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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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영정. 보물 1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암행어사 박문숩니다. 거 사또 이름이 누구요
도지사와 같은 이름의 박문수입니다[1]

MBC에서 이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를 찾으시는 분들은 어사 박문수 항목 참조.

박문수(朴文秀) (1691 ~ 1756년). 조선 시대의 문관. 본관 고령(高靈)으로, 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시호는 충헌(忠憲)이라 한다.

강직한 성품으로 백성의 편에 서서 바른 말을 잘 하였기에[2][3], 벼슬길은 그리 평탄하지 않아 끝내 정승에 오르지는 못했다.판서에 오른게 어디냐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았으며, 저서는 《탁지정례(度支定例)》 《국혼정례(國婚定例)》가 있고, 글씨는 《오명항토적송공비(吳命恒討賊頌功碑)》가 있다.

2 유년기와 과거 합격

어려서 돌림병으로 부모를 여의고 독신인 숙부 밑에서 지냈는데, 이러한 가정 환경 때문에 소싯적에는 꽤 불량했다고 한다. 그러나 뒤늦게 마음을 고쳐먹어 1723년(경종 3) 33세에 증광문과[4]에 급제, 사관(史官)이 되었다. 참고로 이때 박문수의 성적은 전체 합격자 41명중 26번째였다.

야사에 따르면 '귀신에게서 신시(神詩)를 받고' 장원에 급제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에 관련 에피소드가 소개된 바 있다. 과거를 보러 가다 어떤 초립 동자에게 '과거가 이미 치뤄졌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멘붕상태에 빠졌는데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여담이지만 경종 3년에 급제 못했으면 노론이 득세한 영조 시절이니 급제 영영 못할 수도 있긴 하다(...)</ref>, 그 동자는 당시 과거시험 시제나 장원급제자의 시문이 이러이러했다며 가르쳐주고 갔다.

그래도 올라온 김에 한양에 사는 집안 어른에게[5]인사나 드리고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그냥 서울로 올라가 찾아 뵈었더니 그 어른 왈, "뭔 소리야? 아직 시험까지 3일 남았는데?"(…). 결국 시험을 무사히 볼 수 있었고 과거 시제에 동자가 가르쳐준 시문의 앞부분이 나와 그 덕에 급제했다는 소리.[6] 이 전설에서 동자가 알려준 시제가 '낙조(落潮)'라는 시인데 현재까지 남아있다.

落照吐紅掛碧山(낙조토홍괘벽산)

寒鴉尺盡白雲間(한아척진백운간)
問津行客鞭應急(문진행객편응급)
尋寺歸僧杖不閑(심사귀승장불한)
放牧園中牛帶影(방목원중우대영)
望夫臺上妾低鬟(망부대상첩저환)
蒼煙古木溪南路(창연고목계남리)
短髮樵童弄笛還(단발초동농적환)

지는 해는 푸른 산에 걸려 붉은 해를 토하고
찬 하늘에 가마귀가 흰 구름 사이로 사라진다.
나루를 묻는 길손의 채찍질 급하고
절 찾아 가는 스님의 지팡이도 바쁘다.
뒷동산 풀어 놓은 소 그림자 길기만 하고,
망부대 위로 아낙네 쪽(머리) 그림자 나지막하다.
오래되어 예스런 고목들이 줄지어 선 남쪽 냇길에
짧은 머리 초동이 피리 불며 돌아온다.

맹꽁이 서당 버전이나 여러 채록에 따르면 초립을 쓴 동자는 마지막 구절은 생각이 안난다고 하고 풀피리를 불며 가버렸는데, 그래서 이 장면을 보고 박문수가 마지막 구절을 "환(돌아가다)"으로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일부 구전에서는 채점관들이 이 시를 보고 "이는 귀신의 시다"라고 하며 불합격시키려다가 마지막 구절만큼은 사람이 썼다고 하여 합격시켰다고도 한다.

