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블로호 피랍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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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한국어: 푸에블로 호 피랍(납치) 사건
영어: USS Pueblo incident
중국어: 普韋布洛號危機
일본어: プエブロ号事件

미합중국 해군의 정보수집함(AGER-2) USS 푸에블로 함이 1968년 1월 23일 북한 동해상 원산 앞바다에서 조선인민군 해군공군의 공격을 받고 강제 나포당한 사건. 승조원 83명 중에서 나포도중 총격으로 1명이 사망하였으며, 나머지 82명이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훗날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제대로 표기하면, 푸에블로가 해군 함정이므로 호가 아닌 함이 맞으나, 육방부 마인드 쩔던 시절인당시에 이를 구분하지 않고 호를 붙여대던 와중에 정착된 사건명이라, 문서 제목에서만은 호라고 쓴다.

2 푸에블로

푸에블로 함은 배수량 900톤 미만의 소형 함선으로 최대속력은 시속 13노트(24km/h)에 불과했으며, 자체 무장은 50구경 기관총 2정 뿐이었다.

1944년 미 육군용 소형 화물선으로 건조되었으며, 1966년 미 해군에 이관된 후 정보수집함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3 나포 이후

나포 사건 불과 이틀전에 북한군 특수부대원 30여명이 박정희 암살을 목표로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했다가 대부분이 사살당하고 김신조가 생포된 소위 1.21사태가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중무장한 특수부대가 출현하고, 불과 이틀만에 동해에선 미해군 함정이 나포당하면서 한반도 주변 정세는 그야말로 전쟁 전야를 방불케 하였다.

미군은 대응책으로 해군 기동함대와 공군 전폭기를 한반도 주변에 전개하였지만[1] 인질이 한두 명도 아닌 82명이나 잡혀있으니(승조원 83명 가운데 나포 과정에서 1명이 총격으로 전사) 섣불리 건드리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특수부대가 인질을 구출하는 거야 영화 속에서는 당연한 레파토리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 더군다나 당시는 베트남전이 진행중이었고 사건 발생 1주일 뒤 베트남에서는 베트콩테트 공세가 개시되었으니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동서 양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냉전(冷戰)이 아예 열전(熱戰)으로 격화되던 시기 베트남에서는 미군 장병들이 희생되는 와중에 북한에 잡힌 승조원들은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강대국의 체면도 접어두고 북한 영해 침범을 시인한다며 애처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했던 게 미국의 협상 방침이었다. 더군다나 미국에서는 민주당 린든 존슨 행정부가 물러나고, 공화당 리처드 닉슨 당선자가 취임을 준비하던 정권 교체 시기였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몸을 사려야 하는 것도 있었다.[2]

결국 함장 버처 중령 이하 푸에블로 함 승조원들은 공개적으로 세계 각국의 기자단 앞에서 북한 영해 침범과 북한에 대한 해적 행위를 자백하는 문서에 서명했으며 미국 정부도 사과하는 선에서 마무리 되었다.


사진의 인물은 스티브 엘리스 상병, 브레드 크로우이 병장, 존 실링 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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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찍은 단체 사진. 이때 북한측이 손가락의 의미를 캐묻자 하와이식 인사법이라고 둘러댔다는 카더라가 있다. 이후 진짜 의미를 알게 된 북한은 격분했지만...)

이런 굴욕 끝에 미국은 그나마 미합중국을 위해 싸운 군인은 반드시 고향에 돌려보내며 죽었으면 시신이라도 거둬들인다는 원칙은 지킬 수 있었으니 나포 11개월 뒤인 1968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에 비로소 승조원 82명과 전사자 시신 1구는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었다. 당사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생애 최대의 성탄절 선물이었을 게다. 전사자 유족에게는 안 된 일이었겠지만.[3]

4 사건 분석

사건 장소가 원산 앞바다(북위 39도 25분, 동경 127도 54분)라 하였지만 북한측 영해를 침범했는지 공해상에서 나포당했는지는 북한과 미국이 각자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원산 해안을 기준으로 하면 12해리(약 22km)가 넘지만 원산 앞바다의 작은 섬 여도를 기준으로 하면 12해리 이내의 해역이기 때문이다.

승조원 송환이후 열린 미 해군 조사위원회 해군 장교들과 군사전문가들이 푸에블로 함 승조원들을 상대로 2달에 걸쳐 조사를 벌였는데 30년만에 공개된 조사위원회 보고서에는 푸에블로 함이 북의 영해를 11번 침입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지도를 보면 원산 앞바다는 동해안치고는 해안선이 복잡하고 작은 섬들이 많으므로 푸에블로 함이 영해 기선을 설정할 수 있는 섬들을 실수로 간과하였는지 의도적으로 무시하였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열쇠라 하겠다.

