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역사책)

중국의 정사서
흠정 24사
순서이름저자권수
1사기\[[[전한]]\] 사마천130
2한서\[[[후한]]\] 반고100
3후한서\[[[유송]]\] 범엽120
4삼국지\[[[서진]]\] 진수65
5진서\[[[당나라|당]]\] 방현령130
6송서\[[[양나라|양]]\] 심약100
7남제서\[[[양나라|양]]\] 소자현59
8양서\[[[당나라|당]]\] 요사렴56
9진서\[[[당나라|당]]\] 요사렴36
10위서\[[[북제]]\] 위수114
11북제서\[[[당나라|당]]\] 이백약 등50
12주서\[[[당나라|당]]\] 영호덕분 등50
13수서\[[[당나라|당]]\] 위징85
14남사\[[[당나라|당]]\] 이연수80
15북사\[[[당나라|당]]\] 이연수100
16구당서\[[[후진]]\] 장소원 등200
17신당서\[[[북송]]\] 구양수225
18구오대사\[[[북송]]\] 설거정 등150
19신오대사\[[[북송]]\] 구양수74
20송사\[[[원나라|원]]\] 탈탈496
21요사\[[[원나라|원]]\] 탈탈116
22금사\[[[원나라|원]]\] 탈탈135
23원사\[[[명나라|명]]\] 이선장210
24명사\[[[청나라|청]]\] 장정옥 등332
기타 정사서
-동관한기\[[[후한]]\] 유진 등22
-신원사\[[[중화민국]]\] 커사오민 등257
-청사고\[[[중화민국]]\] 자오얼쉰 등536

1 개요

太史公曰: 餘述歷黃帝以來至太初而訖, 百三十篇.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황제(黃帝)로부터 태초(太初)[1]에 이르기까지의 사실(史實)을 역술(歷述)하였으니, 이는 모두 130편이다."


《사기(史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史記. 중국 역대 대표 역사서 25사 중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자, 유일한 통사.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다. 단 한 사람이 이렇게 방대한 기간을 다룬 역사서를 쓴 사례는 전세계 통틀어 보아도 드물다.

단, 분량 자체는 생각보다 많지 않은 편인데, 현재 원문만 번역하여 낸 것이 대여섯 권 정도 분량 정도다. 당시에는 주로 간독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아 당시에는 양이 많았어도 지금 와서 보면 그냥 수첩 하나 정도 분량인 경우도 많고,[2] 많이 쓰면 그만큼 보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3]

사마천궁형이라는 치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쓴 책으로도 유명하다.[4]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자신을 고자로 만든 한무제디스했다. 다만 현재의 황제를 비판한 부분은 후세의 가필이라는 의견도 있다.[5]

현재 인터넷상으로 쉽게 읽을 수 있는 곳은 네이버다. 네이버의 경우 원래 번역본으로 제공되던 것이 이런저런 알 수 없는 이유로 한문 원문만 읽을 수 있게 바뀌었다가, 다시 번역본을 조금씩 공개하고 있다. 그리고 원문에 한정된 것이지만 주석, 즉 후술할 삼가주도 제공하고 있다.[6] 중국어 웹은 여기로 가면 된다. 이외에 열국연의라는 곳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위키문헌에서도 읽을 수 있으나, 완역된 것은 본기뿐이다. 이곳도 마찬가지. 이외에도 알음알음 애호가들이 자체적으로 번역해서 올려 놓은 곳들이 잘 찾아 보면 있다.

고조선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료 중 하나다. 하지만 고조선사 전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위만조선의 흥망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한계다.

2 편찬 배경

중국 전한사마천이 상고시대의 황제부터 한무제 태초 연간(기원전 104년~101년)의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여 저술했다. 본격적인 저술은 기원전 108년~91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7]

사마천은 저술의 동기를 '가문의 전통인 사관[8]의 소명 의식에 따라 《춘추》를 계승하고, 아울러 궁형의 치욕에 발분하여 입신양명으로 대효를 이루기 위한 것'으로, 저술의 목표는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관하여 일가의 주장을 이루려는 것'으로 각각 설명하는데, 전체적 구성과 서술에 이 입장이 잘 견지되었다.

3 서술상의 특징

3.1 최초의 기전체 사서

사기는 역사적 사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하는 편년체가 아닌, 각 사건과 인물을 개별적으로 따로 기술하는 기전체형식으로 서술된 최초의 역사서다. 이후 분열기를 통일한 통일 왕조를 서술하는 데에 있어 기전체의 장점이 부각되어 많은 사서들이 기전체로 쓰여졌다. 우리에게 익숙한 기전체 사서중 하나가 《정사 삼국지》, 《삼국사기》. 사서로서의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문장력도 뛰어나 문학 작품으로서의 완성도 역시 대단한 수준이다.

또한 민중과 사회에 대한 생동감 또한 대단하다. 중국에서 사기에 나오는 직업군에 대해 통계를 내 봤는데 총 1300여 가지의 직업들이 언급되고 등장했다 한다.[9]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에서 인물에 대한 기록은 본기, 세가, 열전이다. 본기는 천자의 기록, 세가는 춘추전국시대전한대의 제후들의 기록, 열전은 그 밖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사마천 - - - - 으로 정통성이 이어진다고 보아 하, 은, 주, 진시황 일대기를 모두 본기에 서술하였다.