이 일화와 이어지는 구술에서는 이 초립동이 박문수가 억울한 죽음을 풀어준 꼬마 신랑이었다고. 요약하자면, 박문수가 과거 보러 올라가는 길에 어느 대갓댁에 신세를 졌다. 이날 밤 박문수가 소변을 보러 나왔다가 누군가 월장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다음날 길을 떠났다가 위의 초립동을 만나게 된다. 급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대갓댁에 들르니 저번에 묵었을 때 갓 장가들었던 아들이 사망했다는 말을 듣는다. 며느리의 친정이 경상도라는 말을 들은 박문수는 짚이는 바가 있어 인근 서당을 수소문해 최근에 경상도에서 이 동네로 올라온 청년을 찾아낸다. 이 청년은 며느리와 애인 사이였고, 며느리가 먼 지방으로 시집을 가자 따라와 그 신랑을 살해한 것. 그날 밤 박문수가 목격한 그 월장하는 그림자가 이 남자였고, 살해당한 신랑은 박문수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줄 수 있게 과거급제를 도왔다는 얘기다. 이 정도면 민담 치고는 꽤 복잡한 플롯. 은혜갚게 하는 신랑이라... 근데 야사라는걸 감안하면 마지막 구절에서 모든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야사대로라면 늦깎이로 성공한 박문수의 인생역정을 폄하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이 이야기는 딱히 박문수를 폄하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박문수처럼 노력하는 사람은 하늘이 돕게 되어 있다" 정도의 의미이니 지나치게 깊게 보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 특히나 숙박비가 없어 될대로 되란 식으로 귀신들린 폐가에 겁도 없이 묵었다가 귀신의 유골을 수습해주고 신인의 시를 얻었다든가, 여하간 원한을 풀어주고 보답으로 시나 글을 받아 과거에 급제했다는 유형의 설화는 상당히 많다.[7]

3 정계 진출

정치적으로는 범 소론에 속하나 정확히는 탕평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8] 1724년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가 노론(老論)이 집권하자 삭직당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득세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어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관리들을 적발했다. 이듬해 이인좌의 난 때는 당시 병조판서였던 오명항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해 반란군 진압에 전공을 세웠고 난을 진압한 후에도 홀로 마을에 남아서 민심을 수습하는데 앞장 섰다. 그 공으로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고,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어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 호서(충청도)어사(湖西御史)로 기민(飢民) 구제에 힘썼으며, 1734년 진주부사(陳奏副使)[9]청나라에 다녀온 뒤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참고로 그의 먼치킨스러운 면을 볼수가 있는데 과거 성적은 그저그랬지만 과거 급제후 현재의 국방부 장관급인 병조판서에 오를 때까지 걸린시간은 단 15년만이었다. (1723년 과거합격, 1737년 병조판서 임명)

1738년 다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앞서 안동서원(安東書院)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부사(豊德府使)로 좌천되었다. 1741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이어 함경도 진휼사(賑恤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가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10]

그 후 다시 병조판서를 지내고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11].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良役)의 폐해를 논하다가 다시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좌천되었다. 그 뒤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 등을 거쳐 세손사부(世孫師傅)를 지내고[12], 1752년 왕세손(王世孫:琔)이 죽자 약방제조(藥房提調)로서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濟州)에 안치, 이듬해 풀려나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보다시피 굴곡이 심한 관직 인생을 살았다. 이후 그 유명한 1755년 소론이 주도한 '나주괘서사건'에 휘말려 그와 관련한 옥사에 연루되었는데 영조는 직접 박문수를 불러 안심시키고 여전한 신임을 보여 주었으나 이후 스스로 죄인을 자처한 다음 세수도 빗질도 않으며 집에 틀어박혀 살다가 이듬해인 1756년에 생을 마감했다.