언론인 리영희의 여러 서적이나 2001년 방영된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36회 <푸에블로 나포 사건> 편은 푸에블로함이 고의적으로 영해를 침범했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사건 당시에는 당연히 단순실수였다는 미국의 주장을 지지했다. 현재는 이 사건 자체가 오래 지났기 때문에 국방부 관련 문건에서도 잘잘못 언급 없이 그냥 나포되었다는 사실만 적어놓고 있다.

최근 해제된 미 국방부 기밀문서에는 "가능한 북의 해역에 가깝게 접근하라 북한의 반응을 알아보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공연한 정탐행위에대한 북의 반응을 알아보는것도 이 배의 임무중 하나였다.

한편 푸에블로함이 나포당한 것은 미국이 북한군의 경계태세를 지나치게 얕봤기 때문이란 주장이 있다. 1950년대에는 북한 해군력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미군이 북한 해안을 제 집 드나들듯이 했고 이게 자주 반복되니까 북한 근해를 가더라도 별다른 대비책이 없었다. 이에 반해 북한측은 초계정 4척으로 푸에블로 함을 사방에서 포위할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했고 미국 전투기가 구출하러 올 것에 대비해 전투기까지 출동시켰다.

5 사건 종료 이후

5.1 푸에블로 함

푸에블로 함은 동해안에 정박되어 있다가 1999년 공해상을 크게 돌아 평양의 대동강변으로 옮겨저 당시의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있으며 그 주변은 북한식 안보공원화 되어있다.[4] 인민군 해군 해병(북한의 수병을 뜻하는 단어)들이 상시 의장경계 임무를 띠고 주둔하고 있으며, 안내를 맡는 박물관장해군 대좌는 이 나포작전에서 세운 전공으로 인해 특례로 장령이 아님에도 종신 복무를 보장받고 있다고 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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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으로 옮겨진 푸에블로 함 사진

미군으로서는 켜주지 안한 상징적 존재이다. 그래서 나포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미 해군 함정 리스트에서 푸에블로 함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고 현역함의 자격으로 대우받고 있다. 언젠가는 되돌려 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인듯[6]

2000년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북한방문을 계기로 북미관계가 완화되면서 잠시 푸에블로 함 반환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이후 북미관계 경색과 이어지는 북핵사태 등으로 결국 협상이 좌초되기도 했다. 다만 북한에서 아주 못 돌려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조건만 맞으면 재협상을 통해 반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잘만 풀린다면 미국에 반환될 가능성이 남아있다. 다만 북한에게 두둑한 돈을 줘야 할지도 모른다.

미 해군은 이 푸에블로 함의 나포로 인해 미국은 군사 보안 시스템을 싹 바꿔야 했다고 했는데, 2000년대 미 해군은 전자전기인 EP-3가 무리한 격퇴 기동을 하다 들이받은 인민해방군 해군F-8II 전투기 때문에 하이난다오에 비상착륙 후 기체와 승무원이 한동안 억류됐다 풀려난 사건으로 역시 전자전 장비를 싹 갈아야 했다.

진짜 여담이지만 북한의 미제 딸라 벌이를 위해 북한에 파견 나온 외국인들은 가이드를 가장한 감시자와 동행하면 기본적으로 평양 내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지만 이 푸에블로 함 근방만큼은 여행 코스에 공식적으로 포함된 경우가 아니면 절대로 못 간다고 한다.[7]

5.2 미군 승조원들

푸에블로 함의 함장 버처 중령은 석방후 영해침범 의혹과 범죄 자백서 서명 등의 여러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하지만 피랍 당시 상황은 어쩔 수 없었고[8] 정보수집함의 특성상 절대로 국제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원칙[9] 지켰다는 점이나 기타 상황을 고려해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퍼플 하트 훈장과 포로 기장을 받게 된다. 이후 해군 경력을 이어나가다가 대령으로 예편하고 자서전 집필 후 2004년에 사망한다.[10]

70년대 버처 대령의 회고담을 바탕으로 푸에블로 스토리라는 미니시리즈가 제작된 적이 있다. 여기서 버처 중령 역을 맡은 배우는 나중에 웨스트 윙에 출연하는데 웨스트 윙 에피소드 중에 북한 지역에 들어간 잠수함 실종 건을 다룬 에피소드에서 백악관 회의 중 푸에블로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때 거기 내가 있었다' 라는 배우개그성 대사를 한다.

