鍮器
brazen bowl
1 개요
구리 합금으로 만드는 기물
좁은 의미로는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놋쇠)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과 그로 만든 기물들을 뜻하는 말로 넓게는 청동[1]이나 백동 같은 주석, 니켈 합금 등 구리 합금 전반으로 만들어지는 기물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당연히 구리를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기에 청동기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신라 8세기 경[2] 때부터 유기를 만드는 국가의 전문기관인 철유전(鐵鍮典)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그 기술이 더욱더 발전하여 얇고 광택이 아름다운 유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때의 한국산 유기제품은 외국에 신라동, 고려동이라 하여 귀한 대접을 받았다. 고려 시대부터 도자기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배계급의 그릇이 청자, 백자 등 자기로 바뀌게 되어 조선 전기에 기술이 정체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기술자의 일본 납치, 파손이 잘되는 자기의 단점 등의 문제로 사대부들이 다시 튼튼한 유기를 선호하게 되면서 유기 제작이 18세기에 이르러 다시 성행하여 사대부들이 경기도 안성에다 유기를 주문생산케 하였는데 안성에서 제작된 유기는 형태나 기능이 월등히 뛰어나 사대부들의 마음을 흡족케 했고 그로 인해 '안성맞춤' 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유기장 역시 한양보다 갑절 이상 규모가 컸다고 전해진다. '유기' 하면 안성을 떠올리게 된 것이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 외에도 정주와 김천·함양은 방짜, 순천은 방짜와 주물의 중간 형태인 반방짜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안성은 주물 유기가 유명.
이후로도 유기장은 전통적인 금속공예기술로서 지역별로 독특한 양상으로 발전하였고, 실용성이 높은 고유의 공예품으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방짜 방식으로는 경북 문경의 이봉주 선생, 주물 방식으로는 경기 안성의 김수영 선생, 반방짜 방식으로는 전남 보성의 윤재덕 선생[3]등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있다.
이렇듯 전통적으로 흔히 사용되던 식기류였지만 6.25 전쟁 이후 플라스틱, 알루미늄, 스테인리스 등 새로운 재질의 생활용품이 쏟아져 나오면서 사양길에 접어들게 된다. 무엇보다 연탄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유기는 설 자리를 잃게 되는데 유기그릇이 연탄가스에 산화돼 변색되고 녹이 스는 바람에 더 이상 버티지 못했던 탓이 컸다. 20곳이 넘던 안성의 유기공방도 현재는 김수영 유기장 보유자(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가 운영하는 안성마춤유기공방만 남은 상태[4]. 그나마 근래에는 부엌에서 연탄의 사용도 거의 없어졌고 유기의 항균 기능이나 미네랄 방출 등이 주목받아 조금씩 활성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 전까지는 해외 시장 개척으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었다고.
터키에서도 유기를 만드는 곳이 있다. 주로 가지안텝에서 볼 수 있다.
2 제작 기법과 과학적인 효능
각 성분 비율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구리에 주석을 섞는 비율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기도 한다. 구리와 아연을 합금하여 만든 그릇을 황동(黃銅)유기라 하며 이 두 종류는 노르스름한 빛깔에 은은한 광택이 난다. 구리에 니켈을 합금한 것은 백동유기라 하며 흰 빛을 띤다. 구리와 주석을 섞은 청동으로 만든 유기는 향동(響銅)이라고 하는데 방짜유기를 이것으로 만든다. 구리 아연 합금에 미량 들어있는 불순물이 방짜에는 전혀 들어있지 않은 무독성의 재료이기 때문에 식기의 재료로 널리 애용되어 왔다. 거기다 항균 능력이 뛰어나 한여름에 음식을 담아 상온에 보관해도 잘 쉬지 않는다. 실제로 국내에서 실험해본 결과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 스틸 그릇에 담은 밥은 다 쉬었지만 유기에 담은 밥만은 전혀 쉬지 않았다고. 과학잡지 뉴턴에도 실렸다!
제작기법에 따라서는 방짜와 주물, 반방짜 등이 있다. 방짜유기는 북한의 납청유기가 유명하다. 방짜유기는 녹인 쇳물로 바둑알 같이 둥근 놋쇠 덩어리를 만든 후 여러 명이 망치로 쳐서 그릇의 형태로 만든다. 방짜로는 징이나 꽹과리, 식기, 놋대야 등을 만들 수 있다. 주물유기는 쇳물을 일정한 틀에 부어 원하는 기물을 만들어 내는 방법으로 주로 안성에서 성행하였다. 반방짜는 주물과 방짜 절반씩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일반적으로는 제작의 어려움, 청동의 사용, 내구성 등으로 인해 방짜유기를 제일 높게 쳤다고 한다.
방짜유기의 비율은 구리 78%, 주석 22%인데, 현대 금속공학에 따르면 주석 비율이 10%를 넘기는 구리합금은 내구성이 떨어진다. 그런데 한국의 유기는 뛰어난 내구성을 갖고 있어서, 현대 금속공학 법칙을 역행하는 듯이 보인다. 한때 산업화를 위해 현대 금속공학 이론대로 주석의 비율을 줄이자 찐득찐득해져 대량생산에 실패했다고. 링크. 금속 현미경 연구결과 가공 과정에서 망치로 치는 것이 주물 단계에서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던 구리와 주석 조직들이 서로 눌리고 혼합되게 만들어서 조직이 치밀해져 내구성이 올라가는 것으로 밝혀졌다.
3 기타
유기는 오래 쓸수록 아름답고 은은한 광택이 살아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예전에는 유기의 광택을 내기 위해 기와 빻은 가루를 짚수세미에 묻혀 문질러 닦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5] 요즘에도 바로바로 설거지만 해주면 사용하는데 지장이 없다.
조선 초기의 외척 권신인 윤원형은 집에 재산으로 저장하던 쌀이 넘쳐나다 못해 자꾸 썩자 현대 부자들이 금괴를 모으는 것처럼 이 유기를 사들였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역시 현물자산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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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동이라고 해서 일반적인 청동보다 주석 비율이 높다고 한다.
- ↑ 참고로 발해는 철제품이 유명했다고 한다.
남북이 사이좋게 금속 사랑 -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8KOR_A1914_1_0026292
- ↑ 안성공단 내에 위치해 있으며 판매장과 더불어 유기박물관도 같이 있다. 1층은 유기 제작과정을 모형으로 소개하는 체험관, 2~3층은 반상기 등 각종 그릇과 종묘제례 때 왕이 손을 씻는 관세이를 비롯한 제기 등을 소개하는 전시실이다. 청동기, 도자기 등도 감상할 수 있다.
- ↑ 현대에는 마모제가 섞인 광약이 있어 굳이 힘들여 기와를 깰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