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소개
대한민국의 前 대학수학능력시험/과학탐구 영역 강사, 現 교육평론가. 서울시 교육청 정책보좌관. 자서전으로는 '이범, 공부에 反하다'가 있다. 손주은과 함께 메가스터디의 설립자이며, 인터넷 강의 1세대이기도 하다.[1]
2 경력
2.1 고등학생 ~ 대학생
경기과학고등학교를 나온 과학고등학교 1세대로서(당시 서울에는 과학고가 없었음),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의 분자생물학과를 졸업했다. 90년대 중반 운동권 논객으로 매우 유명했다.
스스로 자서전에서 밝히기를, 그는 과학도이지만 인문학 쪽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밝히길 당시 경기과고 1기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취미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자서전(이범, 교육에 反하다)에 따르면 판소리만 주구장창 듣는 국악덕후와 기숙사를 같이 쓸 정도였다고. 본인의 취미는 바로 다름아닌 독서였는데 특히 역사를 좋아했다고 한다. 심지어 학력고사에서는 문과생들마저도 선택을 거의 안하는 세계사를(!) 선택과목으로 골랐단다. 이러한 그의 성향 때문에, 그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의 최초 졸업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과학철학을 배운 사람다운 면모가 강의에 녹아난다. 이런 그가 학원가에 출정하게 된 동기는 유학자금을 벌어보려고 한 것인데, 결국 그게 본업이 되었다. 어찌보면 자신의 꿈과 돈을 맞바꾼셈.
2.2 메가스터디 강사 시절
2000년대 초반에는 '이범의 통합과학'으로 엄청난 수강생을 모았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메가스터디 전체 매출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다. 당시 수험생이라면 '이범의 과탐 1000제'[2] 정도는 누구나 한 권씩 들고 다녔다. 유명세를 타서 바빠졌을때에도, 그는 개인적으로 전화를 걸어서 질문을 해도 화내지 않고 친절하게 해설해주었다는 증언이 있다. 성격이 비슷해서인지 당시 언어영역 인기강사였던 조진만과 절친이었다.[3]
원래부터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일은 일종의 정신노동자인 학원 강사가 이토록 쉽사리 망가지는 소모품처럼 일을 해야 하는 현실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이후 메가스터디의 경영권을 둘러싼 손주은 일가의 싸움을 보면서 더 강한 환멸을 느꼈고, 결국에는 학원가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무료강의를 통해 배움의 평등을 이루겠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른다.
2.3 무료강의 시절
하지만 막상 무료강의를 선언한 후의 행적에 대한 평은 영 좋지가 않다. 처음에는 EBS에 출강하려다가 EBS의 폐쇄적이고 관료적인 태도에 환멸을 느껴 계획을 접게 되었다.(이 내용은 2006년 이범이 본인의 자서전 및 강연회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런데 2007년에는 EBS 통합과학논술 강의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거 뭥미? 마음이 1년 사이에 바뀌었나[4] 어찌됐든 EBS가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입각, 그 대안으로 '프리에듀'라는 사이트를 직접 차려서 거기에 자신의 주특기인 '과탐 전과목 강의 가능'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서 강의를 올리기 시작했다.
2.4 강남구청 인터넷 수능방송 시절
그 뒤 강남구청인터넷수능방송(강남인강)이 EBS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자신의 개인 사이트를 접고[5] 강남구청에 출강하여 물1, 화1, 생1, 지1 강의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강남구청에서의 강의 업로드가 상습적으로 지연되고, 심지어 2006년판 지구과학 1은 끝내 신규촬영이 불가능해지자 2005년판을 재탕에서 올리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와중에도 외부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다. 그런 타이밍에 딱 자서전(이범, 교육에 反하다)을 출간하고서 지금의 신논현역[6] 바로 옆에 있는 교보타워 22층 대형 홀을 빌려 수많은 학부모들과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교육 이상에 대해 홍보하기도 했고, 또한 한겨레신문에 꾸준히 칼럼을 내는 등 바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자신의 이상인 사교육 근절을 위한 실천적 행동이라고 줄기차게 홍보해대던 무료수업은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정작 밖으로 겉돌며 사교육 현실을 비판하며 바로잡겠다고 말만 내세우는 것은 아가리 파이터? 이중적이라는 비판이 게시판에 빗발치게 된다.[7] 이렇게 '강사'로서의 이범의 인생은 덧없이 막을 내리고, 한겨레신문 및 행정계에서 교육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교육평론가'로서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제 이범은 더이상 강사가 아니다.[8]
2.5 교육평론가 시절
교육평론가로 클래스 체인지 전직 후에는 '이범, 교육에 反하다' 등 몇 권의 교육비판서, 사교육비판서를 냈는데, 그가 고액 사교육의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이였던 관계로 내용이 매우 충실하고 현실적인 것이 특징. 특히, 위의 '이범, 교육에 反하다'라는 책에는 2000년대 초중반 메가스터디의 태동, 발전 과정과 내부의 권력 암투가 매우 상세히 기술되어 있어 매우 볼만하다. 그 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밑에서 정책보조관을 역임했다. 곽노현이 교육감 직을 상실한 후에는 안철수 대선캠프에 교육정책 코디네이터로 영입되었다.
