은 갖고 있긴 했지만 그것은 중공군으로 위장한 소련군들만 공군이였다. 그런데 미군은 정찰을 통해 이들이 백인임을 간파해내서 소련의 전쟁개입을 알고 있었으나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서 그냥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