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표

魏豹
?~BC 204

1 소개

초한쟁패기 때 군벌 또는 제후왕 중 하나. 보통 사기 등에선 위왕 표(魏王豹)로 기록되곤 한다.

2 생애

구 위(魏)나라 왕족 출신[1]이나, 진승(陳勝)의 봉기 전까지는 자세한 행적을 알 수 없다. 진승 휘하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초의제항량일가처럼 초야에 숨어지내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진승은 휘하의 주불을 보내 위국령을 평정하고 주불을 위왕에 앉히려 했으나, 주불은 되려 구 왕족 출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사양한다. 그리하여 위구가 위왕으로 옹립되고, 위표도 이때부터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위나라 부흥의 꿈도 잠시, 진승의 대세력은 금세 와해되고 장한의 무서운 토벌이 시작되었다. 관중 근방인데다 아직 세력이 약한 위나라는 바로 토벌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초나라와 제나라에 원군을 청했지만 임제에서 원군으로 온 제왕 전담이 전사하고 항타, 전파가 이끄는 초의 원군도 격파되고 만다. 그리하여 위구는 군민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결하고, 위표는 도주했다.

이후 위표는 초나라에서 객장 비슷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사기의〈위표팽월열전〉에 따르면, 거록전투 전후 위나라 땅의 20여성을 수복해 장악했고 항우의 입관에 종군했다고 한다. 그러나 〈진초지제월표〉에 따르면 거록전투 이전에 이미 평양을 서울로 삼고 위나라를 재건해 거록전투에 원군을 보내었다고 해 시점이 맞지 않는다. 어쨌든 다시금 위국령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지고 항우군의 동선과 겹쳐 행동했거나 그 일부로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항우와 함께 함곡관 입성까지 한 것은 양쪽에서 일치하며, 이런 협력으로 위표는 진나라 멸망 후 서위왕(西魏王)에 봉해져 구 위왕령을 봉지로 받게 된다. 그러나 위국 전역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옛 위나라의 수도 대량과 동쪽을 서초패왕 항우에게 양도한 분봉이었다.

하지만 곧 세상은 다시 어수선해졌고 유방이 한중에서 나와 관중을 탈환해 동진한다. 사마흔, 동예, 신양이 항복하고 장한, 정창이 격파 되는 상황에서, 위표는 친히 군마를 이끌고 유방에게 투항한다.

그런데 유방이 팽성대전에서 참패하자, 위표는 형양에 함께 있다가 부모의 병환을 핑계로 영지로 돌아가 초에 붙어 한에 반기를 든다. 정치적으로 보면 대패한 한의 역량이 못 미더워서겠지만, 이에는 좀 황당한 다른 이유가 있다. 위표는 당시 유명한 관상쟁이 허부로부터 자신의 첩 박씨(薄氏)가 천자를 낳을 상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아들이 천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김칫국을 거하게 들이키고 유방과 항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유방은 역이기를 보내 설득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한신이 파견되어 안읍 전투에서 위표를 격파한다. 위표의 영지는 하동군으로 재편되어 위표는 졸지에 영지까지 몰수 당하게 된다.아! 망했어요 이때 박씨는 한나라의 베 짜는 종이 되었다가, 나중에 유방의 후궁이 되어 한문제를 낳았으니 결과적으로 예언 자체는 완벽히 들어맞은 셈.위표의 자손이 천자가 된다곤 하지 않았다.

허나 재밌는 건 위표를 유방이 죽이지 않고 막하에 계속 두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204년 유방은 기신의 희생으로 도주할 때 형양 수비를 종공, 주가 그리고 위표에게 맡긴다. 유방의 도주를 위해 형양은 시간벌기를 해야했는데 충의로운 자를 남겨도 모자를 판에 위표를 둔 것은 기묘한 일이었다.(사실 유방은 이전에도 자기 기반이나 마찬가지인 풍읍을 자신과 사이가 안좋았던 옹치에게 맡겼다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이에 종공과 주가는 모의하여 "나라를 배신한 적이 있는 왕과 함께 성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위표를 죽이게 된다. 그래도 왕 취급은 해주는 거냐 그렇지만 유방보다 훨씬 과격한 항우의 성격상 자신을 배신한 놈을 살려둘 리가 없으니 종공, 주가가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항우에게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3 대중문화 속의 위표

대체로 매체에서 위표는 가벌의식에 찌들어 허세에 찬 비열한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당시 초, 한을 오가며 줄타기한 인물이 위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위표는 팽성전투 후 여타 제후처럼 바로 손바닥 뒤집듯 초로 붙은 것이 아니고, 유방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영포를 회유 할때까지도 같이 있었다. 상당히 나중에 초나라로 귀순한 것.

그럼에도 대표적인 배신의 아이콘으로 비하된다. 최후까지 초군에 내통하려다 또는 종공, 주가에게 초군으로의 투항을 권유하다가 죽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부모팔이를 하면서 배신한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2] 심지어 팽성전투 때 한신이 면직되고 가벌로 대원수가 되어 한군을 말아먹은 대패의 주원인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팽성전투 때 한신도 참전했다고 볼 때 행적 이상으로 까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드라마 초한전기에서는 좀 소심하고 부족한 사람으로 나오며, 오히려 아내가 훨씬 더 담대하고 뛰어난 여장부로 나온다. 판단도 대체로 정확한 편이며, 영포를 봤을때도 항우를 배신할걸 예측하기도 했다.

고우영 초한지에서는 한술 더떠서 외형과 성격 모두 동탁 수준으로 나온다. 최후도 서인으로 내쫒긴 뒤 종공, 주가에게 항복을 권유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효수당하는 신세. 특이하게 처음엔 이름이 제대로 나오다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유표로 바뀐다. 아마 손글씨로 텍스트를 넣던 고우영 화백이 어느 순간 실수한 게 계속 굳어진 듯.
  1. 제나라의 전담처럼 성씨가 같음을 착안해 왕족을 사칭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위구(魏咎) 형제는 분명 왕족이었다. 위구는 구 위왕국 때 영릉군(寧陵君)으로 봉해진 바 있다.
  2. 때론 위표 모친도 같이 매도된다. 그 어미에 그 아들 식으로. 대표적인 것이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항우와 유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