3.2 서술 태도

한 가지 매우 특이한 점은 명분보다 실제 상황을 더 중시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항우를 한때나마 천하를 제패한 패왕으로 인정해서 <세가>나 <열전>에 서술하지 않고 <본기>에 서술하였다. 사마천이 사기를 쓰던 시점은 유학이 전한의 국가 이념으로 정립되던 시기로 유교의 정치 사상인 '명분론'이 확립되던 때로, 사기가 모델로 삼았던 《춘추》가 역사비평서라는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유교적 명분론을 담은 정치철학서로서 독해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이색적인 서술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한의 2대 황제인 혜제와 그의 뒤를 이은 3대 황제 소제, 4대 황제 소제 모두 허수아비 황제였기 때문에 그들의 본기는 아예 없고 대신 <여태후본기>가 들어가 있을 정도다.[10] 사기가 전한의 7대 황제인 한무제 시기에 쓰여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과감한 처사다. 그만큼 항우의 임팩트가 어마어마 했다는 소리일 수도 있겠다. 혹은 사마천이 한무제에게 궁형을 당했기 때문에 한 왕조에 대해 심사가 꼬여 있던 점을 반영했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한 왕조의 찬양을 위해서 그랬다는 설도 있는데, 항우의 격을 너무 낮추면 그에게 항상 패했던 고조 유방의 격도 덩달아 낮아지기 때문에 항우의 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그를 패사시키고 한 왕조를 창시한 유방의 격을 높이게 된다는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본 것이다. 여후는 유방의 아내이고 2대 황제의 어머니로 정치 쪽에서는 확실히 간섭을 많이 했으니 이걸 완전히 숨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단, 전한 초중기에 유교적 명분론이 큰 영향이 없었다는 시각을 통해 본다면, 좀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전한 초기까지만 해도 유교는 사실상 허울이나 마찬가지였고, 이건 실제 정치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랬다. 한고제부터 시작해서 한무제까지의 시기 중에서 유교가 정치 수준까지 영향을 미친 시기는 없다. 본격적으로 유교가 실제 정치를 포함한 의식 세계의 본질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것은 11대 황제인 한원제 시기에 이르러서인데, 11대 원제는 젊어서 유교에 심취했다가, 아버지 한선제가 이러다가 나라 망치겠다고 하여 황위에 오르지 못할 뻔했다. 실제로 한원제 이전의 한나라 글들은 유학자라는 사람들의 책에서도 기묘하게 다른 냄새가 많이 나는 편이다. 단적으로 전한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동중서오행설을 들고 나왔는데, 이건 유가와 별개의 학설을 유가에 끌어다 붙인 것이다. 이런 경향이 끝나고 유교가 본격적으로 스며드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을 세운 왕망의 영향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본다면, 사마천은 상당히 유교적으로 《사기》를 썼다고 볼 수도 있다. 한나라의 유교는 이후 종교화된 시기의 유교와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명분에 모든 것을 걸기 시작하는 것도 한참 뒤의 일이다. 물론 국가에서 돈을 들여 관리 감독하는 책의 경우에는 국가 이데올로기에 맞춰서 구성되지만, 이건 국가의 필요에 의한 것이지 유교적 명분론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세가> 역시 실제로는 제후가 아니었던 공자진승[11]을 세가에 넣은 것도 특이하다. 공자는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은 세가가 아니라 <본기>에 서술된 그 어떤 황제들보다도 위대한 업적을 세운 위인이니 세가에 넣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공자가 처음으로 추시된 것이 전한 말기였으니, 꽤나 선구적인 태도임은 분명하다.

3.3 높은 신뢰도

사기의 신뢰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상나라(은나라) 관련 기술이다. 상나라는 사마천이 살던 시기인 전한과도 천 년 가까운 간격이 있던지라 사기에 서술된 상나라 기술의 신뢰도에 대한 의문은 계속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이전까지는 상나라는 전설 속의 왕조이고, 거기 사기에 나오는 왕이나 사건들은 모두 지어낸 거짓말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상나라의 수도였던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나타난 상나라 왕들의 이름과 순서는 사기의 기술과 거의 일치하여 사기의 상나라 관련 기사에 대한 신뢰도를 증명해주었다. 상나라/계보 문서 참조.

<공자세가> 등 몇몇 부분에서는 일부 기사가 신빙성을 의심받기도 하나[12], 으레 그렇듯이 교차검증에서 걸리는 부분에 한정되어 있다.

3.4 후대의 평가, 번역본

물론 사기는 원저(原著) 그대로의 형식과 내용으로 현전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 표제가 사마천이 실제로 붙였던 '태사공서'가 아닌 '사기'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열전 맨 마지막 부분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정(正)·부(副) 두 본(本)으로 써서 정본(正本)은 명산에 보관하여 사라질 것에 대비하고, 부본은 경사(京師)[13]에 보관하여[14] 후세의 군자를 기다리겠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130권 가운데 <효경본기>, <효무본기>, <예서>, <악서>, <병서>,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삼왕세가>, <부근괴성열전>, <일자열전>, <귀책열전> 등 10권은 이미 전한 후기에 그 전권 또는 일부분이 빠져서 저소손(褚少孫)이 다른 자료들을 참조해서 보충했다.[15]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기 주석서는 남조 유송 때 배인(裴駰)이 쓴 《사기집해(史記集解)》 130권이다. 사마천의 시대로부터 약 600년이 경과한 이 시대에는 《사기》가 상당히 읽혔던 것 같은데, 탈간(脫簡)·착간(錯簡) 또는 서사(書寫) 때의 오기(誤記) 등으로 판본이 각기 달라서 그것을 통일하는 주석서가 필요했을 것이다. · 시대가 되니 종이에 서사된 《사기》가 몇 가지 나타났다. 당나라 때는 사마정(司馬貞)이 《사기집해(史記集解)》를 근거로 《사기색은(史記索隱)》 30권을 짓고 또 <삼황본기(三皇本紀)>를 만들어 이에 주석을 붙였으며 장수절(張守節)이 다시 《사기정의(史記正義)》 130권을 지었다. 《사기집해》, 《사기색은》, 《사기집해》를 통틀어 사기 '삼가주(三家注)'라고 부른다.

현대 역사가들은 사기를 단순한 인문학 저서가 아닌 태고부터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한무제까지의 오만군상의 인간상과 사마천 본인의 개인적 고뇌가 담긴 인간학의 저서로 평가한다.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량치차오는 사기의 10대 명편을 선정했는데, <항우본기>, <위공자열전>, <염파인상여열전>, <노중련추양열전>, <회음후열전>, <위기무안후열전>, <이장군열전>, <흉노열전>, <화식열전>, <태사공자서>를 꼽았다. 또한 사마천의 사기로 중국에 역사학이란 것이 시작되었다고 평했다. 정조 역시 사기를 한문 문장의 전범(典範)으로 평가하고[16] 사기에서 문장의 모범이 될 만한 열전을 스물일곱 편 가려 뽑아[17]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을 편찬하기도 했다.

