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학길/선수경력

윤학길 항목에 통합되어 있었지만, 내용이 길어져서 따로 분리한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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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시절.

고등학교 시절부터 큰 체구와 강속구로 주목받았다. 그가 재학하던 부산상고 야구부(현 개성고)는 야구 명문이기는 했으나 항상 경남고 야구부, 부산고 야구부에 비해서 전력이 약했다. 윤학길은 부산상고를 떠받치던 기둥과 같은 활약을 했다.

연세대학교에 진학해서도 최동원이 떠난 마운드를 이어받아 홀로 에이스 역할을 했고 상무 야구단에 입대해서도 많이 던졌다.

1986년 제대한 후 롯데의 지명을 다시 받아 입단했다. 2년차인 1987년부터 3년 연속 200이닝을 던지면서 신들린 듯한 피칭을 한다. 1988년에는 18승으로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하기도 한다. 윤학길의 처음이자 마지막 다승왕 타이틀. 다만 이 시절만 해도 20승도 하지 못 한 다승왕이라며 폄하를 당하기도 했다. 윤학길은 1987년 13승, 1988년 18승, 1989년 16승을 올리면서 정상급 투수가 된다.

1990년에는 3승 12패로 크게 부진했는데 그간의 혹사 여파 때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런데 이 와중에 2승이 완봉승이다.

1991년, 17승을 올리면서 부활에 성공한 윤학길은 그 해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견인한다. 1992년에도 17승을 올리면서 한국 시리즈 우승에 일조한다.

참고로 윤학길은 무려 6시즌이나 200이닝 이상을 던져 200이닝 이상 투구 시즌이 가장 많은 투수이다. 2위는 최동원(1983년~1987년)과 정민태(1996년~2000년)의 5시즌. 다만 최동원과 정민태의 경우 연속 시즌 200이닝이다. 윤학길은 1990년만 아니었다면 7년 연속 200이닝도 가능했다.

1993년부터 구위 저하의 조짐이 보였으나 203이닝을 투구해 12완투 4완봉을 곁들여 12승에 3.01의 평균자책점의 성적으로 여전히 건재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듬해인 1994년 급격한 구위 저하와 잔부상의 여파로 4승 7패로 크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1995년은 윤학길이 마지막으로 두 자리수 승수를 기록한 시즌이다. 159와 1/3이닝을 던져 12승 8패 3.2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 속구 최고 구속이 135km/h정도에 머무를 정도로 확실히 노쇠한 모습을 보였으나 날카로운 컨트롤과 수준급의 커브와 슬라이더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이 해에 거둔 12승은 윤학길이라는 이름값에는 못 미칠지 몰라도 30대 중반의 10년간 1600이닝 이상을 던졌던 노장 투수의 기록으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해가 마지막이었다. 1996년 3승 5패의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크게 부진했다. 다만 9월 13일 잠실 LG전에서 힘겹게 완투승을 거두며 통산 100완투의 위업을 달성했다. 다른 때였다면 진작 교체되었을 상황이었겠지만 100완투 기록이 걸려있는 탓에 끝까지 밀어부쳤다고 한다.

1997시즌을 앞두고 절치부심하며 충실한 동계훈련과 함께 의욕적으로 시즌을 준비했지만 결국 선발투수 보직에서 낙마해 중간계투로 밀려났다. 시즌 초반 구원승를 하나 따내긴 했지만 총 4경기 등판에 3이닝 8피안타 2피홈런 6실점(4자책점) 12.00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초라한 성적과 함께 2군으로 강등되었고, 결국 시즌 중인 7월 24일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2군 투수코치 보좌역으로 코치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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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달인 8월 24일 한화와의 홈경기에서 은퇴식을 치르고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1]

총 12시즌동안 기록한 성적은 117승 94패 10세이브 3.33의 평균자책점. 1863이닝을 던졌으며 100번의 완투를 기록했다. 본인은 은퇴 당시 2,000이닝 돌파를 이루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2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염종석과는 반대로 혹사당하면서도 굉장히 장수한 타입이다.

체격 조건이 워낙에 좋았던 데다가 투구폼이 무리가 없었고 완급 조절에 능했던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맞춰잡는 타입이라고 하지만 실제 전성기의 윤학길은 상당한 수준의 강속구를 던졌으며 세 자리수 삼진을 어렵지 않게 기록하는 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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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상에 주자가 있든 없든, 항상 세트포지션으로 투구했다. 이는 투구 동작을 간결하게 하여 체력소모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선수시절 그의 독보적인 완투 능력을 뒷받침했던 비결인 셈.

플레이 스타일은 커맨드가 좋은 강속구 투수에 가까운 형태였다. 아마 시절에는 당연히 강속구로 유명했고 프로에서도 꽤나 혹사를 당하면서도 평균 140kn대 초반의 속구를 계속 뿌릴 수 있었다. 속구 최고 구속은 140km대 후반까지도 나왔고 슬라이더도 컨디션이 좋을 때에는 130km대 초중반을 찍기도 했던 파워피쳐에 가까운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절대 제구도 나쁘지 않았다. 코너웍에 능했으며 무엇보다 전반적인 공의 탄착점도 낮은 편이었다. 경기 초반부터 윤학길의 공이 낮은쪽 스트라이크와 볼의 경계로 날아가면 그 날은 분명히 호투하는 날이었다. 물론 영점이 잡히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이런 날은 어김없이 난타.

