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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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正斥邪派

1 개요

구한말 최익현을 중심으로 모여서 사학을 배척하고 대외통상을 반대한 파다. 위정척사파는 그들의 사상적 기반인 위정척사론을 통해 성리학과 조선의 유교적 문화를 수호하고(衛正) 그 이외의 종교와 사상은 모두 사학이라 하여 배척할 것(斥邪)을 주장했다. 이렇듯 전통 사회 체제를 고수하였기 때문에 수구당이라 불리기도 했다.[1][2] 구한말에는 개항과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의병활동으로 바뀌었다. 일본의 존왕양이와 성격이 비슷하다.

2 등장 배경

2.1 위정척사론과 의병투쟁

읽다가 파악하겠지만, 이 항목에 언급된 세 학파 모두 주리론적 이기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3][4]

2.2 화서학파

화서 이항로의 학설을 토대로한 학파로 경기 지방을 기반으로 두고있었다.화서학파는 흔히 유리론(唯理論)을 토대로 하고있다 이야기되나, 사실은 이이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과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이 혼합된 이기론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이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화서 이항로와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등이 있다.

이항로는 주자의 학설을 확고히 하고, 우암 송시열을 공자, 맹자, 주자를 뒤이은 도통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송시열의 숭명배청론을 자신의 화이론과 연결하였다. 그의 이기론은 이이성혼의 학설을 절충했는데, 이(理)와 기(氣)가 상호적 관계에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理)가 기(氣)에 비해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이기론을 바탕으로 이를 지향하는 문화는 중화의 문화임을 강조하고, 중국과는 다른 이질적인 문화는 이(理)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사악한 것이라 주장했다. 이항로는 서양의 학문이 통화통색(通貨通色)[5]을 추구하는데 이는 인욕(人慾)[6]의 핵심으로 파악[7]하였으며, 이를 추구하는 것은 이적(夷狄)보다 못한 금수(禽獸)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위정척사파의 서양과의 통상 반대의 기반이 되었다.

이항로는 단순히 이런 통상반대론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 방법론인 내수외양(內修外攘)를 제시했다. 그는 서양의 물건들은 인간의 사치심을 유발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욕구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수입을 금지하고, 더불어 서학에 동조하는 이들을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항로는 단순히 척화론이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없다 말한다. 그가 바라본 근본적인 해결책은 성리학을 통해 사람의 마음에 있는 천리와 인욕을 분별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이항로는 수신(修身)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의 마음가짐 여하에 국가의 안위가 달려있음을 역설한다. 인(仁)을 바탕으로 군주가 덕치를 펼 것을 강조했는데, 사동부승지겸진소회소(辭同副承旨兼陳所懷疏)에서 덕치를 확립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했다. 병인양요 이후에 올려진 이 상소에는 조정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무력증강을 꾀하고 인망있는 자를 중용할 것을 요청했으며, 특히 여기에 쓰여진 의려책(義旅策)은 이후 유림들의 항일투쟁의 실천적 단서가 되기도 하였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문하의 유학자로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그리고 알려진 것과 달리 흥선대원군은 위정척사파와는 거리가 멀었다.

2.3 노사학파

노사 기정진의 학설을 토대로한 학파. 호남 지방을 지역기반으로 삼고있었다.

2.4 한주학파

한주 이진상의 학설을 토대로한 학파.영남학파를 총결하는 학파로, 퇴계학파를 계승하고 남명학파의 영향을 받았다.한주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주 이진상과 그의 문인 중 주문팔현(洲門八賢)이라 불리는 곽종석, 이승희, 허유, 이정모, 윤주하, 김진우, 장석영, 이두훈이 있으며, 곽종석 문하의 이인재, 이병헌, 김창승이 대표적이다.

3 평가

성리학적 질서의 유지와 개화에 반대하는 입장, 존명사대의 실천으로 인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일반 사람들에게는 수구꼴통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위의 평가는 지나치게 비약한 감이 있다. 성리학적 질서의 회복이라는 구호가 단순히 대동사회를 구현하자는 의미뿐만 아니라, 현 집권층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반성 및 결단을 촉구하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기정진의 경우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 삼정의 문란, 특히 환곡제도의 심각한 실태를 지적하고 개혁책을 내놓을 정도로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척사론만 보아도 "서양의 물건은 손에서 나와 한계가 없는데 우리의 물건은 땅에서 나와 한계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서양과 교역할시 불리한 점을 날카롭게 파악해낸 것. 조선책략을 비판했던것도 현실적인게 일본은 경계해야하고 러시아는 이웃나라인데 혐의가 없이 경계하면 위험하고 미국은 허점을 노리고 뭘 요구할지 모르는데 어찌 믿습니까? 인데 생각해보라 일본은 이미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니 더 할말이 없고 러시아는 이 당시 열강중 한나라인데 러시아는 부동항을 원했고 조선엔 원산 등 부동항은 많았다. 그러나 러시아는 조선이 멸망할때까지 조선을 일본을 막는 완충지대로 생각했지 삼키려 들진 않았다. 오히려 이 점에선 답없은 '러시아 꺼져라'를 외친 반면 '서구 열강? 일본? 좋아요.'를 말한 구미파등 많은 개화인사보다 누가 더 위험한지 잘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8] 미국의 경우에도 조선은 서로 위험이 닥치면 도와준다는 내용을 조약에 넣었지만 미국은 도와주지 않았다. 이는 미국이 일본을 선택했던 결과로서 시대적으로 일본이 서서히 강해지던 시점이니 어쩔수 없지만 결과적으론 위정척사파의 의견이 틀리지 않게 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상소를 올리며 만국공법을 참조할만큼 서양=으악 귀신이다! 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교역에 반대한것도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한 최익현은 상소에 '일본의 물건은 사치품인데 우리 물건은 생필품이니 분명히 우리가 손해봅니다!' 라고 했는데 진짜 그렇게 되었다. 이들이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9] 이들이 서구와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이 큰 틀은 틀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게 논점이 벗어난 면이 크지만[10]