영조는 적이 많은 박문수를 많이 감싸는 편이었는데, 오죽하면 경연 자리에서 상례에 과하게 벗어나는 까칠한 농담을 날려대도 박문수가 아니면 누가 저렇게 바른말 하겠냐, 원래 쟤 성격이 저런 걸 새삼스럽게 고치겠냐 따위의 말로 덮어버렸다. 드나들 때 문 닫는 걸 깜빡한 것만으로도 잘못이 되어 추고를, 요즘으로 치면 시말서 처분을 당하는 추상같은 경연 자리에 "임금은 부모고 백성은 아들이라면서여. 아들이 아버지 얼굴 좀 본다고 세상 뒤집어집니까. 코 처박고 아부떠는 것보다 우리 얼굴 좀 보고 이야기하시져?"(영조 9년 1월 25일 승정원일기.) 따위의 직격탄을 마구 날려대는 걸 다 받아준 것. 박문수가 호조에 있을 때 한 번은 어영청에 꿔간 군량미를 갚으라고 독촉한 적이 있었는데, 어영대장은(노론이었다) 나름의 논리로 반박하며 임금의 탑전에서조차 첨예하게 싸웠다. 이때도 영조는 박문수의 편을 들어줬다.[13] 박문수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가 정승이 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해서 세상을 떠난 그 날로 바로 박문수에게 영의정을 추증했으며 그에 대해 이런 말로 안타까움을 표했다.[14]

" 영성(靈城:박문수)[15]이 춘방(春坊:세자궁)에 있을 때부터 나를 섬긴 것이 이제 이미 33년이다. 자고로 군신(君臣) 중에 비록 제우(際遇)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나의 영성과 같음이 있으랴?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영성이며,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그가 언제나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깊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ㅡ《조선왕조실록》 영조 32년(1756년) 4월 24일.

4 암행어사 박문수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이지만 일반대중들에겐 특히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을 때의 인상이 강한 인물이다. 허나 사실 실제 암행어사로 활동한 시기는 1727~1728년의 1년간에 불과하며, 그나마 그 1년도 영남 첩보 목적으로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배경 지역을 생각하면...) 조금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박문수를 암행어사 이전엔 이인좌 난의 종사관을 지낸 것으로 기억하는데, 선후가 바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적지 않은 치적과 공훈을 세웠는데, 소싯적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오히려 민초들과 관련된 세간 시정에 밝았던 것도 이에 한몫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민초들 사이에선 그의 어사 시절에 관하여 갖가지 민담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16] 이런 이미지 때문인지 그가 빈민구제 활동을 활발히 펼친 영남지역에서는 신격화되기까지 했으며 특히 경상북도 영양군에서는 아예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신 서낭당을 만들어 지금도 제사를 지내는 곳도 있다. 박문수가 실제로 암행어사와 관찰사로 활약한 지역은 영남지역 뿐이지만 영남지방을 제외한 지방에도 박문수가 왔다갔다는 설화가 있을 정도로 일반 백성들한테 명성을 떨쳤다.

내가 문책을 당하는 것은 작은 문제이나, 백성을 구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

타지 백성들을 대거 구한 일도 있다. 경상 관찰사 시절 수해를 보고는[17] 즉각 영남 관찰사로 구호곡들을 미리 거둬 배로 보내 함경도의 백성들을 구한 것이다. 영남 관찰사 박문숩니다 더구나 구호가 더욱 급해지니 대신들의 재물을 거두어 나라에서 돕자라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이는 절차를 무시하고 다이렉트로 보낸거라 박문수가 각오한 대로 노론의 엄청난 공격을 받았으나 영조가 용서하였고 박문수에게는 송덕비(북민감읍비)가 세워졌다. 후에 함경도 진휼사로 백성을 구한 적도 있는데(1741년), 아마 이 경력으로 다시 한번 백성을 구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만, 그가 암행어사를 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18] 어사를 하긴 했지만 암행어사가 아닌‘별견어사(別遣御史)’를 하였는데, 지방관 시절 행적이 결합되어 암행어사 박문수의 이야기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위에 나온 지방관으로서 백성을 진휼한 일화들이 암행어사 설화로 변모하여 전해진 셈이다.