5.3 북한군 지휘부

나포 작전에 깊숙하게 관여했던 민족보위상(현 인민무력부장) 김창봉과 총참모장 최광조선인민군 고위층 장령들도 작전 성공 후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받았지만, 이후 잡아놓았던 미군 장병들이 본국으로 송환된 뒤 그 후폭풍을 막기 위해, 그리고 세습 체제에 방해가 되는 이유로[11] 죄다 역관광당하고 말았다. 소위 '군사파 숙청' 이라고도 하며 김일성 집권기에 마지막으로 진행된 대규모 숙청으로 기록된다. 해군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차수 계급에 올랐다 해임된 김일철이 현역 시절에 이 작전에 참가했다고 전해진다.

6 사건의 후폭풍

미국이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와중에 푸에블로호 사건에서 보여준 저자세에 자신감을 얻은 북의 김일성 정권은 불과 열달 뒤인 10월 남한내 해방구 건설을 목표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일으켰다.또한 푸에블로호를 납치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주일미군의 정찰기를 격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북한 정권은 베트남전 등 국제정세가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으며 일련의 무력도발을 통해서 자신감을 얻으면서,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선언하고 소위 4대 군사노선을 밀어붙이면서 국가 예산의 거의 절반을 국방비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북한 경제 몰락의 서곡이 되었다. 수송선 하나를 내주고 북한의 경제를 파탄시킨 미국의 한수라 카더라

이 사건이 끝난 후 8년 뒤인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미루나무(美柳,서양버드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폭력사건(이른바 8.18 도끼만행)으로 미군은 재차 한반도 주변에 기동부대를 전개한다. 이번엔 아예 폭격기가 휴전선 상공까지 위협하듯 날아갔고 명령이 떨어지면 한미연합군이 휴전선을 넘어 개성 및 연백(延白)[12] 평야까지 북진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었다고 한다.[13] 이렇게 강력한 대응책에 이번에는 김일성이 쫄아서 유감 메시지를 전해줄 차례. 미군으로서는 푸에블로 함의 굴욕을 어느 정도 만회한 셈.

7 음모론?

일부에서는 이 사건을 미국 고정 간첩인 워커[14]의 활약(?)과 스킵잭급 공격원잠 USS 스콜피온 함이 침몰한 사건[15]을 연관짓기도 한다.

이들에 의하면 스콜피온 함이 침몰한 것은 워커를 통해 얻은 암호체계를 소련이 분석하여 스콜피온의 위치를 파악했기 때문이라는 것. 월간 플래툰지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푸에블로 함은 스콜피온 함의 예행연습 격으로, 미국 NSA의 암호체계를 워커를 통해 손에 넣은 소련이 그것이 정확한 것인지, 혹시 워커가 역정보를 흘린 것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워커의 암호체계를 이용해서 푸에블로를 납치하고, 푸에블로의 암호체계와 넘겨받은 시스템을 비교했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1990년대에 수중 탐사를 통해 스콜피온의 침몰이 훈련 중 음향어뢰가 이상 작동하여 발사한 자함으로 돌아와 터진 게 원인이라는 설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어, 이후로는 스콜피온과는 관련성이 적다는 의견이 대세이다.