2.6 현재
오마이스쿨에서 최진기 등과 함께 강의하기도 하였다.[9]
2014년 10월 새정치민주연합 부설 정책 연구소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으로 선임되었다.[10] 경제학자 우석훈씨와 함께 선임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관련기사
3 비판
일반적으로는 대인배로 알려져 있지만[11], 무료강의에서 숱하게 보인 불성실한 모습으로 인하여 그 명성이 다소 빛이 바랬다. 더구나 이범과 EBS에서 통합논술을 공동강의했던 강사는 대치동에서 가장 돈지랄이 심하기로 유명한 수리논술 학원 원장이라(..) 진정으로 고액 사교육을 퇴출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는 항의도 받은 적이 있다. 여기에 덧붙여 비상에듀 영어 강사 정지웅은 운명의 EBS 영단어 강좌에서 그의 이미지는 사기이며 자신은 진실을 알고 있다며 디스했다.[12] 사교육을 떠난 건 대의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수강생이 줄어서 은퇴하는 것을 포장하기 위함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13][14] 당시 학원가에 떠돌던 소문도 이런 내용이었는데, 이범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는 군소 학원들이나 타 과목 학원들, 심지어 공교육계에서도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이다.- ↑ 이범은 '이게 성공하겠느냐'고 인강에 투자하길 꺼려했다고.
- ↑ 6차 교육과정 시절 문이과 모두 공통과학을 치렀던 때이기에 유명세일 수밖에... 강사시절에 물화생지를 모두 강의했다고 한다.
- ↑ 불행히도, 조진만은 수업과 학생 챙기기를 모두 적극적으로 하다가 끝내 몸이 이겨내지 못하고 급성 폐렴으로 과로사하고 말았다. 자서전에서 이를 매우 비통하게 서술하고 있다.
- ↑ 2005년~2008년까지는 여러 과목의 내용을 짬뽕해서 논술을 치는 이른바 '통합교과논술'이라는 것이 유행을 탔다. 그래서 이범도 당시 대치동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던 모 수학논술 전문 학원 원장과 통합 수+과 논술을 진행했다. 헌데 그 학원이 고액의 폭리를 취하는 학원으로 유명했던지라 이범이 변심을 했다고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 초반에는 일부 강의는 프리에듀를 이용하고, 나머지는 강남구청에서 가르치는 식으로 운영되었다.
- ↑ 당시에는 그 자리에 신논현역이 없었다.
- ↑ 이후 곰스쿨에서도 무료강의를 진행한 바 있는데, 이것 역시나 교육과정이 바뀌었는데 새 강의는 올라올 기미가 없다. 강남구청의 전철을 따라가는 듯하다.
- ↑ 극과 극은 통한다고, 그의 저격 1순위 대상이었던 손주은도 이젠 더이상 수능강의를 하지 않는다. 메가스터디 운영하느라 바빠서 그렇다고? 손주은은 이미 회장의 자리에 올랐던 2008년까지도 윤리와 근현대사(옛날 교육과정에 있었던 과목으로서, 한국사의 근현대사 부분만 모아놓은 과목), 세계사 강의를 진행했다..ㄷㄷ
- ↑ 현재는 중단
- ↑ 그래서 안철수와는 사이가 멀어진 듯 하다.
- ↑ 2006년 초여름 경 '이범, 교육에 反하다'가 처음 출판되었을 때는, '연봉 19억을 포기하고 메가스터디를 과감하게 뛰쳐나온 강사'라는 홍보문구를 이용하여 자기 PR을 적극적으로 하던 때였다.
- ↑ 강의 완강하나 제대로 못하던 정지웅이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 ↑ 실제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심화과목을 제외하고는 사회탐구와 과학탐구가 통합형으로 출제되었던 6차 수능에서는 이범, 손주은 등 통합과탐 및 통합사탐 강사들이 강세를 보였다. 그러나 2005수능부터 공통과목이 사라지고 탐구영역이 완전 선택응시로 바뀌면서 통합과탐의 선두주자였던 이범은 그 입지를 잃게 되었고,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한 과목만을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방식이 대세가 되었다.
- ↑ 하지만 이번 교육과정부터는 통합사회, 통합과학이 부활하기 때문에 탐구에서 이런 멀티 포지셔닝이 가능한 강사들이 다시금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