현역 시절 몸이 늦게 풀리는 투수로도 유명했다. 초반 3이닝만 잘 버티면 그날은 거의 완투나 완봉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역시 많은 이닝을 던지기 위한 완급조절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투구수 절약에도 굉장히 뛰어났는데 보통은 130구 이내로 완투를 하는 편이었다.

만약 혹사 당하지 않고 잘 관리 받았다면 선동열과 더불어 90년대 크보에서 가장 압도적인 투수로 기억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3 고독한 황태자

많은 사람들이 안 믿겠지만(특히 1980년대 이후에 출생한 사람들), 1980년대의 롯데는 페넌트레이스 1위를 못 해서(…) 포스트시즌이나 한국시리즈를 못가서 그렇지 성적은 나쁜 편이 아니었고, 당시 롯데는 투수 왕국[2]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

실제 선동열을 제외하면 80년대 중후반의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 계보는 거의 롯데 투수들이 이어받았다. 최동원은 말 할 것도 없고 윤학길도 선동열에 가린 면이 있으나 국가대표 에이스였다. 박동희는 아마 시절의 재능이 선동열, 최동원을 넘어선다는 평가를 들었던 선수이니 당연히 국가대표 에이스다. 사실 이 계보는 90년대에까지도 일정 부분 이어져서 문동환, 손민한등도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였다.

하지만 윤학길이 데뷔했을 때에는 황제 최동원이 아직 선수생활을 하고 있었고 1988년, 다승왕에 올랐지만 최동원급의 위력을 보이지는 못 했기 때문에 당시 롯데팬들에게 에이스로는 어딘가 모자른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동원의 은퇴 이후에는 박동희가 역대 신인 최고 계약금을 받고 데뷔했고 당연히 롯데팬들의 관심도 박동희에게 쏠렸다.

게다가 선수 시절 내내, 윤학길은 한용덕, 이강철등과 더불어 선동열에게는 결코 미치지 못 하는 2인자 그룹에 있었다. 2년 연속 17승을 올리면서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팀을 우승으로 견인한 1992년에도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인 염종석에 가려 그 빛을 잃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고독한 황태자였다.

사실 이 부분은 윤학길의 비극이자 롯데의 문제점이었다. 많은 이들이 롯데와 투수왕국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중 대표적인 것은, 롯데라는 팀 투수력이 강한 것이 아니라 롯데의 에이스가 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롯데에 있어서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인 제리 로이스터 감독[3]이 취임하기 이전의 롯데 자이언츠 에이스 계보는 최동원 - 윤학길 - 박동희 - 염종석 - 주형광 - 손민한으로 이어진다. 이중에서 선동렬과 함께 역대 최강으로 꼽히는 최동원을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투수들의 전성기 활약상은 리그의 지배자라고 하긴 힘들어도 그 누구에게도 쉬이 밀리지는 않았던 투수들이다. 문제는 윤학길을 제외하면 이 선수들의 전성기가 겹치는 시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최동원이 롯데를 떠날 떄가 되어서야 윤학길이 빛을 봤고, 박동희와 염종석은 전성기가 극히 짧았다. 손민한은 부상과 여러 사정으로 전성기가 미뤄졌고, 그 사이에 주형광이 퍼져버렸다. 진짜 웃긴 것은 염종석, 손민한, 주형광이 부산고에서 1년차씩 선후배라는 것이다. 염종석이 3학년일 때 손민한이 2학년, 주형광이 1학년이었다. 그런데 이 세 선수가 롯데에서 제 실력을 같이 발휘한 해는 단 1년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전성기가 겹치는 유일한 인물이 윤학길이다. 윤학길만이 최동원과 1년을 뛰어봤고, 박동희와 염종석이 퍼지는 것을 지켜봤으며, 주형광이 에이스로 올라오는 것을 바라봤다.[4]

이 부분이 답이 없는 것으로, 윤학길과 쌍두마차를 이룰만하다 싶은 인물이 나오면 롯데의 혹사에 퍼졌고 다시 윤학길만 믿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투수들 중에서 3명 이상이 동시에 전성기급 기량을 선보인 유일한 시즌이 1992년으로 롯데의 마지막 우승이 있었던 시기이다.[5] 그리고 롯데의 다른 우승은 최동원이 우승한 1984년 뿐이다.

그리고 이 배경은 당연히 투수를 혹사시킨 것도 원인이지만, 롯데의 불펜진이 대대로 약했던 것도 원인이다. 과거 롯데의 계투라고 하면 기억나는 선수가 거의 없을 것이다.[6] 그나마 유명한 인물이 마무리 전업한 박동희, 그리고 삼성에서 건너온 노장진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불펜투수가 나눠서 이닝을 먹어줘야 하는 것을 선발 투수, 그것도 대부분은 에이스가 감당해야 했던 것이 롯데의 특징이다. 이것 역시 최동원 이래의 전통이다. 그리고 이것은 롯데의 투수코치들이 대대로 무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학길이 다이닝을 먹은 것은 이런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친 윤학길을 내리고 대신 올릴 계투가 마뜩치 않으니 그냥 선발 윤학길이 끝까지 던진 사례가 많은 것이다.