삼국지왕윤채옹을 죽일 때 사기를 '정부를 헐뜯고 비난하는 방서'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분명 보수적이고 정통주의에 찌든 지식인들의 시점에서는 그랬겠지만, 오히려 최고 권력자에게도 서슬 퍼런 역사의 붓을 들이댄 사마천의 용기와 신뢰성을 높게 평가해 주는 장점이 되었다.

한국에 소개된 번역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부분 중요한 편만 추려내서 뽑은 것이 많다. 대표적인 사기 완역판을 들면 까치글방에서 여러 학자들이 함께 전편을 완역해 낸 7권짜리 사기와[18] 정사 삼국지를 번역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 잘 알려진 김원중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19]가 혼자 완역한 것을 민음사에서 출판한 것이 있다.[20][21] 혼자 사기 번역을 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최초라고 한다. 김원중은 박사 학위를 밟던 시절 까치글방의 사기 번역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외에 고전 번역가 신동준 씨가 2015년에 완역본 사기를 내놓았고,[22] 사기 연구자인 김영수[23]가 완역본[24]을 출간 중이다.

이외에 2005년 교수신문에서 고전 번역본들을 추천하는 기획 시리즈에서 서울대 이성규 동양사학과 명예교수(당시 동양사학과 교수)가 편역한 《사기: 고대 중국사회의 형성》이 완역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준수한 번역본으로 추천 받기도 했다.

현재 시중에 번역 출판된 사기는 중역본이나 표절이 아니라면 보통 1949년 중화서국에서 낸 표점교감본[25]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26] 그런데 이 당시에 낸 표점교감의 불완전성이 지적되어 최근에 중국에서 '점교본 24사 및 청사고 수정공정'이 진행되어 최종본 정사를 만드는 작업이 이뤄지는 중이다. 그 결과 2014년에 사기 수정본이 나왔는데, 현재 시중에 나온 번역본들 중에서 이 수정본이 반영된 판본은 개정된 민음사판인 것으로 보인다.. 혹 현재 완역본의 개정판이 나오게 된다면 판본 수정에 따라 새롭게 번역했는지 여부를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기는 군주에 대한 기록을 다룬 <본기(本紀)>보다 당대의 인물들에 대해 다룬 <열전(列傳)>이 좀 더 재미있고 읽기 쉽다는 평을 받는다. 본기는 천자의 일생과 업적을 다루고 있어서 연표에 따라 조금 딱딱하게 구성되어 있는 반면에[27], 열전은 다양한 인물군상을 다루고 있고, 연도에 그리 얽매이는 편도 아니라 본기에 비해 덜 지루하며 보다 생동감이 넘친다. 현장 답사 위주로 쓰여진 열전들은 문학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흥미로운 일화나 사마천의 생각, 인물평 또한 열전에 가장 잘 드러나 있어 가르침 역시 열전에서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다. 실제로 국내에 사기와 관련된 책을 보면 열전에서 추려낸 책들이 대부분이다.[28]

다만 이런 열전 편중 현상에는 명백한 문제점이 있다. 사기는 후대의 기전체 정사와는 달리 통사로서, 춘추전국시대라는 중국사에서도 특이한 시대를 포함하는 만큼 특별히 '세가'라는 요소가 있다. 이 세가에서는 춘추전국의 제후 외에 상술한 바대로 공자를 다루고 있고, 전한 초기에 제후로 분봉받은 이들이나 장량, 소하, 조참, 주발 같은 네임드 공신들도 모두 여기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세가를 번역하지 않으면 이들에 대한 정통 사서의 내용을 읽을 수가 없게 된다. 더불어 초한전쟁 시기를 살펴볼 때에는 무엇보다도 이 시기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항우본기, 고조본기부터 봐야 하는데 열전만 다루는 사기 번역본에는 빠져 버리므로 문제가 된다. 항우본기, 고조본기는 본기임에도 거의 개개인의 열전과 다를 바 없는 구성이라 열전 못지 않게 문학적 흥미가 있는 대목인데도 열전이 아니라는 이유로 빼버리니 정말로 안타까운 일. 일부 열전 번역본들은 항우본기, 고조본기의 내용을 주요 인물 열전에 반영하는 일종의 번안 작업을 하기도 한다. 아예 사기를 발췌 번역한 뒤 편년체 형식으로 재구조화한 번역본도 있고.

4 사기의 구성

"흩어진 천하의 옛 이야기들을 망라하되, 왕들이 일어난 그 처음과 끝을 탐구하고 그 흥망성쇠를 관찰하며 사실 진행에 따라 고증해 간략히 삼대의 사실을 추구하고 진나라와 한나라의 사실을 기록했는데, 위로는 헌원으로부터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를 12본기로 기록하되, 모두 조목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사적에는 시대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어 연대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10표를 만들었다.

예악의 증감, 법률과 역법의 개정, 병권, 산천, 귀신, 하늘과 인간의 관계, 시대와 세상에 따라 변화하는 것에 대한 내용으로 8서를 지었다.

별자리 28수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고, 30개의 바퀴살이 모두 하나의 바퀴통에 집중되어 있어 끝없이 돌고 도는 것처럼, 천자를 보필하는 신하들을 이에 비유해 그들이 충신의 도리로서 천자를 받드는 모습을 내용으로 30세가를 지었다.

의로움을 따르고 재능이 빼어나, 때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떨친 사람들의 일들을 내용으로 70열전을 지었다.

합해 130편, 52만 6,500자[29]이고, 이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부른다."