5 설화

조선시대 인물 중 구전설화가 가장 많은 인물이 바로 박문수다. 《한국구비문학대계》[19]에서 박문수가 등장하는 설화가 97건이나 되는데 이는 이항복, 이이 등이 20~30건으로 2위를 기록한 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1. 맹꽁이 서당 등에 소개된 또 다른 야사에 의하면, 길을 가다가 우연히 어느 영험한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불에 타도 죽지 않으며 그 법력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쳐준다고. 하지만 박문수는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들어 그 스님이 불 속에서도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는 무대로 가서 관중들 틈에 끼어 지켜보기로 하는데 그 날은 법력이 모자랐는지 결국 극락세계로 가게 되었다. 그러자 박문수가 "이 스님은 사기꾼입니다"라고 폭로하고 왜 멀쩡했는지 밝혀냈다. 그 수법인즉슨 장작더미 밑에 암자 뒤로 통하는 굴을 파 놓고 장작더미에 불이 붙으면 그 굴로 들어가는 거였는데 누군가 입구를 막았기 때문에 실패한 것. 지금으로 치면 마술사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걸 갖고 병을 고치네 마네 하며 약장수 비슷한 짓을 하니까 이 쉬발럼이 어디서 약을 팔어 사기지... 그리고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 밝혀냈지만 관속들 몰래 함께 빠져나가고 왜 살해했는지 물어봤더니 그 범인도 사실 사기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참고로 맹꽁이 서당에선 이 사기꾼 스님이 '승천 법사'라고 불렸다. 스님의 법명 자체가 사망 플래그였다.[20]

2. 무주 구천동 에서의 설화도 유명하다. 밤중에 덕유산에서 헤매다가 어느 마을에 당도하였는데 다들 불을 끄고 잠이 든 가운데 유독 어느 한 집만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을 괴이하게 여긴 박문수가 몰래 들어가서 문틈으로 엿보았더니 젊은이가 아버지로 보이는 늙은이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고 그 늙은이가 칼로 젊은이를 살해하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급히 말리고는 사연을 들어 보았는데, 마을에 사는 어느 힘 깨나 쓰는 포악한 천씨 부자(천씨 집성촌이었음)가 느닷없이 달려와 누명을 씌우고는 그 아내와 며느리를 같은 날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자신들에게 강제로 네토라레를 시키려고 했다는 것. 그래서 그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동반자살을 시도했던 것이다.[21]

