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泉野錄.
1 설명
구한말 학자이자 재야문인 매천 황현[1]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쓴 기록물이다. 총 6권에 7책으로 되어 있다. 황현은 한일병합 후 얼마 뒤 음독 자살했는데, 그가 자결하기 전까지의 기록은 고용주가 기록했다.
일반적으로 착각하는 것과 다르게 사서가 아니다. 현재의 개념으로 보자면 일기에 더 가깝다. 단순한 번역가였던 김택영 같은 인물도 포함되는 근대초기 사학사에 황현의 이름은 없다.
1864년부터 갑오개혁 이전까지는 큰 사건들만 기록하다가, 갑오개혁을 전후한 시점부터 1910년까지는 기록이 상세해진다.
정식 사서가 아니기 때문인지 유교적 사관에 크게 얽매이지 않은, 시니컬하고 쿨한 느낌의 문체를 사용했다. 그래서 위정자들의 잘못이나 하늘같은 상감마마의 행적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비판을 가했고, 서양 세력이라고 하여 특별히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고 당시 대국으로 섬겼던 청나라의 행각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등 합리주의적 사관을 엿볼 수 있다. 예외는 일본. 처음에는 '왜인'으로 서술하다가 이들이 조선을 넘보는 수위가 높아지면서 '왜놈'으로 일관되게 표현이 바뀐다.
그런데 청나라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경우, 청나라는 한족의 나라가 아니기에 조선의 유학자들이 중화로 인정하질 않아 저리 할 수 있었던 걸 수 있다. 게다가 청나라는 홍콩을 빼앗기게 된 아편전쟁 이후에는 대국 취급도 못 받았으니....
2 평가
동학농민운동을 '도둑 집단'으로 표현하는 등 민중 봉기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이 점에서 그가 봉건 시대의 사고에서 탈피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동학 운동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사정들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나, 방법에서 동의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본 것. 그런데 이건 일반적 민란에 대한 보편적 사대부의 반응이다. 사대부인 그가 공감한 것은 민란의 배경이지, 동학운동의 지향점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참여한 독립협회에 대해서 대단히 호의적으로 기술해놓았는데 이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기존 실록이나 사서, 외국 자료 등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내용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구한말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다만 이 책은 야사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개인의 기록이며 사건들의 중심에 있어서 교차검증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를 역사서로 보면 안된다. 무엇보다 저자의 마음가짐이 다르다. 매천야록은 심지어 본인이 발표한 책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이 과거 문집을 편찬하는 식으로 편찬해서 나온 책이다. 표현이 거친 것도 그 영향으로, 황현이 글을 쓴 것은 디시인사이드 갤러리나 블로그 포스팅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디시인사이드 정사갤 DB가 남아서 31세기에 전해진다고 하면 이건 유용한 1차 사료가 맞다. 하지만 이게 사실이란 이야기는 아니고, 신뢰도에서도 낮은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같은 시기에 뉴데일리의 DB와 우리민족끼리의 DB가 발견된다면, 역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후자를 더 높이 평가할 수 밖에 없다.
매천야록이 사료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당시 흘러다니던 야담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과 사대부이자 일부 사건에 직접 참여했던 인물이 이를 바라보는 시각을 다뤘다는 거 때문이지, 그 자체로 신빙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의친왕의 모친의 사망시기가 정사에 기록된 것과는 다르다거나, 이완용이 자기 며느리의 무릎을 베고 있는 것을 일본 유학 갔다온 장남이 보고 충격을 받아 자결했다는 이야기(이완용 문서를 보면 알지만, 시간대부터 안 맞다.)나, 아무개는 고자라서 쓸모가 없었기에 아무개 부인이 바람을 피웠다 같은 이야기, 김병국과 민규호가 거시기한 관계였는데 김병국이 판서가 되자 민규호가 "대감이 판서이니 이제 나는 정경부인"이라고 농을 걸었다는 따위의 신뢰성 제로의 기록도 있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 당시 민중이나 사대부의 생각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선 도움이 되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읽는 사람의 철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한 책이라 이 책에 기록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떤 사건이 정말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이는 철저한 사료검증의 노력이 크지 않고, 저자의 취향에 따라 혹은 단순히 주위에서 도는 야담을 수록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황현은 독립협회에 참여하는 등 객관적 관찰자라고 보기에는 너무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그렇다고 직접적 관계자라서 내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하기에는 지식 부족이 두드러진다. 때문에 저자의 취향이 아닌 인물이나 당시 민중들에게 악평을 받던 인물들에 대한 언급은 사실과 다른 부분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학계에서는 그냥 평판이 어떻다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지만...문제는, 대중의 입장에선 이 책을 읽고 나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내용이 바로 이런 신뢰성이 불분명한 자극적인 기록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매천야록에는 이렇게 되어 있으니 누구는 나쁘고, 어떤 사건은 어떻다라고 말하면 바보될 수 있다. 특히 인물 관련해서 특정 인물에 대한 황현의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가 있는 듯한 의문점이 여럿 보인다. 실제로 월간조선에서 명성황후 민씨를 깔 때 매천야록의 기록을 댔다가 역관광당한 적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55년에 한국사료총서의 제 1집으로 '매천야록'을 간행하면서 그 서문에 우리나라 최근세사의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 하였다. 그러나 상술되어 있듯이 매천야록의 가치는 동시대인으로서의 시각과 다른 기록에 없는 당대의 상황들에 대해 묘사한 단순한 기록으로서의 가치이지, 매천야록 자체가 사료적으로 객관성이나 진실성을 갖추어서 높이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2.1 기타
도무지의 어원 해석이 있다. 도무지로 바뀌기 이전에는 도모지였으며, 도모지(塗貌紙)는 얼굴에 창호지와 같은 종이를 발라서, 차츰 종이가 마르면서 질식시켜 죽게 하는 사형의 일종이라고. 링크 하지만 이건 민간어원에서 보는 어원 해석이라 확실하지는 않다.
참고로 저자인 황현은 매천야록과 더불어 죽기 전에 썼던 절명시로도 유명하다. 그는 한일병합이 공표된 직후, “내게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다만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국난을 당하여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겠는가?"라고 말하고 아편을 치사량 이상으로 복용하여 자결했다. 그가 남긴 절명시에는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 나라를 잃고 말았던 조선말 지식인의 고뇌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꼭 읽어보자. 링크
황현의 자결을 독립이나 계몽과 같은 실질적 행동을 거부한 회피나 변명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곤란한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대적 관점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유학자인 황현의 자결은 단순히 개인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절명시 3수에서 드러나듯이 사회 지도층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의식에 가깝다. 당장 유교에서 충의 상징으로 숭상하는 아쉬움은 있을 수 있겠지만, 시대적, 사회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행위를 평가해서는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