《사기》 태사공자서

4.1 본기(本紀)

중화 세계를 지배한 통일 국가와 천자에 대한 기록이다. 항우와 여태후가 본기에 들어 있는 것이 특이점. 이들이 들어간 의미는 위에서 언급된 대로, 명분과 신분보다 그 인물이 끼친 영향력과 업적을 중시한 사마천이기에 위의 두 인물이 편입될 수 있었다.

  • 삼황본기(三皇本紀): 삼황오제 중 '삼황'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삼황의 존재를 허구로 단정했기 때문에 삼황본기는 사마천이 지은 것이 아니며 당나라 때 사마정이 추가, 보충한 것이다. 천황, 지황, 태황(인황), 그 외에 복희, 여와, 신농, 축융, 황제 등이 삼황으로 꼽힌다.
  • 오제본기(五帝本紀): 삼황오제 중 '오제'에 대한 기록이다. 오제가 누구인지는 여러 설이 있지만 이 본기에서의 오제는 황제, 전욱, 제곡, , 이다. 다만 현재의 오제본기는 사마천 당대의 것이 아니라 당나라 때 그 이전에 소실되어 버린 해당 부분을 재판한 것이다.
  • 본기(夏本紀): 선조인 황제부터 곤(鯀)까지의 가계 및 1대 우왕에서 17대 걸왕까지의 역사를 기록. 대부분 《서경(書經)》의 <하서>를 배낀 것이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서경》의 각 편이 어떤 이유로 편찬되었는지도 기록되어 있다.
  • 본기(殷本紀): 시조 설(契)이 성씨를 하사 받은 일로부터 시작하여, 1대 탕왕에서 30대 주왕까지의 역사를 기록. 이 또한 《서경》의 <상서>를 배낀 것이다. 역시 각 편의 편찬 이유도 기록.
  • 본기(周本紀): 시조인 후직 이후의 가계 및 고공단보의 건국, 1대 무왕에서 37대 난왕까지의 역사를 기록.
  • 본기(秦本紀): 선조인 전욱부터 이어지는 가계 및 1대 양공에서 30대 장양왕까지의 진의 역사를 기록. 진시황 이후는 <진시황본기>로 따로 편찬했다.
  •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이 중국을 통일한 시기의 역사로, 시황제, 이세황제, 진의 멸망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 항우본기(項羽本紀): 패왕으로 불렸던 항우의 일대기. 사기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 고조본기(高祖本紀): 한고조 유방의 일대기. 유방이 거병하기 전 시절부터 중국을 재통일하고 사망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유방 사후 즉위한 혜제, 두 명의 소제 시대에 실권을 장악한 여태후의 일대기. 정식 황제가 아닌 실권자를 본기에 기록한 특수한 기록이다.
  • 효문본기(孝文本紀): 여태후 사후 즉위한 효문제 유항의 일대기. 유항의 대왕(代王)시절부터를 기록하고 있다.
  • 효경본기(孝景本紀): 문제의 뒤를 이은 효경제 유계의 일대기. 원본이 소실되었기에 후대에 보충한 것이 전해온다.
  • 효무본기(孝武本紀): 경제의 뒤를 이은 효무제 유철의 일대기. 사기 태사공자서의 해제에는 <금상본기(今上本紀)>[30] 라고 되어 있다. '효무'는 무제가 죽은 뒤에 붙여진 시호이고 사마천은 한무제 시절에 사기를 완성했으니 금상본기라고 칭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인데, 이렇게 된 것에는 여러 설이 있다. 사마천이 직접 만든 금상본기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가필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일부러 이렇게 제작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현전하는 사기의 효무본기는 저소손[31]이 서의 <봉선서> 일부에서 내용을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32]

4.2 표(表)

도표 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한 것. 즉, 연표다.

  • 삼대세표(三代世表): , , 서주#s-1 시대의 연표.
  •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 춘추시대 주요 열두 제후의 연표.
  • 육국연표(六國年表): 전국시대 주나라전국칠웅의 연표.
  • 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 진 이세황제 이후와 초한쟁패기의 연표.
  • 한흥이래제후연표(漢興以來諸侯年表): 고조 원년 이후 한나라 왕국들의 연표.
  •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 전한 개국 공신들의 연표. 개국 공신 서열이 열거되어 있다.
  • 혜경간후자연표(恵景間侯者年表): 혜제부터 경제까지 제후들의 연표.
  • 건원이래후자연표(建元以來侯者年表): 한무제 원년부터 태초 연간(기원전 104년~101년)에 이르는 시기에 분봉된 제후들의 연표.
  • 건원이래왕자연표(建元已來王子年表): '건원이래'라고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원광(元光) 5년부터 원정(元鼎) 원년까지, 즉, 기원전 130년~116년에 분봉된 제후들의 아들들에 대한 연표로, 연표 중에서 가장 단순한 형태다.
  •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전한 건국 이후 여러 장수, 재상, 명신들의 행적을 기록한 연표인데, 서문이 없고 거꾸로 된 글자가 많아[33] 위작 시비가 많은 항목이며, 대체로 양옥승(梁玉繩)의 견해에 따라 한무제 이전의 기록은 사마천이 썼고, 저소손 등이 실전된 부분을 보충하는 한편, 무제 시기의 연표도 새로 넣었을 것으로 본다.

4.3 서(書)

당시의 생활상이나 제도, 풍속 등을 기록한 사회사 기록. 후대 역사서들의 지(志)에 해당된다. 내용 손실이 극심하였는지, 사마천이 쓴 목록과 현재 남은 목록이 비율상 가장 다르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현재 남은 부분은 후대에 자료를 수집해서 채우고, 자료가 없는 경우에는 아예 새로 쓴 것들이다. 원래는 <예서>, <악서>, <병서>, <율력서>, <천관서>, <하거서>, <봉선서>, <평준서>의 순서대로 있었는데, 예서, 악서, 병서는 망실된 뒤 예서와 악서는 다른 자료들을 토대로 다시 만들어졌으나 병서는 끝내 복원되지 못했다. 또한 율력서가 율서와 역서로 쪼개져 8서 체제를 갖춘다.

