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상

1 조선시대의 무신

교토대학교 박물관에 전시 중인 초상화

이봉상(李鳳祥) / 1676(숙종 2)∼1728(영조 4).

덕수 이씨 이며 자는 (儀叔).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이다. 이인좌의 난 때 반란군에게 피살되었으며,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1 행적

1676(숙종 2)년 출생. 1702년(숙종 28)에 무과에 급제했다. 경종의 재위 중에 포도대장, 훈련원도정 삼도수군통제사[1], 총융사 한성부우윤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이 무렵 사헌부에 탄핵을 받았는데 영조가 윤허하지 않았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봉상(李鳳祥)은 지난날 흉당(凶黨)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적에 이미 불러다 빌붙었다는 꾸지람이 있었는데, 지금 조정이 청명한 때에 이르러서도 음흉하고 교사스런 짓을 한 자취가 많습니다. 군부(軍府)의 재화(財貨)를 마구 남용하여 죄를 받고 귀양가 있는 흉도(凶徒)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었으며, 군부의 중요한 일이 무엇을 위한 일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도감(都監)이 장차 폐국(廢局)되는 지경을 면치 못하게 만들었으니, 이봉상(李鳳祥)을 파직(罷職)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1725년(영조 1), 형조참판, 훈련금위대장을 겸임하였다. 정미환국 시기에 밀려나서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2 죽음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켜서 청주를 함락하였을 때 포로로 잡혔다. 이 때 이인좌는 상여에다가 병기를 실어 청주 경내에 들여보냈는데, 민간에서 적이 이르렀다는 말이 무성하고 이봉상에게 보고한 병사도 있었으나 이봉상은 이를 믿지 않았다.

결국 성 안의 관리들 가운데 호응하는 사람이 많았고, 밤중에 적이 쳐들어오자 영기(營妓) 월례(月禮)와 이봉상이 친하게 지내고 믿던 비장(裨將) 양덕부(梁德溥)가 문을 열고 적군을 끌어들였다. 이봉상은 밤중에 당황하게 침상 머리에 두었던 칼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적에게 끌려나와 칼로 위협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봉상은 “너는 충무공(忠武公) 집안에 충의(忠義)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으냐?”라고 세 번 외치고 살해당했다. 군관(軍官) 홍임(洪霖)이 달려와서 이봉상 위에 엎드리며 "내가 진짜 절도사다."라고 외쳤는데 적이 끌어내서 항복하라고 협박했지만 그 역시 욕을 퍼부었다. 이인좌는 "너는 충신이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나를 죽일까 염려되니 죽인다. 일이 성사되면 후손을 녹용하겠다."고 칭찬했으나 홍임은 "나는 아들이 없지만 있어도 너 같은 역적에게 등용되지 않는다!"[2]고 소리치고 죽었다. 이 때 남연년(南延年) 역시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나이 70이 넘었는데, 어찌 개새끼(狗子) 같은 너희를 따라 반역을 하겠느냐?"고 하며 죽었다. 어사 이도겸(李道謙)이 청주에서 돌아와 그 순절을 전했다.

이봉상의 숙부 이홍무(李弘茂) 역시 이 무렵 64살의 노구였는데, 반란군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자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으며 역시 벼슬이 추증되었다.

나중에 박문수의 보고에 따르면, 충청병영에 있던 기생 해월(海月)은 홍임이 좋아하는 상대였는데, 병영이 함락되자 해월은 몰래 뇌물을 주고 홍임의 시체를 찾아내서 장사지내려 했는데, 이봉상 역시 들어갈 관이 없이 방치된 것을 알고 홍임의 시체는 베로 싸고 이봉상의 시체를 관에 넣어 숨겼다고 한다. 해월은 의로운 일을 했다고 하여 면천되었다.

1.3 사후

영조는 이봉상을 좌찬성에 추증하였으며, 헌종은 청주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제향하게 하였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라 하여 충민공이라 부른다. 나중에 조상 충무공 이순신과 현충사에 함께 배향되었다.

1.4 유물

교토대학 박물관에 초상화가 보관되어 있으며, 육군대학박물관에 투구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블로그

충민공 신도비가 존재한다.

1.5 여담

영조 시기에 한자도 똑같은 '이봉상'이라는 죄인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혼동이 매우 심하다.

2 한국 현대 서양화가

李鳳商 (1916-1970)

서울 출신. 1937년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연습과를 졸업했다. 1943-1949년 사이에 경성여자사범학교(京城女子師範學校)·경동고등학교 등에서 교직생활을 거쳤고 1952년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미술과 강사,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홍익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국전 추천작가를 거쳐서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오랫동안의 교직생활을 통하여 미술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아동미술의 운동에도 관여했고 미술평론에도 관계했다. 그룹 활동으로서는 해방 후 1947년 미술문화협회(美術文化協會)의 결성에 참가했고, 1953년 기조동인회(其潮同人會)를 필두로 창작미협(創作美協)과 신상회(新像會)의 창립회원으로 활약했으며 현대작가초대전의 초대작가이기도 하다. 작풍은 과도기의 양식을 보이는 구상(具象) 경향으로서 발색(發色)있는 화려한 색면의 유니크한 작품세계를 보인다. 작품은 <정물> <고궁(古宮)에서> <산> 등이 있다.
  1. 95대
  2. 아들이 2명 있었는데 모두 요절했다. 다만 기첩(妓妾)이 낳은 유복자가 있어서 면천되고 장성한 후 녹용되며, 홍임의 손자 역시 녹용되었다. 누가 이겨도 녹용됐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