8 기타

일부 종북주의자들은 미 해군 역사에서 배가 나포된 적은 없다면서 이 사건을 세계사에 유례 없는 북한의 승리로 표현하면서 자위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미 해군의 배가 나포된 적은 이것 말고도 꽤 많다(...). 남북전쟁 때만 해도 사례가 수두룩하고, 이런 내전을 제외하더라도 트리폴리 해적 원정 당시에 아랍 토후국에 한 번, 진주만 공습 이후 샹하이에 정박중이던 포함 USS 웨이크[16]가 일본에 나포된 경우도 있다(이는 소설 태양의 제국에서도 묘사된 적이 있다.). 다시 말해 굴욕을 당한 배는 푸에블로 함만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북한 영화 대결이 바로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다만 푸에블로 함을 잡으려고 개죽음특공하는 조종사라든가 영웅적인 해군의 활약상 등은 개뻥. 북한 영화다운 과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서 푸에블로 함 함장 버처 중령으로 출연한 배우는 월북 미군찰스 로버트 젱킨스 미 육군 하사였다. 이 영화가 제작될 당시 북한은 미국과 정치 협상을 해야 했기 때문에, 예전 북한 영화들처럼 미국인들이 천하의 개쌍놈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버처 중령 역을 제외한 미국인 역은 대부분 북한 배우들이 서양인으로 분장하고 맡았다.
  1. 이때 한국군F-5를 전개하여 미군에 도움을 주었고 이는 후일 SR-71 항목에 언급된 이야기로 이어진다.
  2. 실제 존슨은 그의 회고록에서 푸에블로 함의 처리를 차기 정권이 해야 한다는 점에 상당히 안도했음을 밝힌다.
  3. 버처 중령이 80년대 회고한 바에 의하면 억류 승조원들이 억류 기간 동안 식사로 단무지를 하도 먹어서 지금도 무만 보면 피한다고 한다. 이들은 억류 기간 중에 전기고문을 당하는 것 이외에도 남한 스파이의 말로라고 고문당해서 피투성이가 된 남녀를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4. 1866년(고종 3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하다 조선 군민(軍民)과 충돌 끝에 격침된 장소이며 제너럴 셔먼 호 격침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당연히, 김일성의 증조부가 이를 주도한 최초의 대미 항쟁이라며 왜곡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5. 북한에선 소장 이상 계급의 군관은 본인이 퇴역을 원하거나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정년없이 종신 복무한다.
  6. 미군의 기본적으로 '낙오된 전우를 버려두지 않는다.'는 개념을 군인정신의 근본으로 깔아놓운 군대이다. 괜스레 6.25 전쟁 미군 유해반환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게 아니다. 하다못해 베트남 전쟁 당시 포로로 잡힌 미군까지 송환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비록 '테러리스트와는 교섭을 하지 않는다'는 정책 때문에 테러리스트의 포로로 잡힌 미군의 생명이 위협받는 일도 있지만, 부득이하게 적진에 놓고올 수 밖에 없었던 전우는 무조건 다시 찾아데려온다는 기본 정신은 아직도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7. 평양 : 프랑스 만화가의 좌충우돌 평양 여행기 참조.
  8. 사실 미 정부부터 어떻게든 인질을 송환받으려 했으니, 버처 중령 탓만 할 수도 없었다.
  9.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 해군이 이집트 함정으로 오인하여 미국 정보 수집함 USS 리버티 함을 공격한 이른바 리버티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USS 리버티 함의 함장 윌리엄 맥고나걸 중령은 서른 명 이상의 승조원들을 잃고 자신도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모항으로 자력항해하여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USS 리버티 함의 임무 자체가 기밀이었기 때문에 중령은 훈장 수여식을 해군본부에서 치루어야 했고(보통 백악관에 당사자를 초청하여 대통령이 직접 수여하는 게 관례이다.), 이후 몸이 성치 않다는 이유로 한직을 돌다가 대령으로 일찍 예편해야 했다.
  10. 80년대 관련 사건을 회고하면서 버처 대령이 한국 TV에 나온 적이 있었는데 당시는 당연히 예편을 했으니 사복으로 출연했다. 그걸 보고 한국에서는 그가 푸에블로 사건 때문에 처벌 받아 짤린 것으로 아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11. 스탈린 시절의 소련이 그렇듯이 군사적으로 공훈이 있는 군부 장성은 목이 붙어있기 무척 어렵다. 괜히 보나파르트 주의자로 몰려서 숙청된 장교가 있는 게 아니다. 단순히 지도자 동지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주코프 원수도 찬밥을 먹었을 정도니.
  12. 강화도 맞은편 황해남도 연안군과 배천군(한자로는 백천(白川)이라 쓰고 배천으로 읽는다). 38선 이남으로 6.25 이전에는 개성, 옹진과 함께 대한민국 관할지역.
  13. 북측이 완강하게 저항할 경우 전술핵 사용도 고려했다고. 후덜덜...
  14. 미 해군의 암호전문가였는데 자발적으로 KGB에 접근해 소련의 간첩이 되어 무려 20년 가까이 미 해군의 암호체계를 소련에 넘겨주다가 붙잡혔다. 미 해군의 평가에 따르면 만약 1970년대에 미국과 소련이 해전을 벌어졌다면경우 워커 덕분에 미 해군 함정들의 위치가 전부 추적되어 미국이 패했을 것이라고.
  15. 스콜피온 함은 푸에블로 납치 사건이 터지고 얼마 뒤인 68년 5월 카리브해에서 훈련 중 실종되었다.
  16. 이 배는 태평양 전쟁왕징웨이 정권에 인도되었고 다시 일본 해군이 빌려서 남양군도에서 수송선으로 쓰였다. 정찰기로 이 배의 존재를 확인한 미 해군은 그 완연한 미국식 구조물 때문에 처음에는 특수임무 중인 자국의 위장선인 줄 알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