  • 예서(禮書): 예의범절이나 이와 관련한 풍속 기록을 담고 있는데, 《사기지의(史記志疑)》[34]에서는 <예서>는 《순자》의 <예론>과 <의병>편의 내용을 참조하여 후대에 새로 쓴 것으로 본다.
  • 악서(樂書): 음악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사기지의(史記志疑)》에서는 현전 <악서>를 《예기》의 <악기> 편을 참조해 후대에 새로 쓴 것으로 본다.
  • 율서(律書): 병법이나 군사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사라진 병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나, 후반부는 음률(音律)에 대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어 후대에 재구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 역서(暦書): 역법과 관련된 기록으로, 특히 한무제 연간의 역법 개정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루고 있다.
  • 천관서(天官書): 천문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이 당시 천문은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은 물론, 당시 성행하던 '천인감응(天人感應)'의 개념과 맞물려,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사상적으로 규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35]
  • 봉선서(封禪書): 종묘나 제사 관련 내용으로 무제 시기의 내용은 <효무본기>의 내용과 동일하다.
  • 하거서(河渠書): 치수(治水) 사업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 평준서(平準書): 재정, 경제 관련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한서》 <식화지(食貨志)>로 이어져, 이후 정사들이 다루는 <식화지>[36]의 모범이 되었다.

4.4 세가(世家)

춘추전국시대의 유명 제후들 및 전한의 황족, 제후들과 고관들의 기록. 여기에 공자진승이 포함된 것이 특이한 점이다. 오, 초, 월의 경우 이리저리 윤색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민족 국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기를 본따 만든 《삼국사기》에는 세가가 없다.[37]

  • 태백세가(吳太伯世家): 주문왕의 아버지이자 자신들의 아우 계력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스스로 머리를 깎고 문신을 새겨 남방 오랑캐 땅으로 들어간 태백, 중옹 형제가 세운 오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자손이 없던 태백의 뒤를 이은 중옹부터 부차까지의 오나라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태공세가(齊太公世家): 강태공이 분봉 받은 제나라, 일명 강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태공 때부터 강공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주공세가(魯周公世家): 주문왕의 아들 주공단이 분봉받은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주공부터 경공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소공세가(燕召公世家): 주문왕의 아들 소공석이 분봉받은 연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소공석부터 연왕 희, 태자 단 부자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세가(管蔡世家): 주문왕의 아들 관숙선과 채숙도가 분봉받은 관나라, 채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관숙선과 채숙도는 주문왕의 아들이자 곽나라에 분봉 받은 곽숙처, 은나라 주왕의 아들 무경과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주모자 관숙선과 무경은 처형당하고 참여는 했지만 애매한 포지션이던 채숙도는 유배, 말 그대로 참여하고 행동은 안 한 곽숙처는 면직되었다. 관숙선은 자손이 없어서 관나라는 폐지되었고 채나라는 채숙도가 유배지에서 사망한 후 아들 채중호가 다시 분봉받아 이어나갔다.[38] 관나라의 역사 기록은 분봉 후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가 관숙선이 피살되고 자손이 없어서 나라가 폐지된 기록뿐이지만 채나라의 기록은 채숙도부터 채후 제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주문왕의 아들 숙진탁의 나라인 (曹)의 역사도 별도의 세가 없이 이 관채세가 끝에 기록되어 숙진탁부터 백 양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세가(陳杞世家): 순 임금의 후손 호공이 분봉 받은 진나라와 우 임금의 후손 동루공이 분봉 받은 기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진나라의 경우는 호공 때부터 민공, 기나라의 경우는 동루공부터 간공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강숙세가(衛康叔世家): 주문왕의 아들 위강숙이 분봉받은 위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위강숙 때부터 군 각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미자세가(宋微子世家): 은나라 주왕의 형 미자계가 분봉 받은 송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미자계가 자손이 없어 그의 아우 미중연 때부터 강왕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세가(晋世家): 주무왕의 아들 당숙우가 분봉 받은 진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당숙우 때부터 정공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세가(楚世家): 축융의 자손이라는 웅역이 분봉 받은 초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웅역 때부터 부추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하나라 소강의 서자 무여가 분봉 받은 월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무여 때부터 무강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세가(鄭世家): 주선왕의 이복동생 정환공이 분봉 받은 정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환공 때부터 강공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세가(趙世家): 비염의 장남의 후예였던 숙대의 후예 열후가 분봉 받은 나라로 숙대 때부터 왕 천, 대왕 가 형제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조, 위, 한나라는 유력한 세 가문이 진(晉)나라를 삼등분하면서 탄생한 나라다.
  • 세가(魏世家): 필나라의 후예였던 필만의 후예 문후가 분봉 받은 나라로 필만 때부터 왕 가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세가(韓世家): 진(晉)나라의 방계 후손 경후가 분봉 받은 나라로 경후 때부터 왕 안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강태공이 분봉 받은 제나라의 마지막 군주 강공을 폐위한 태공 전화[39] 이후의 제나라, 일명 전제의 기록으로 진경중완 때부터 마지막 왕 건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죽서기년》과 비교하면 중간에 누락된 군주가 하나 있다.[40]
  • 공자세가(孔子世家): 말 그대로 공자의 일대기. 제후가 아닌 공자를 세가에 기록함으로서 사마천의 공자에 대한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다.
  • 진섭세가(陳渉世家): 진 이세황제 때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의 일대기. 정식 왕조로 인정받지 못하고 반란군의 수괴로 끝난 진승을 세가에 기록하여 사마천이 진승의 난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 외척세가(外戚世家): 여기의 '외척'은 한나라의 외척들을 의미한다. 한고조부터 한무제까지의 한나라 역대 황후와 황후의 친척들에 대한 기록.
  • 초원왕세가(楚元王世家): 한고조 유방의 아우인 초원왕 유교와 그 후손의 전기 유교는 사기에 '고조와 어머니가 같은 동생'이라고 적혀 있으나, 《한서》에는 유방의 이복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저소손이 마무리했으나 그 부분은 한서와 달라 잘못 보충된 것으로 여긴다.
  • 형연세가(荊燕世家): 유방의 친척인 형왕 유가, 연왕 유택과 그 후손의 전기. 유가는 유방의 사촌형이지만 《사기》에는 어느 유파에 속해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다.
  • 제도혜왕세가(齊悼恵王世家): 유방의 서장자 제도혜왕 유비(劉肥)와 그 후손들의 전기.
  •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소하와 그 후손에 대한 전기.
  •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 조참과 그 후손에 대한 전기.
  • 유후세가(留侯世家): 장량과 그 후손에 대한 전기.
  •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진평과 그 후손에 대한 전기.
  •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주발과 그 후손에 대한 전기. 다른 고제의 공신들과는 달리 주발의 둘째아들 주아부의 비중도 만만찮게 높다.
  • 양효왕세가(梁孝王世家): 한문제의 아들인 양효왕 유무와 그 형제들과 후손의 전기.
  • 오종세가(五宗世家): 한경제의 아들들 중 제후국 왕에 봉해진 이들의 전기. 제목이 오종(五宗)인 것은 이 세가에 등장하는 경제의 아들들이 각각 다섯 어머니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경제의 다섯 부인은 율희, 정희, 가부인, 당희, 왕부인 아후.
  • 삼왕세가(三王世家): 한무제의 아들들 중 제후국 왕에 봉해진 이들에 대한 전기이긴 한데, 사실 이 세가는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의 황제의 교지, 공문이나 상소, 책봉문 등을 그대로 옮겨 붙여 놓았다.