박문수는 두 부자를 안심시키고 바로 무주 고을로 가서 광대들을 소집하고는 그 중 힘 좋고 재주 잘 넘는 광대들을 골라 뽑아 오방색 깃발과 장군복을 준비해서 같이 그 장소로 다시 갔더니 마침 날이 밝아서 과연 그 천씨 부자가 결혼식장을 차려놓고 네토리를 시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어느새 구경꾼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경꾼들이 두 무리로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박문수가 황색 깃발을 든 황룡 신장(神將)으로 코스프레를 하면서 다가왔다!! 그리고 차려져 있던 혼례상을 벼락같이 치고는 큰 소리로 4명의 사신 신장을 차례로 부르니 사방에서 신장 코스프레를 한 광대 4명이 1명씩 벼락같이 날아와 황청백주현(황룡청룡백호주작현무) 오방신장이 한 자리에 십자 모양으로 선 형상이 되었다. 그러자 다시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옥황상제의 명을 받들어 이 자리에 왔노라. 어느날 어느시에 무주 구천동에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른 사악한 신랑 두 놈을 잡아오라 하셨으니, 사방 신장은 협력하여 즉시 사모관대한 두 놈을 끌고 가도록 하라." 이 말에 광대들이 2인 1조로 천씨 부자를 끌고 나갔고, 구천동 밖 삼십리쯤에 있는 어느 산골에 다다랐을 때 박문수는 그간 천씨 부자가 저지른 죄들을 낱낱이 논한 후 광대들을 시켜 천씨 부자를 그 자리에서 처형하고 그 시체를 묻고 광대들에게 사례한 후 구천동을 떠났다.[22]
10년 후 다시 구천동에 갔더니 생전 처음 보는 큰 기왓집이 있었다. 10년 전 그 부자의 집이었다. 박문수가 그간의 일을 물어보니 그 일이 있은 뒤로 하늘이 그 덕을 아는 집이라 하여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가세가 번창하게 되었다 한다. 이에 박문수는 그저 웃으며 모두 하늘의 덕이라고 말하고 다시 구천동을 떠났다고 한다.
3. 매파좌수가에 추파를 넣었다가 좌수의 분노를 사 괜히 망할 뻔 했던 같은 성씨의 착한 총각을 보자, 자신이 삼촌을 자처하여 암행어사 마패 들이밀고 좌수의 딸과 혼인 시키고, 재산의 절반도 총각에게 넘겨주게 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거꾸로 혼기 지난 처녀들의 짝을 찾아주었다는 내용도 실록에 있다. 본격 커플 메이커?[23]
4. 한번은 친척집에 잔치가 있어 밤을 새었다가 다음날 일어나서 세수를 하는데, 바로 앞서 세수를 하던 친척이 베로 된 수건 하나를 저 혼자 쓸 것 처럼 마구 쓰는 것을 보고 뒷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고 여겼다.수건에 코라도 풀어놓은 모양 이 친척이 나중에 평양감사로 임명받았다고 하자, 임금에게 찾아가서 일전의 일에 대해 이야기 했고, 임금도 배려 없는 그 친척에게 평양감사를 맡기기 골룸했는지, 취소시켰다고 한다.
5. 하루는 그가 고개를 넘다가 그만 배고픔에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그 때 어느 한 여인이 쓰러진 박문수를 발견했는데, 주위에 먹을 것도 없던 터라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그녀는 가슴을 내밀고(!) 박문수에게 모유를 먹이기 시작한다.(!) 이 때 그 광경을 본 나물 캐는 아낙네들은 경악했으며, 그 사실을 그 여인 남편에게 일러바쳤다. 화가 난 남편은 박문수와 아내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박문수가 마패를 내밀었다. 그러자 남편은 얼굴이 사색으로 변하면서 박문수에게 용서를 빌었다.아니 왜?? 박문수는 그 남편에게 따끔하게 호령아니 뭐요??을 한 다음 다시 갈 길을 갔다. 그 뒤 남편은 나라에서 파견한 어사를 폭행했으니 무사하지 못했을 터, 결국 관아에서 원님의 처벌을 받을 위기에 놓일 때 박문수가 남편을 용서하고 자신을 살려 준 아내에게 상을 내려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어사에게서 논밭 50마지기를 상으로 받았으며, 그 후 마패를 가진 사람들이 가서는 안 될 고개라는 뜻인 금패령(禁牌嶺)의 유래가 되었다.[24]
6. 하루는 박문수가 박좌수[25]라는 부자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그자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조카가 그 유명한 박문수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 놀라서 밤에 몰래 마패를 보이고 박좌수를 추궁하자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데... 놀랍게도 그 박좌수는 원래 백정 출신이었다. 당연히 백정은 조선시대에 사람 취급도 안했는데 좌수 증명서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박문수가 물어보니 그는 원래 백정 일로 많은 돈을 벌긴 했지만 백정이다보니 길가는 어린 아이에게도 천시를 당해야 했고 이 억울함을 알고 지내던 그 고을 이방에게 호소했는데[26] 이 이방이 꾀를 내어 마침 새로 온 수령에게 박씨를 좌수로 추천했던 것. 물론 그 동네 양반들이 당연히 들고일어나서 좌수 자리는 취소되었지만 좌수가 되었다는 증명서 자체는 갖고 있었기에 이 증명서를 가지고 다른 곳에 이사해서 살면서 양반 행세를 한 것으로 아무리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으니 유명한 박문수를 자기 조카라고 속인 것이었다. 박문수가 이 이야기를 듣고 박좌수를 더이상 추궁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주자 박좌수도 이를 고마워해서 나중에 박문수 몰래 그의 집을 새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사실을 안 박문수의 동생이 박좌수의 존재를 알고 감히 백정따위가 양반을 농락한다며 그의 집으로 가서 큰소리를 쳤지만 오히려 박좌수 집 하인들에게 매를 맞고 "이놈이 제 조카인데 미친 병에 걸려서 헛소리를 내뱉는답니다."라는 말을 듣고 쫒겨나 버렸다. 이후 박문수의 동생이 박문수에게 이 일을 호소하자 박문수는 웃으면서 박좌수가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인데 너같이 어린 녀석이 함부로 상대할 인물이 아니라며 오히려 동생에게 한소리 했다고 한다.

