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延君
1788~1836
조선시대의 왕족.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로, 고종의 할아버지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조선 말엽 왕실 혈통의 뿌리.
원래 이름은 이채중(李采重)으로,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이다. 그런데 순조 때인 서기 1815년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며 남연군에 봉해졌고, 이 때 이름을 구(球)로 고쳤다. 이 양자 입적으로 제법 빵빵한 대인관계를 가지게 되었는데, 은신군의 부인이자 남연군의 양어머니 남양 홍씨는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 홍대용의 5촌 조카이자, 추사 김정희의 양모의 자매였다.
인현왕후의 백부인 민정중의 후손이 되는 민경혁의 딸과 결혼하여 4남 1녀를 보았는데, 장남 흥영군 이창응과 차남 흥완군 이정응은 젊어서 죽었고 3남과 4남이 조정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3남은 평판은 굉장히 안 좋지만 영의정을 지내는 흥인군 이최응이고 막내아들은 유명한 흥선대원군 이하응. 남연군은 막내아들의 재능이 남다른 것을 알아채고는 김정희 문하로 보내서 글과 그림을 배우도록 했다고 한다.
본래 그는 직계 왕통에서 상당히 멀었지만,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직계 왕통에 꽤 가까운 입장이 되었다. 족보상으로는 숙종의 6남 연령군의 후손이니 조금 더 가까워진 정도지만,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친아들이기 때문. 이 덕분에 당시 사람이 귀했던 왕실의 가까운 종친으로 대접받았으며 아들인 이최응, 이하응과 함께 '종친의 모범'으로 인정받은 기록도 있다. 남연군 본인은 살아 있을 때 정치적으로는 그리 큰 두각을 나타냈다거나 주목을 받지는 못한 듯하며, 기록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냥 조용하고 무난하게 살다 간 인물로 보인다.
1836년 사망한 후 경기도 연천에 묻혔었지만 뒷날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의 현 위치로 이장했다. 여기에는 유명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 지금의 남연군묘 자리에는 원래 절이 있었으나 실력 있는 지관 하나가 이하응에게 천하의 명당 자리라며 그 절을 소개했고 "그 자리는 천하의 명당이나 제왕이 두 분만 나올 자리입니다. (그러나 무덤의 주인은 화를 얻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하응은 "어쨌든 제왕이 나올 자리인데 둘이면 어떤가?"라며 지관을 데리고 그 절을 둘러보았고, 가산을 팔아 그 절 주지에게 절값을 치러 주고는 절을 태워 버린 다음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오늘날의 자리로 이장했다고 전해진다. 뒷날 고종은 이 덕에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며 남연군의 묘가 있는 가야산에 보덕사(報德寺)를 세워 주었다고 한다.
죽은 후 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영희(榮僖)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뒷날 충정(忠正)으로 고쳐졌다. 그런데 남연군묘는 손자가 왕위에 오른 후 수난을 겪게 되는데 바로 오페르트 도굴사건. 다만 지금 자리에 묘를 쓸 때 도굴에 대비해 튼튼한 석곽을 마련한 덕에 관까지 파헤쳐지지는 않았다. 살아 생전보다는 죽은 후에 그야말로 영욕을 모두 누린 인물.
현손인 이구(항목 2)와 한글 이름은 같으나 한자는 다르다. 남연군과는 달리 이쪽은 李玖. 다만 이구 항목 1과는 한자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