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석보

1 개요

月印釋譜. 세조 5년, 1459년에 간행된 조선의 불경 언해서이다.

세종대왕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증보하여 간행한 것으로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초로 나온 한국어 불교 경전이며 국내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왕이 직접 저술한 불경이다. 조선 초기 불교문화의 정수로 꼽힌다.

서강대학교 도서관, 동국대학교 도서관, 고려대학교, 삼성미술관 리움, 연세대학교, 수타사, 보림사 등에 소장되어 있다.

2 편찬 배경

조선 세조는 스스로 호불(好佛)의 군주라고 선언할 정도로 왕자 시절부터 불교를 크게 숭상하였다. 때문에 세종 28년, 1446년에 소헌왕후가 사망하자 어머니에게 갖은 효도를 다하던 세조는 크게 슬퍼하며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스스로 불교 서적을 공부한 후 한국어로 석보상절을 지어 바친다.

이후 1447년 세종이 둘째아들이 지은 석보상절을 읽어본 후 크게 감동하여 석보상절에 대한 찬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짓는다.

이후 세조가 즉위 후 다시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의 내용을 합한 후 증보, 수정하여 월인석보를 편찬하는데 그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번째는 세조 3년, 1457년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가 죽자 이를 애통히 여기며 울던 세조가 죽은 아버지 세종대왕에 대한 죄송스런 마음과 먼저 떠난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근 2년 동안에 걸쳐 증보(增補) 수정하여 간행하였다는 것. 실제 표방한 편찬 배경이며 현재 정설이다.

두번째는 겉으로는 죽은 부모와 일찍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론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 등 많은 신하를 죽인 끝에 세조가 얻은 정신적인 고통, 회한과 두려움, 무상(無常)의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 죄를 씻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추진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3 구성

원본 완질(完帙)은 원래 대략 24권 정도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던 중 25권이 보림사에서 발견되며 전체 25권으로 편찬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문화재청에서 밝힌 현존하는 것은 총 18권이다. 보물 제 745호와 9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단 현존하는 것 같은데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는 보이지 않는 월인석보는 다음과 같다.

  • 권4 : 한국어 위키백과에 재간행본으로 4권이 존재한다고 되어 있으며, 위키백과 월인석보 항목 이에 따라 총 19권이 현존하고 있다고 적혀있다.[1] 또한 1997년 7월 16일 경향신문, 동아일보, 한겨례 등의 신문에서 4권을 찾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으며 보물지정에서 빠져 있다.
  • 권19 : 똑같이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초간본으로 19권이 존재한다고 되어 있고 1999년 경북대의 한 교수가 가야대학교에서 발견했다는 기사가 있다. 관련 기사 하지만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으며 보물지정에서 빠져 있다.

이 두권을 합칠 경우 현재 총 25권 중 20권이 현존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불경이라는 상징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당대 극도로 발달한 판각기법이나 인출(印出) 방법 등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고, 한글 창제 직후에 간행된 자료로 당시의 글자나 말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어 국어국문학 연구에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특히, 권1 앞에 훈민정음 언해본(諺解本)이 실려 있어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 그리고 조선 초기 불교 경전에 대한 포용성과 수용태도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을 참조.

4 기타

2015년 9월에 국가 보물로 지정된 월인석보 권9, 권10이 경매장에 나오게 되었다. 관련 기사 7억 3천만원에 낙찰되었다. 관련 기사
  1. 위키백과에는 권20이 빠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