6 기타

  • 그가 과거를 보기 전 칠장사에서 소원을 빌고 시험에 합격했다는 설화가 남아있어서 수능 시기 쯤 되면 전국에서 학부모들이 와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 칠장사 옆에는 박문수가 걸었다는 박문수길이 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박문수의 방계 후손이라고 한다. 박문수의 10대조 박수림의 형 박호림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직계 선조. [27] 그런데 박문수의 후손 중 하나는 반역죄[28]에 연루되어 목이 잘렸다. 안습.
  1. 이 드립은 호랭총각에 등장하기도 했다. 작가 역시 이름이 같은 점을 눈여겨 본 듯.
  2. 양반도 군포를 내야한다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물론 호포제에 대한 주장 자체는 이전부터 나오고 있긴 했는데(여기에 포함되는 대표적인 인물이 송시열) 꾸준히 밀어준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3. 단지 호포제를 주장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원래 성격 자체가 꽤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조크를 자주 날리는 직선적인 성격이었다. 오죽하면 실록에 "연석에서 골계를 잘 하고 행동이 거친 병통이 있었다"고 평가됐을 정도.
  4. 경종이 실시한 특별 시험으로 소론만이 시험에 응시가 가능했다. 사실 이정 두번이나 더 도전했었는데 떨어진 전력이 있었다.
  5. 이 어른이 당대 소론의 영수이자 박문수의 먼 친척관계였던 운곡 이광좌라는 얘기가 있다. 백사 이항복의 현손.
  6. 이 설화는 KBS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도 어레인지하여 방영했다. 박문수 역할을 한 배우는 이민우.
  7. 특히나 민담 속에서 사랑받는 인물이기 때문에 원래 있었던 다른 민담이 박문수의 것으로 둔갑했을 가능성도 꽤 높다.
  8. 영조시절의 소론은 이광좌 정도만 빼면 다 탕평파다. 안그러면 살아남을수가 없다.
  9. 경상남도 진주시와는 상관이 없다.
  10. 이건 사실 불법인데.. 사전보고 없이 경상도 의 곡식 을 함경도 로 운반했기 때문에 그에대한 문책을 받을 상황이다. 아니 왜? 좋은일 하고 처벌받아? 그런데... 내가 처벌받는것 은 작은일 이나 백성들이 피해를 보는것은 큰 일에 속한다 라고 했다고..역사저널 그날-60화에 관련 에피소드 가 나왔다.
  11. 이 때 청나라 배들의 불법 어업 및 밀무역을 막기 위해 전선을 건조하고, 이에 필요한 예산을 조정에 요청했다가 영조에게 퇴짜를 맞았다. 이 때 영조가 내세운 논리가 가관(?)이다. "이순신은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혼자서 전선을 만들었는데? 아무리 어려워도 그렇지, 알아서 돈을 마련해라." 사실 영조의 주장이 특별한(?) 것도 아닌게 임진왜란 이후 이순신은 조선 무신들의 '모범'이 되어서, '이순신은 해냈는데 누구는 그러지 못하다'라는 식으로 비교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근데 사실 이순신은 너무 먼치킨이라... 전 이순신이 아니란 말이옵니다. 전하
  12. 정조가 아닌 일찍 죽은 정조의 형이다. 후일 '의소세손'으로 추증.
  13. 물론 어영청에서 호조에 갚아야 할 그 군량미가 바로 임금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재산이긴 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탑전에서 이렇게 상례에 벗어날 정도로 말싸움을 벌여대면 둘 다 추고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만큼 박문수가 거칠게 물고 늘어지기도 했고.
  14. 생전엔 소론계에 그 성격때문인지 정승은 몰라보지도 못했다. 신임대로라면 삼정승중 하나라도 해 봤을 사람이
  15. 박문수의 작위 '영성부원군'에서 따온 호칭. 이항복의 '오성'과 비슷한 의미다. 영성은 박문수의 본관인 고령군.
  16. 그 중 반수 이상이 '어사탐정 박문수'랄까..? 애매한 송사 처리와 관련된 일화들, 심지어는 다른 어사들의 일화나 민담도 모조리 박문수의 이름으로 흡수되었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진주의 박씨성 가진 백정을 삼촌으로 모신 이야기.