윤학길은 포스트 시즌이건 정규 시즌이건 항상 로테이션을 지키면서 등판하여 이닝을 먹어주던 투수였다. 다만 1984년 한국시리즈의 최동원처럼 특정 대회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줄 정도는 못되었고, 그 결과 잦은 등판만큼 많은 패전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2년에는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공히 좋은 피칭을 보여주면서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견인했고 1995년 한국시리즈의 경우 롯데 선발진이 전반적으로 큰 역할을 못 한 편이었다.

1984년 전설을 써내린 최동원과 1992년 시즌은 죽쒔으나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펄펄 날은 박동희,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 해에 데뷔하여 염라대왕이란 별명까이 얻을 정도로 맹활약 한 신인 염종석, 1995 플레이오프 MVP였던 주형광에 비해 윤학길이 큰 무대에서 남긴 족적이 다소 미미할 수는 있지만 결코 약했다라고 할 수 있는 투수는 아니다. 오히려 정규 시즌에서의 미친듯한 혹사를 감안하면 포스트시즌에서 로테이션을 지키며 이닝을 먹어주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수준이다.

윤학길 이후 최다 이닝을 찍은 롯데의 투수는 2015년의 린동원. 그것도 무려 22년 만이다.

4 선수 시절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년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완투완봉
1986롯데 자이언츠2588.012202.7691224000
198731200
(5위)
1310102.57
(7위)
1916584
(7위)
13
(4위)
2
198835
(7위)
234
(1위)
18
(1위)
103
(10위)
03.15
(7위)
24156123
(2위)
17
(1위)
3
(2위)
198938
(5위)
250
(1위)
16
(3위)
11202.7022173141
(3위)
18
(1위)
3
(5위)
199026143⅔312004.07157446452
(5위)
199134205
(3위)
17
(2위)
12003.25182629911
(4위)
3
(2위)
199230212
(3위)
17
(3위)
5203.6120461131
(3위)
14
(2위)
2
(4위)
199328203
(1위)
12
(8위)
12003.01212479212
(1위)
4
(1위)
199418112⅔47005.35141284920
199524159⅓12
(10위)
8003.28148407161
1996155335004.5855251920
199743100012.0083300
한국 통산
(12시즌)
3081863⅔117941003.331851526916100완투20완봉
  1. 다만 이 시즌 롯데가 48승 1무 77패로 압도적인 꼴지를 기록한 시즌인지라 만원관중은 커녕 텅텅 빈 관중석을 보며 은퇴식을 치렀다고 한다. 혹자는 은퇴할 때까지 '고독한' 황태자였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사진에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부분은 윤학길 선수의 딸 윤지수이다.
  2. 부산 지역은 예부터 꾸준히 특급 투수들이 무더기로 나온 지역이다. 다만 롯데 에이스 계보를 보면 알수 있듯이 혹사로 인해서 선수 생활을 말아먹은 케이스가 많다. 이 외에도 레전드의 고향 충청도, 현재 초강세를 보여주는 인천 경기, 메이저리거들의 고향 호남지역을 빼놓을 수 없겠다.
  3. 로이스터 감독을 통해서 롯데 팬들이 된 이들은 과거 롯데의 역사를 뒤져보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로이스터 감독 시기처럼 장타가 펑펑 터진 적도 없고, 손민한을 제외하면 에이스가 마땅치 않았다고 하지만 10승대 투수가 3, 4명씩 나온 적도 없다.
  4.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해 롯데가 8888577을 탈출한 2008년 시즌에는 손민한, 송승준, 장원준이 시즌 10승을 거두면서 이번에야말로 뭔가를 보여주는가 했지만, 바로 다음 해인 2009년부터는 손민한이 퍼져버렸고, 2009 시즌 14승으로 공동 다승왕에 올랐던 조정훈 역시 2011년 이후 부상으로 기나긴 재활을 하게 되었으며, 장원준 또한 군복무와 FA 자격으로 두산 베어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그나마 라이언 사도스키, 쉐인 유먼이 시즌 10승을 올리기도 했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외인 투수라는 점에서 원투펀치 이상의 선발진이 나오는 듯 하다가 꼭 누군가가 쇠락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5. 윤학길, 박동희, 염종석이긴 한데, 이때도 사실 박동희의 정규시즌 성적은 방어율 4점대로 상당히 우울했다. 1992년 시즌 박동희의 임팩트는 순전히 포스트 시즌에 올라와서 기록한 성적에 의한 것이다.
  6. 박석진, 기론, 강상수가 있긴한데 전성기가 짧았으며, 매년 4~5점대 방어율을 찍던 가득염이 그나마 유명한 편이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