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


조선의 추존 국왕
목조 이안사익조 이행리도조 이춘환조 이자춘덕종 이장원종 이부진종 이행장종 이선익종 이영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태조 고황제진종 소황제장조 의황제정조 선황제순조 숙황제문조 익황제헌종 성황제철종 장황제
조선의 역대 왕세자
문효태자 이순문조 이영헌종 이환 (왕세손)
선원보감에 남아 있는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초상화
묘호익종(翼宗) → 문조(文祖)
시호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
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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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
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본관전주(全州)
능묘수릉(綏陵)
이(李)
영(旲)
덕인(德寅)
배우자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아버지조선 순조
어머니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생몰기간음력1809년 08월 09일 ~ 1830년 05월 06일
양력1809년 09월 18일 ~ 1830년 06월 25일
재위기간[1]1827년 2월 ~ 1830년 5월 6일

1 소개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의 세자. 24대 왕인 헌종의 아버지. 헌종익종(翼宗)으로 추존했고 고종은 1899년 문조 익황제(文祖 翼皇帝)로 다시 추존했다. 문조로 추존했음에도 보통 익종 내지 효명세자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위의 초상화에서 20대 초반에 죽은 사람이 왜 저렇게 삭았느냐에 대해서는 넘어가자. 효명세자와 헌종은 상당히 닮은 용모였다고 한다. 그래서 어릴 적 아버지를 잃은 탓에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헌종이 '초상화 보다도 돌아가신 부친과 얼굴이 닮았다'는 말을 듣고 거울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런데 선원보감의 초상화는 익선관 대신 신하가 쓰는 사모를 쓴 점 등 그냥 대충 그린 그림이라는 의심이 짙다.

2 엄친아

1812년 왕세자에 책봉 되었다. 참으로 정말 오랜만에 정식 왕비 소생 원자가 세자가 되었다. 정식 왕비 소생 세자는 숙종 이후 처음. 경종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기 전에 태어났으니 일단은 서자였고, 영조사도세자는 후궁 소생이다. 정조는 정실 소생이긴 하지만 부모를 왕과 왕비로 추존하지 못했고, 순조는 후궁 소생이다. 1819년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여 헌종을 낳았다. 그의 아내가 후에 고종때 잠시 섭정을 맡는 신정왕후 조 대비다.

외모가 출중했고 대단히 영특하고 재능이 있었던 인물(한마디로 엄친아)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눌려있던 아버지 순조도 많은 기대를 걸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의 제작에 관여한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학자들은 효명세자가 동궐도를 그리게 한 데에는 왕권 강화책과 연관이 있지 않나라는 해석을 한다.

순조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1827년 순조는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고 이후 4년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왕이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자 신하들은 크게 환영하였을 정도로 기대를 받았다.[2][3]

효명세자는 아직 어린 나이(이때 아직 20살도 채 안되었다)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일처리로 조정의 기강을 잡았으며 어느 수령이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소리가 들리자 엄한 벌을 내리며 단속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판서급, 심지어 정승도 마음대로 제수하는 등 대리청정에 걸맞는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때 기용된 인물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시조로 불리는 박규수다.

다른 한편으로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표현하고 아버지 순조의 권위를 높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순조의 탄신 진연등의 주요 연회들을 성대하게 개최했다. 이 연회들의 핵심에는 '정재'라고 불리는 궁중 무용이 있었는데 효명세자는 직접 정재의 대부분을 수정하거나 다듬는 등 예술에도 재능을 드러냈다. 그래서 효명세자를 태양왕으로 부르며 직접 발레 공연에까지도 나섰던 프랑스루이 14세와 견주기도 한다. 칼춤에 쓰이는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노는 독특한 구조의 칼을 도입한 사람도 이사람.

3 요절

그러나 효명세자는 갑자기 병에 걸렸고 불과 2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덕일을 필두로 한 일각에서는 안동 김씨들의 독살설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사실 가문간 싸움을 회피했던 김조순(1832년 졸)이 아직 살아있던 시점이나, 각혈 후 어의들이 갖은 방도를 썼으며 재야에 있던 정약용까지 부르려고 했던 점을 보면 딱히 독살이라고 보기엔 힘들다. 그 때문인지 과로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순조는 효명세자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순조가 직접 쓴 제문을 보면 자식 잃은 부모의 한이 절절히 느껴진다. 안 그래도 몸에 병이 깊어지는데 효명세자의 뒤를 따라가듯 순조의 두 딸 명온공주와 복온공주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쓰러져 두 해 뒤인 1834년 세상을 뜨게 된다.

아들 헌종까지 요절하면서 효종으로부터 이어진 왕통은 사실상 단절되고 만다. 그나마 영조의 방계 자손인 철종이 뒤를 이었지만 그마저 죽으면서 완전히 단절되고 그의 양자로 지정된 고종이 뒤를 이었지만 고종이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자손이라 안습.