4.5 열전(列傳)

천하에 공명을 떨친 인물들에 대한 기록. 한족이 아닌 타민족의 역사도 광범위로 다루고 있으며, 다양한 직업을 가진 수많은 인물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한문학의 산문 갈래인 전 문학의 시초이기도 하다.[41]

  • 백이열전(伯夷列傳): 주문왕의 은나라 정벌을 반대하며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다 숨진 고죽국 왕자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나 실제 중심이 되는 부분은 백이와 숙제가 화를 입고 악인이 복락을 누리는 세태를 통해 천도의 정당성 여부를 논한 뒤, 기록을 통해 후세에 전달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밝히는 내용이다. 그런 고로 <열전>의 서문 같은 성격이 짙다.
  • 열전(管晏列傳): 제환공의 재상 관중과, 제경공의 재상 안영의 일대기.
  •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도가의 노자와 장자 형명학의 신불해, 법가의 한비자를 다룬 열전. 그래서 <노장신한열전>이라고도 한다.
  • 사마양저열전(司馬穰且列傳): 제경공 시대의 장군 사마양저의 일대기.
  • 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와 그의 후손인 전국시대의 손빈, 그리고 오기를 다룬 열전.
  •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오자서를 다룬 열전. 그러나 후반에 초평왕의 손자인 백공(白公) 웅승(熊勝)에 대한 기록도 있다.
  • 중니제자열전(中尼弟子列傳): 공자 제자들의 열전. 안회, 자로, 자공 등등에 대한 기록이다. 이름이 언급된 제자는 총 72명.
  • 상군열전(商君列傳): 상앙의 일대기.
  • 소진열전(蘇秦列傳):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의 일대기.
  • 장의열전(張儀列傳): 연횡책으로 유명한 장의의 일대기. 소진 다음에 장의가 활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열전의 순서도 이를 반영했지만 실제로는 반대였다는 사실이 훗날 밝혀졌다.
  • 저리자감무열전(樗里子甘茂列傳): 진나라의 첫 승상이었던 저리질과 감무, 감무의 손자 감라를 다룬 열전.
  • 양후열전(穰侯列傳): 소왕의 어머니 선태후(宣太后)의 남동생 양후 위염(魏冉)의 일대기.
  • 백기왕전열전(白起王煎列傳) : 백기와 왕전의 일대기.
  •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유가의 맹자, 순자를 비롯하여 음양가의 추연, 명가의 순우곤, 신도, 환연, 접자, 전병, 추석, 공손룡, 묵가묵자 등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일대기.
  •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제의 맹상군 전문의 일대기. 그의 식객 풍환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조의 평원군 조승과 유세객 우경의 일대기.
  •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 위의 신릉군 위무기의 일대기. 한고조 유방이 그를 존경해서인지 '위공자'로 따로 높여 부른 것으로 보인다.
  • 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 초의 춘신군 황헐의 일대기.
  •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 진나라의 재상 범수와 그의 유세객 채택의 일대기.
  • 악의열전(樂毅列傳): 악의를 비롯하여 그의 조상 악양과 악의의 아들 악간, 악승 등 악씨 가문의 열전.
  •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염파와 인상여의 열전.
  • 전단열전(田單列傳): 화우지진으로 악의를 무찌른 전단의 열전.
  •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유세객 노중련과 추양의 열전.
  •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초나라의 충신 굴원과 효문제 시기의 젊은 박사 가의의 이야기.
  •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일개 볼모였던 자초를 왕으로 만든 거상 여불위의 일대기.
  • 자객열전(刺客列傳): 여기 등장하는 자객은 모두 다섯 명으로 조말, 전저, 예양, 섭정, 형가.
  • 이사열전(李斯列傳): 진시황의 승상 이사의 일대기. 이사를 중심으로 의 흥망성쇠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몽염열전(蒙恬列傳): 몽염을 비롯하며 할아버지 몽오, 아버지 몽무, 동생 몽의까지 기록되어 있다.
  •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
  •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 경포열전(鯨布列傳)
  •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한삼걸 중 한 사람으로 《초한지》의 주역인 한신의 열전. 젊은 한신의 굴욕과 토사구팽까지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 이 열전의 한신은 '한왕 신'이다.
  • 전담열전(田儋列傳): 초한쟁패기 제나라에서 일어난 전씨 일족 관련 기록.
  • 열전(樊酈滕灌列傳)
  •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한나라 초기의 재상 장창(張蒼)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실은 주창, 신도가, 임오, 차천추 등 한나라의 여러 재상들의 일대기를 묶은 것이다.
  •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
  • 괴성열전(傅靳蒯成列傳): 유방의 장수였던 관, 흡, 괴성후 주설의 전기.
  •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 원앙조조열전(袁盎晁錯列傳)
  • 장석지풍당열전(張釋之馮唐列傳): 한문제의 법관 장석지와, 문제에게 '명장을 거느릴 능력이 없다.'라고 직언한 풍당의 열전.
  •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 전숙열전(田叔列傳)