  17. 영일만(포항)에 가재도구와 관들이 밀려와 해변에 쌓인 것을 보고 사태를 직감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조선 팔도가 가깝지 않았고, 함경도는 높은 산맥에 막혀있었단걸 생각하자.
  18. 어사 라고 하면 모두들 암행어사 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신분을 비밀로 하고 암행어사 의 일을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 구휼.감찰. 등을 위해 파견이 될때 가 더 많았고 파견된 어사 가 제대로 일을 하는지 를 감시하는 역할로 암행어사 를 비밀리에 딸려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어사..와 암행어사.. 는 사실 동격이다. 암행어사 라고 권한이 더 있는건 아니다. 오히려 고생만 더 할 확률이 높다!
  19. 각 지역별 구전되는 구비문학을 집대성한 연구총서.
  20. 실제로 만화에서 승천 법사가 타죽자 구경꾼 중 한 사람이 승천 법사가 정말로 승천했네라고 개드립을 친다(...).
  21. 여기서 박문수의 능력(?)을 알 수 있는게, 길이 잘 닦인 현대에도 덕유산 자락에서 무주 읍내까지는 자동차로 30분 이상 걸리는 험준한 곳인데도 하룻밤만에 주파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설화지 한편으로 생각하면, 과거에는 여행자는 무조건 걸어다녔다는 점에서, 현대인의 걷는 능력과 비교하는 건 무리라고 볼 수도 있다.
  22. 익스큐즈 하고 용서해줬다는 식으로 각색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랬다면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예전에 능인출판사에서 출판한 만화 박문수전도 이 각색본을 따르고 있다. 아마 아이들이 보는 만화에 천씨 부자를 끔살하는 장면을 그대로 묘사하면 너무 잔인해서 순화한 듯. 사실 능인출판사가 출판하는 만화는 이런 장면을 많이 순화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임진록에서는 동래부사가 사명당이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된다고 하자 업신여기다가 처형당하는 내용이 있는데 능인출판사에서는 이 부분을 동래부사를 하옥시키는 장면으로 순화시켰다.
  23. 조선시대에는 혼기를 놓친 처녀, 총각의 원한이 하늘에 닿게 되면 나라에 흉한 일이 생긴다 하여, 조정 차원에서 지방관들로 하여금 노처녀, 노총각의 혼사를 촉진시키는 임시정책을 시행하게 한 적이 꽤 많다. 짝이 없으면 다른 고을에서까지 찾아다 준다거나, 혼례비용이 없으면 빌려준다거나 하는 정책뿐 아니라 노처녀 노총각이 많은 고을의 수령일 경우 진급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오늘날의 저출산 대책보다 좋아보이는건 기분탓이다
  24. 구전으로 전해지는 설화답게 이본이 여럿 있는데, 여인이 쓰러진 낯선 사내에게 젖을 물리고 선행의 보답을 받는 건 동일하지만 그 사내가 박문수가 아닌 암행어사인 이본도 있다. 금패령이 함경남도에 있는 지명이고 박문수는 영남 암행어사로 활동했다는 걸 보면 본래는 그냥 암행어사 설화였던 이야기가 원본이었다가 박문수 설화로 변이한 사례로 볼 수 있다.
  25. 좌수는 향청의 가장 높은 직위로 보통 그 동네의 힘깨나 쓰는 양반이 맡는 자리다.
  26. 이 이방은 과거 난처한 일이 생겼을때 박좌수(당시는 박백정이었지만)에게 도움을 받아서 그 이후 형님동생하는 사이였다.
  27. 그래서 박정희의 아버지 박중빈은 구미 모래실의 터줏대감인 백씨들과 서로 누가 더 양반입네하고 싸웠다나 뭐라나. 관련은 적지만 사족으로 일화를 첨부하자면 훗날 헌병사령관이 되는 원용덕은 박정희가 삼촌이랍시고 성이 다른 사람을 데려와서 술을 대접하자 농담으로 "정희야, 넌 상놈이구나."라고 했는데 박정희가 정색하고 "난 양반이다."라고 따지자 "그런데 왜 삼촌과 성이 다르냐?"라고 묻자 하얗게 질린 박정희가 "외삼촌이라 그렇다."라고 얼버부렸는데 알고보니 그 삼촌이란 자가 남로당의 중책으로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였다.
  28. 후손 박종일이 홍경래와 결탁해 역모를 꾀하다가 사형되었다.