또한 위정척사론에서 이야기하는 중화(中華)는 한(漢)족의 유교적 정신을 의미하는데, 청이 만주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기에 한족의 정신을 상실했다는 당대의 관점을 생각해보면... 실제로는 중화사상의 정통적 계승자이자 마지막 보루인 조선을 의미하는 것이다.[11]
게다가 단순히 구시대적 발상에 머물렀다고 평가할 수 없는게, 위정론에 대해서는 내수위양이라는 방법론은 거의 동일하지만, 척사론에 대해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항로의 척사론은 척양론에 중점을 두는가 하면, 최익현은 처음에는 척양론에 덧붙여 왜양일체론을 전개하는데, 후에 가면 서양에도 의리는 있다고 얘기를 바꾼다.(...)[12] 또, 을미사변과 개혁때의 상소를 보면 공법조약[13][14]을 통해 국모시해를 각 국에 알리고 왜적을 처단하자는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해외상황에 대해서 어느정도 파악은 하고 있었던 모양.

4 다른 의미(?)

파일:Attachment/위정척사파/wijeongcheoksa.jpg
윤리 성적이 낮은 이유는 서양윤리를 틀려서다.(...)
아니다 흥선군이 젊은 시절에 파락호 생활을 했잖아[15]

여기에서 의미가 와전되어 다른 성적이 다 좋은데 유독 외국어 성적만 낮은 경우, 또는 외국어가 아예 안 되는 사람들을 비꼬는 의미로 쓰기도 한다. 그 외국어가 영어라면 더더욱 그렇고, 자학의 의미로 쓰이는 일도 있다.
  1. 이 수구당은 1870년대 이후의 온건개화파를 의미하는 수구당과는 다르다.
  2. 치규 안병찬(安炳瓚)은 공산당에 가입한적이 없으며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는 장서서명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것이 마지막 기록이다. 1921년 공산주의로 전향해 그 해 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공산당 대표회의에 상해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고려공산당 조직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던 안병찬은 독립운동가 안병찬(安秉瓚)이다. 그 안병찬과 이 안병찬은 동명이인이지만 태어난 연도가 1854년으로 같기(...)때문에 주의할것.
  3. 다만, 세 학파들의 이기론에 세부적인 차이는 존재하는 편이다.
  4. 물론 구한말의 성리학에서 주기론적 이기론을 전개한 간재학파도 있지만, 위정척사파와는 다소 거리가 먼 편이기 때문에 제외했다.
  5. 물자의 교역과 성의 자유로움으로 해석되나 자세히 아는 분은 수정바람.
  6. 전통적인 성리학적 관점에서 인심(人心)의 악한 부분이라 해석되는 개념
  7. 화서의 경우, 통색보다 통화의 위험이 크다고 경고하였다. 교역을 통해 상업이 발달하면 민중들이 사리사욕만을 추구하게 된다고... 북학파들의 주장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8. 다만 열강들이 러시아를 다 싫어한걸 보면 위에 나온 부류의 개화인사들도 틀린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을미사변 후에도 이런 소리를 한게 문제다. 애초에 국제정세에 어둡기는 둘 다 같았다.
  9. 예를 들면 홍재학은 상소에서 서구랑 친해지면 우리도 오랑캐 된다며 거름구덩이 등의 단어를 넣었다. 물론 척화 상소들 중에서 제일 과격해선지 사형당했지만
  10. 이들은 서구 열강이 남의 나라 막 먹어대는건 잘 몰랐다. 다만 거대한 중국도 눌러대는 이들이니 분명 조선에도 해가 될거라고 짐작했다고 생각해볼수는 있다.
  11. 이에 대해서는 위에도 언급했지만 당장 화서학파의 사상적 기반에는 송시열의 숭명배청론이 있다.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12. 실제로 매천야록에서 보면 보어전쟁에 대해 언급하면서 보어인들이 힘껏 저항하자 영국이 이를 존중하여 몰살하지 않았다대신 수용소로 보냄라고 언급하면서 서양 세계에서도 의리와 도덕이 있음을 언급했다. 이뿐만 아니라 위정척사파가 일으킨 의병들은 서양인들을 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물론 주적이 일본이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지만).
  13. 이게 다른게 아니라 국제법이다!! 이 무렵 선비들이 올리는 상소문에서도 전통적인 경전을 인용한 것처럼 '만국공법에 따르면'이라는 식으로 국제법을 근거로 삼아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14. 이 때 당시 많은 동양의 지식인층(선비나 청나라의 한족 신사 등)들이 이 국제법을 보고 감탄하였다. 나라간의 지켜야 할 의리를 상세히 적어놓았다고 여겼기 때문. 물론 현실은...
  15.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후대에 지어낸 얘기에 가깝다. 또한 쇄국정책 이미지가 너무 커서 흥선대원군도 위정척사파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많은데, 사실 대원군은 위정척사파와 거리가 멀다. 오히려 위정척사파는 대외 정책을 제외하고는 대원군의 정책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