추존 문조, 즉 효명세자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수릉(綏陵). 본래 효명세자는 죽고 나서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의 의릉 왼쪽 언덕에 장사지냈었지만 풍수에 관한 논의가 있어서 철종 때인 1855년에 오늘날의 자리로 이장했다. 1890년 대왕대비였던 아내 신정왕후 조씨가 승하하자 함께 합장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동구릉을 방문하면 팸플릿을 하나 주는데 이 팸플릿에 적혀 있는 추천관람코스대로 동구릉을 관람하게 되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능이 바로 수릉이다. 사실 동구릉은 팸플릿의 추천코스대로 수릉부터 관람하는게 편하다.

4 이모저모

세자의 대리청정 기간 동안 세자가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는 모습은 보인 적이 없다. 김조순의 아내(다시 말해 외할머니)가 죽자 직접 찾아가 문상하는 등 최고의 존중을 보여주었고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이 부임지에 첩을 데려가다가 난리난 적이 있었는데[4] 신하들이 김유근을 탄핵하자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며 탄핵한 신하들을 유배보내 버렸다.[5] 안동김씨를 견제할 맘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행하진 않았다. 그리고 집권 기간 동안 풍양 조씨에 러브콜을 보낸 흔적도 없다. 효명세자는 순조 27년 2월 9일부터 대리청정에 들어가서 30년 5월 6일에 죽는데 그동안 김유근, 김이교, 김이재 등 안동 김씨들은 고위 관직 다 해먹었다.

고종이 그의 양자가 된 뒤(입승대통)로 재추존했는데, 조선은 물론 세계를 통틀어 가장 긴 시호로, 아래와 같다. "황제"라는 칭호를 제외하고 자그마치 113자.

원래는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의 34자였다. 그러나 1863년(즉위년), 1868년(요순우탕), 1875년과 1876년, 1878년, 1883년 음력 1월(임오군란 직후/신정왕후 왕대비 즉위 50주년), 1886년 11월, 1890년 10월, 1892년 1월(조선 건국 500주년), 1902년(고종 즉위 40주년) 10차례에 각각 8자씩 80자가 추가 된 것이다.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치중달화계력협기/강수경목준혜연지/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致中達和繼曆協紀/剛粹景穆峻惠衍祉/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5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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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된 문조(효명세자)의 어진

현재 남아 있는 어진은 면복본(冕服本)으로, 왕세자의 면류관곤복인 8류면 7장복 차림으로 되어 있다. 복식연구에서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지만 하늘은 그의 초상화까지 불운하게 만들었는지, 한국전쟁이후 대화재로 초상화가 불에 탔는데, 하필이면 세로로 불탄 것이 얼굴을 포함해 타버리고 나머지만 남아서 복구가 불가능하게 돼버렸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운 없는 건 아버지와 판박이라서, 순조의 초상화는 원유관에 강사포를 착용한 것이라 이 또한 효명세자의 초상화 못지 않게 중요한 자료이지만 이 그림도 얼굴 부분이 불타는 통에 역시 복구가 불가능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위 그림인 선원보감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보다시피 아들 헌종처럼 사망한 연령에 비해 상당히 노안인 얼굴이라는 것. 아무튼 그래서인지 선원보감의 얼굴을 배경으로 저 탄 초상화를 복원하자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실은 이미 복원한 초상화가 있다!!!

복원된 문조(효명세자)의 어진

권오창 화백이 불에 탄 부분에 얼굴부분을 그려넣었는데, 얼굴을 상상한 상상화인 관계로 문화재나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진 않고 개인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복원본과 선원보감의 초상화 눈의 위치가 비슷한데 선원보감의 그림을 보고 복원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선원보감의 그려진 문조는 노안으로 그려진 반면 이 초상화는 그런대로 연령에 맞는 외모로 그려져 있다.

6 미디어에서

사극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시기를 살았기 때문에 미디어에서 다뤄진 일은 드물다.

네이버 웹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가상의 여자주인공 홍라온과 궁중 로맨스를 이루는 왕세자 이영으로 등장한다.

드라마판에서는 박보검이 캐스팅됐다. 여기서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아들 헌종 대신 순조 다음 왕이 된다. 아아, 실제 역사가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1. 대리청정 재위기간
  2. 과거에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면 신하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서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는 달랐다. 세종대왕 때는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신하들이 반대했는데 세종이 "아파 죽겠다, 라고 일갈하고 나서야 간신히 집행될 수 있었다. 숙종 때는 세자인 경종에게 대리청정이 명해지자 (오히려)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노론이야 좋아했지만 소론에서는 윤지완 등이 도끼 상소까지 하며 반대하는 등 분위기가 험악했었다. 영조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세손의 반대파 홍인한, 정후겸은 물론 김상철, 한익모 등 당시의 대신들이 모조리 들고 일어나 결사반대했다. / 근데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때는 남공철, 김재찬, 한용귀, 김사목, 이상황, 심상규 당시의 중신들이 전부 두팔을 벌려 환영하며 왕의 서무 명령 비망기를 그야말로 '찬양'했다고 실록에 표현될 정도였다.
  3. 순조실록 권28 순조 27년 2월 9일 을묘 4번째 기사
  4. 웬 아전이 김조순과의 면담을 요청했다가 거부되자 뛰어들어 김조순의 서제부와 종 두명 그리고 주모를 베어버렸다.
  5. 순조실록 권29 순조 27년 5월 24일 기해 1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