  •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춘추시대 때의 명의편작이라 불렸던 진월인과, 한문제 시기의 명의인 창공 순우의의 전기.
  •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 오왕 유비는 유방의 형인 유중의 아들로 오초7국의 난의 주동자이다
  •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한문제의 황후인 두황후의 사촌 위기후 두영과 한경제 황후의 동모동생인 무안후 전분의 전기.
  •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한무제 때의 관료인 한안국의 전기로 한안국의 자가 '장유'이다.
  •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명궁으로 유명한 이광의 열전. 그 유명한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말이 없으나, 그 밑에는 저절로 길이 생긴다.'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 흉노열전(匈奴列傳): 흉노가 주역이긴 하지만 중항열의 행적도 여기에 전한다. 사마천이 직접 썼는지에 의문이 드는 내용들이 있다. 사기의 마지막 사건인 흉노의 연연산 전투가 수록되어 있다.
  •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한무제 때의 명장인 위청과 곽거병이 주인공. 그리고 그들 휘하에서 활약한 장수들의 약전도 실려 있다.
  • 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 한무제 때의 재상인 공손홍과 유학자인 주보언의 전기.
  • 남월열전(南越列傳): 조타가 세운 남월의 역사를 기록한 열전이다. 이 열전의 찬론은 사마천이 아니라 후세가 위작하였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 동월열전(東越列傳)
  • 조선열전(朝鮮列傳): 여기서 말하는 조선은 당연히 고조선으로 특히 '위만조선'을 지칭한다.
  •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이른바 '' 지역 남부 및 남만 방면 이민족에 대한 정벌기의 성격이 강하다.
  •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한고조의 서자인 회남여왕 유장과 유장의 장남 회남왕 유안,[42] 삼남 형산왕 유사[43]의 전기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황족처럼 보여 이들을 열전에 올릴 까닭이 있나 싶지만, 세 사람 모두 각기 다른 역모 사건으로 주살되었다.
  • 순리열전(循吏列傳): 덕망 있는 관리에 대한 열전으로 혹리열전과 대조를 이룬다.
  • 급정열전(汲鄭列傳): 무제 때의 현명한 신하들인 암, 당시의 열전.
  • 유림열전(儒林列傳): 한대의 유학자들에 대한 열전. 오경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된 유생들을 다룬다.
  • 혹리열전(酷吏列傳): 가혹한 관리들의 열전으로 순리열전과 대조를 이룬다.
  • 대완열전(大苑列傳): 장건의 서역 원정으로부터 시작된 실크로드 개척과 대완국[44] 토벌에 대해 기술했다. 전한 시대 어느 순간에 사라졌다가 《한서》 편찬 직전에 누군가가 사기의 다른 내용을 짜깁기해서 복원했다는 의혹이 있다.
  • 유협열전(遊俠列傳): 유협은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 좀 순화해도(?) 건달패들인데, 단순한 폭력배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나름대로 의리와 품격이 있다고 당대에 인정 받은 주가, 전중, 극맹, 곽해 등 이른바 협객이라 평가 받을 만한 이들의 일화를 기술하고 있다.
  • 영행열전(佞幸列傳): 황제에게 아부하여 총애를 누린 사람들의 열전.
  • 골계열전(滑稽列傳): 유머를 이용해 군주에게 직언한 사람들의 열전. 순우곤동방삭이 여기 실려있다.
  • 일자열전(日者列傳)
  • 귀책열전(龜策列傳): <일자열전>, <귀책열전> 모두 점치는 사람들에 대한 열전인데, 일자는 태양을 관찰하여 점을 치는 사람이고, 귀책은 거북점을 말한다. 망실된 것을 저소손이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일자열전에는 사마계주라는 사람의 행적이 쓰여 있다. 귀책열전에는 인물의 행적이 없어 인물의 행적을 담는 열전으로서는 특이하며, 정치 비판적 성격이 드러난다는 점도 특이한 점이다. 다만, 사마천의 원본은 실전되어 지금 전해지는 내용은 저소손이 다시 쓴 것.
  • 화식열전(貨殖列傳): 돈을 벌어 크게 성공한 이들의 성공 스토리.[45] 또한 중국 각지의 경제나 특산물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46]
  •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사마천의 집안 내력과 사기를 쓸 때까지의 삶을 담고 있다. 사기의 맨 마지막 편이지만 사기 각 편의 서술 의도 역시 담고 있어 사실은 사기 전체의 머리말이자 해제에 해당한다.[47] 한마디로 사기의 끝이자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편. 참고로 항목 맨 위에 있는 사마천의 말은 바로 <태사공자서> 맨 마지막에 있는 말로, 사기 전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이다.
  1. 한무제일곱 번째 연호. 한무제는 총 열한 개의 연호를 썼는데, 태초는 기원전 104년~101년에 사용되었다.
  2. 그래서 저 당시에는 책을 통째로 외우는 경우가 많았다.
  3. 같은 통사인 《자치통감》과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한데, 자치통감은 번역본이 서른 권이 넘는다.
  4. 사마천이 고자되기 궁형을 감수한 이유에 대한 연세대 김선자 교수의 간략한 설명.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보고자 하면 사마천 항목 참조.
  5. 삼국지연의에서는 왕윤이 이를 근거로 채옹을 살려 주지 않고 죽이게 된다.
  6. 이외에도 네이버에서는 여러 동양 고전을 볼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 오오 네이버 오오...
  7. 여기에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 대에서부터 자료가 준비되었으리라 보므로 저술에 들인 기간은 더욱 늘어난다.
  8. <태사공자서>에서 자신의 집안이 대대로 사관을 세습한 집안임을 밝히고 있다. 원래 아버지 사마담이 사서를 저술하려 하였으나, 역사 기록과 함께 천문, 역법을 담당하던 태사령의 직책에 있었음에도 한무제의 봉선 의식을 수행하지 못하자 이를 치욕으로 여겨 사마천에게 사서 저술을 당부하고 화병으로 죽었다.
  9. 사마천이 <태사공자서>에 자신이 젊은 시절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체험했다고 소략하게 써 놓았는데, 이 경험이 사기를 쓰는데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10. 참고로 후한대에 나온 《한서》는 명분을 보다 중요시하여 항우는 열전에 넣고 혜제 대에는 <혜제본기>를 따로 두었으며, 혜제의 뒤를 이은 두 명의 소제 시기만 <고후기(高后紀)>에 포함시켰다.
  11. 진승이 스스로 장초(長楚)를 세워 왕을 자칭했으나 자칭 왕이면 또한 왕인 것이지 역시 제후는 아닌 것이다.
  12. 사실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될 만한 것이 <진본기>의 한 부분인데, 조고이사가 서로 짜고 시황제의 유서를 빼돌렸는지 안 빼돌렸는지를 사마천은 물론 당대인들이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혹, 그런 소문이 있었다는 걸 반영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런 소문이 있었다고 서술하면 되는 것이고.
  13. 당시 수도였던 장안을 말한다.
  14. 또는 외손자 양운(楊惲)에게 맡겼다고도 한다.
  15. 예를 들어 저소손은 <귀책열전>을 시중에서 구하려고 했으나, 구하지 못해 다른 책들을 참조하여 보충했다고 한다. 사마천이 죽은 지 100년도 못 되어서 이런 상황이었다면 사기의 초기 역사는 상당한 수난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16. 정조는 당대에 유행하던 문장을 철저히 배격하고 고문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문체반정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17. 여기에 《한서》 <열전> 여덟 편까지 더했다.
  18. 대표 번역자는 성균관대 총장을 지낸 바도 있는 정범진 성균관대 중문학과 명예교수.
  19. 번역 당시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20. 2015년까지 <표(表)>까지 완역한 것은 이게 유일했다. 까치글방판은 표의 서문만 번역했다.
  21. 2015년에 기존에 번역한 것 중에서 표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오류를 수정하고, 미주였던 주석을 각주로 바꾸었다. 이렇게 재번역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22. <표>까지 번역한 두 번째 사기다.
  23. 한국사마천학회의 발기인이기도 하다. 위에 링크한 네이버의 사기에 들어간 중국과 관련된 사진 자료들을 제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24. 본기 2권, 세가 3권, 열전 8권, 표 1권, 서 1권까지 총 15권으로 발매 예정이고, -2016년 7월 기준으로- 본기 2권과 세가 1권까지 발매되었다.
  25. 고문에 구두점을 찍고 오탈자 등을 바로 잡은 것.
  26. 1983년 대만 굉업서국에서 낸 표점교감본도 있는데, 이를 저본으로 삼은 번역본이 있는지 확인 바람.
  27. 줄창 역사만 늘어놓는다.
  28. 그런데 이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체제상 본기가 앞에 있다는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본기를 먼저 읽으라고 추천한 모 자기계발서 작가이지성가 있었다. 그것도 중학교 1학년에게.
  29. 다만, 현전하는 사기는 55만 5660여 자 정도로 약 3만 자 정도가 더 많은데, 후대에 빠지고 더해진 결과다.
  30. '금상(今上)'은 현재 왕위나 황위에 앉아 있는 임금을 이르는 말이다.
  31. 원제선제대의 인물로, 사기에는 이런 식으로 저소손이 땜빵보충한 곳이 상당히 많다.
  32. 효무본기의 내용이 봉선 의식과 관련된 내용으로 가득찬 이유가 무제가 수십 년 제위에 있으면서 한 것이라고는 사치스럽게 제사를 지낸 것밖에 없다는 사마천의 비판적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33. 송대에 판각하면서 잘못 찍힌 것으로 보인다.
  34. 청대의 고증학자 양옥승(梁玉繩)이 사기의 내용을 분석한 사료 비판서.
  35. 다만, 사마천은 이 개념에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6. 신오대사》를 제외하면 《한서》 이후 중국 정사의 재정, 경제 관련 편의 표제는 <식화지>로 굳어진다. 우리나라의 역사서의 경우 《고려사》에 <식화지>가 포함되어 있다.
  37. 제후국이 따로 없었으니 당연하지만.
  38. 《사기》에는 언급이 없지만 곽숙처는 3년 후 복위했다.
  39. (陳)에서 망명한 공자 진경중완의 후손이다.
  40. 태공과 환공 사이에 후 섬이라는 군주가 하나 누락되어 있다. 그래서 사기에서는 후 섬의 재위 기간이 환공의 재위 기간에 포함되어 있다.
  41. 그러니까 후대의 실전(實傳), 가전(假傳), 탁전(託傳) 등은 물론, 전책(傳冊)이라 불리던 조선 후기, 인물 중심의 소설(한글소설 포함) 등도 족보를 따져보면 사마천의 열전이 원조라는 이야기.
  42. 《회남자》의 편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43. 원래 형산왕은 유장의 차남인 유발이었으나, 유발이 제북왕으로 옮기면서 여강왕이었던 유사가 형산왕이 되었다.
  44. 지금의 페르가나 지방이다.
  45. 월나라 재상 범려가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치이자피', '도주공' 등으로 불리며 갑부가 된 일화가 바로 여기에서 소개된다.
  46. <화식열전>을 따로 쓴 것은 돈이 없어 궁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마천의 개인사가 반영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47. 그래서 김영수 역에서는 <태사공자서>를 전체 책의 맨 앞, 즉 본기 앞에 수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